소설리스트

98화 (98/141)

98화

“…로하넨. 괜찮아요?”

“네? 네에….”

키리아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에게 마시는 피로회복제를 건넸다.

고맙다며 웅얼거린 로하넨이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었을 때 로하넨은 굉장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키리아는 로하넨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안경까지 충격으로 깨지는 줄 알았어.’

상급 신관으로서 지금의 대신녀가 가짜라는 사실에 충격.

그리고 그런 일이 있는 줄 모르고 성의 인력을 충원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에 또 충격.

그래서 로하넨은 며칠째 밤을 새며 새로 들어온 사용인들의 신원을 샅샅이 재점검하는 중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채용할 때 이미 확인은 했을 거 아니에요?”

“물론입니다. 그래도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하넨이 피로회복제를 두 병째 털어 넣으며 대답했다.

“게다가 저만 고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앨마도 마찬가지인 것을요.”

“그건 맞수.”

앨마가 투덜거렸다.

키리아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주방이었다.

앨마는 여전히 주방장이었지만, 주방 하인들의 반 이상이 바뀌어 있었다.

기존의 하인들은 본래 칼을 잡는 기사나 병사들이라, 사용인이 늘어나자 성의 치안을 담당하게 됐다.

본업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래서 지금 주방의 사용인들 대부분은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손발이 착착 맞던 부하들 대신, 앨마의 표정 하나에도 기가 죽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도 공작성의 발전을 위해서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라 앨마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나마 조앤이 옆에서 도와줘서 좀 낫다우. 도련님과 아가씨에게 들어가는 음식은 나랑 그 애만 만들고 말이우.”

“고마워요, 앨마.”

“에그, 당연한 일인걸요. 이 풋내기들도 익숙해지면 더 쓸 만해지겠지요. 그래야 인간 아니겠수?”

상관의 으름장 섞인 말에 일하던 사용인들이 흠칫했다.

그때, 제논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앨마. 아, 키리아도 있었군요.”

“도련님! 여기까지 어쩐 일로.”

갑작스런 공작의 행차에 주방 하녀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앨마가 앞치마에 물기 있는 손을 닦으며 얼른 제논에게 다가갔다.

키리아도 제논의 앞으로 오며, 그가 들고 있는 음식 쟁반을 대신 받았다.

“왜 이걸 직접 들고 오셨어요?”

그러자 제논이 여상히 말했다.

“독이 들어있었습니다.”

“…….”

마치 ‘맛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듯한 너무나 태연한 말투에, 충격이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네에?! 괘, 괜찮으신 거예요?”

“이보다 더 강한 독도 겪어봤으니까요.”

“그래도!”

“아이구, 맙소사!”

키리아와 앨마가 경악하고.

“…아아.”

로하넨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버렸다.

º º º

제논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그를 앞뒤로 따르는 호위 병력도 함께 이동했다.

우르르….

이번엔 제논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또다시 호위 병력이 함께 이동했다.

우르르….

“…….”

제논은 짜증 섞인 한숨을 조용히 뱉었다.

“너희들로 막을 수 있는 암살자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외람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지 말입니다.”

그를 둘러싼 호위병들은 힐끔, 눈알을 굴려 주군의 심기를 살폈다.

“물론 주군은 강하시지만 암살의 위험은 일상생활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 말입니다. 저희가 징검다리의 돌멩이 하나까지 먼저 살펴드리고 싶지 말입니다.”

“…….”

부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독살을 시도한 자가 색출될 때까지는 만전을 기해야 했다.

그래서 로하넨이 제논에게 경호를 붙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원이 늘어난 건 한스의 탓도 있었다.

신전에서 황실 정보원에 의해 정신을 잃었던 그는 지진 덕분에 의식을 되찾았다.

신전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얼른 달아났지만, 혹시 모를 추격을 피하면서 오느라 도착이 늦었다는 설명이었다.

한스가 호위병의 편을 들었다.

“맞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십시오. 결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넌 가서 반성이나 해라.”

“예….”

한스가 쓸쓸히 퇴장했다.

사실 제논은 두터운 호위를 참을 만했다.

그러니까, 키리아를 만나지 않을 때는 말이다.

“아, 공작님, 좋은 아침이에요.”

제논은 자신의 방으로 오던 키리아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키리아가 다가와 제논에게 약병을 건넸다.

“로하넨에게 주면서 피로회복제를 더 만들어봤어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못한 마나 진단을 잠시….”

키리아가 제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말랑하고 따뜻한 손이 닿자 제논은 피로회복제로도 풀리지 않던 피로가 스르르 녹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막 노곤노곤한 기분에 젖어들려는 찰나.

키리아가 손을 팟 뗐다.

“자, 끝.”

“…5초 지났는데요.”

“에이, 그래도 그만큼 자주 해드리잖아요. 그리고, 음….”

우물쭈물 말을 꺼내길 망설이며, 키리아는 가까이에 있는 호위병들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제논의 호위병도 많은데, 키리아도 그만큼 호위들이 따르고 있었으니까.

이 두 무리의 호위병은 자기네 주군과 소중한 약제사가 스킨십을 할 때마다 흐뭇하고도 므흣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 주책이었다.

“에, 에헴!”

어색한 헛기침을 한 그녀가 제논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나중에 또 해드릴게요. 그럼!”

도망치듯 빠르게 멀어지는 키리아.

그랬다. 두터운 호위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키리아의 마나 진단이 너무 감질난다는 것.

제논은 마나 진단을 받기 전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신전의 거울 정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혼자 심호흡을 하는 일이 잦아진 그였다.

이런 와중에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도망가는 키리아 때문에 애가 탔다.

‘키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제논의 눈썹 끝이 조금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키리아의 마음을 리안 경으로부터 돌리려면 자신이 더 다가가야 했다.

…메데이아에게 제자가 뭘 좋아하는지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키리아가 메데이아라면….’

아니야. 제논은 고개를 저었다.

속내를 털어놓으면서까지 키리아가 부정하지 않았는가.

제논은 그녀를 믿기로 했다.

키리아는, 그녀는 내 믿음을 져버릴 사람이 아니니까.

º º º

“호위받는 거, 참 피곤한 일이구나.”

키리아는 빗질에 평소보다 많이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래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다 보니 옆에 사람이 계속 붙어 다니는 게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의 방에서 연구를 할 때조차 경계를 풀지 않는 호위병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따로 있었다.

‘마나 진단을 제대로 좀 하고 싶은데….’

공작님의 손을 잡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흥미로워하는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키리아는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저 아재들 때문에 신전에서의 그 일이 자꾸 생각나서 집중도 못 하고!’

생각하니 좀 열받아서 괜히 옆에 있는 호위를 째려봤다.

호위가 해맑은 표정으로 키리아를 쳐다봤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지 말입니다.”

“…에휴. 아니에요.”

말해 뭐하겠냐.

키리아는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 없다 중얼거리며 책 위 글자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밤이 깊자 키리아의 방에 있던 호위들이 문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수고해주세요.”

“당연하지 말입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깊은 밤, 젊은 여성의 침실에서까지 호위를 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문 앞을 지키는 것이었다.

두꺼운 문을 닫자 비로소 혼자가 될 수 있었다.

키리아는 한결 편안해진 기분으로 침대에 누우려고 했다.

그때였다.

톡, 톡.

무언가가 창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전서구인가?”

의아해진 키리아는 창가로 다가갔지만 창문을 열지는 않았다.

낮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호위들이 고생하는 때에 함부로 굴 수는 없지.

그때 다행히 창문을 두드린 사람이 얼굴을 비쳤다.

제논이었다. 그가 키리아의 창문과 연결된 작은 테라스에 서 있던 것이었다.

“공작님?”

놀란 키리아가 창문을 열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렇긴 했지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오히려 그 반댑니다. 지금 이 시간이 그대에게 문젯거리가 없어지는 때니까요.”

호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문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을 것이기에 제논의 목소리는 작았다.

키리아를 바라보던 제논이 살짝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계속 참았습니다.”

그러며 키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끌어다 왼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대에게 더 오래 닿을 수 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마, 마나 진단 말씀하시는 거죠?”

키리아는 쿵쿵 뛰는 가슴을 숨기려 애썼다.

제논이 키리아와 깍지 낀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뼈가 불거진 단단한 손가락이, 보란 듯이 키리아의 손가락을 꽉 끌어안았다.

제논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키리아를 응시한 채였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

꿀꺽. 키리아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니, 미친! 왜 침 삼키는 소리가 이렇게 큰 거야!’

당황한 키리아는 얼른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마나 진단을 시작했다.

“그, 그럼 오신 김에 제대로 해볼게요.”

“부탁합니다.”

숨을 고른 키리아는 천천히 제 기운을 움직였다.

그녀의 마나가 훈풍처럼 제논에게로 스며들며 부드럽게 뒤섞였다.

가시가 튀어나올 듯 거칠어진 그의 기운이 진정하도록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엉키려는 흐름을 발견하면 그 사이로 끼어들어 나긋하게 밀어냈다.

제논의 기운과 키리아의 기운이 서로 뭉근하게 휘감겼다. 살짝 떨어지면, 곧바로 다시 엉겼다.

‘그런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작업인데 어째서 손끝이 축축해지고 아랫배가 당기는 건지 모르겠다.

신전에서의 그 일 때문인가?

근데 나만 신경 쓰는 거야?

키리아는 무심코 시선을 들어 제논을 쳐다봤다.

그러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시선이 꽂혔다.

그 안에 얼핏 보이는 가지런한 이와…….

“…조금 더. 아직 놓지 마십시오.”

말할 때마다 움직임이 얼핏 드러나는 선홍색의 혀까지.

어째선지, 키리아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말았다.

때마침 제논이 마른 듯한 제 입술을 혀로 살짝 훑었다.

“……!”

펑, 소리가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키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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