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41)

97화

“크윽…! 란페르세 공작! 설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도 더는 내 성을 비워둘 수 없던 참이니까요.”

이를 악문 추기경에게서 시선을 미끄러뜨린 제논이 몸을 떠는 대신녀를 바라봤다.

“재해는 유감이지만 신께서 보살펴주시겠지요. 그럼… 강녕하시길.”

제논은 지진에 놀라 제게 매달려 있는 키리아를 한 번 더 단단히 고쳐 안았다.

그리고 당황한 신관들을 뒤로 하고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º º º

속전속결이란 바로 이런 것?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키리아는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끔벅였다.

얼떨떨한 정신을 부여잡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논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공작님이 지진을 일으킨 거예요?”

일각수가 내 뜻대로 난동을 피워준 건 알겠는데 이후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리를 엇건 제논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신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전의 건물 일부가 여전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키리아의 물음에 제논이 턱을 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어떻게 된 거냐면.”

“이렇게 된 거지!”

외침과 함께 마차에 가울이 뿅 나타났다.

뒤이어 꽃님이가 키리아의 무릎 위에 앉으며 나타났고 셜론도 등장하면서 마차가 복작복작해졌다.

“에엥? 다, 다들… 어떻게?”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키리아.”

“네?”

제논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여차하면 신목을 중앙신전에 꽂아버린다고요.”

“…진담이었어요, 그거?”

“물론입니다. 키리아도 재밌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웃었던 겁니까? 그런 식의 농담을 좋아하는군요.”

제논은 기억해 두겠다는 듯 진지하게 턱을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

키리아가 정정하려던 때 가울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묻은 거만한 자세로 말했다.

“그런 건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신전을 한바탕 뒤집어줬다는 거지. 아, 백년 묵은 변비가 내려가는 느낌이다.”

<쯧쯧. 마족 뇨속 입버릇이 더럽꾸나.>

꽃님이가 혀를 찼다.

가울과 꽃님이가 서로 기싸움을 시작하는 바람에, 자초지종의 설명은 셜론의 몫이 됐다.

“만일을 대비해서 공작이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라오. 공작이 저 마족을 소환하면 내가 그걸 감지해 꽃님이와 함께 해당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지. 그래서 우리 셋이 함께 있는 거라오.”

어느새 셜론도 신목의 정령을 꽃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 지진은요?”

“그것도 간단하오. 마족이 땅에 충격을 가하면 그 벌어진 틈으로 꽃님이가 신목의 뿌리를 뻗어 건물을 흔드는 게지. 물론, 내 마법도 극적인 효과를 더하고.”

그러면서 셜론은 두 손으로 건물을 드드드 흔드는 시늉을 했다.

마족과 신목과 마탑주라는, 언밸런스한 멤버는 이렇게 협동하게 된 것이었다.

모두 제논의 아이디어였다.

키리아는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제논을 바라봤다.

“제가 알던 그 공작님 맞나요?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칭찬인 거겠죠?”

“물론이에요! 대체 어떻게 그렇게… 상대를 빡치게 만드는 방법을.”

키리아가 알고 싶어하자 제논은 부끄러운 듯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대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보니 그런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

칭찬인데 욕을 먹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공작님에게 저는 대체 어떤 인물인 거죠….”

“…….”

대답 대신 해사하게 잘생긴 미소를 짓는 제논.

미인계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모양새였다.

키리아는 안구가 깨끗해지는 그의 보배로운 미소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분한 마음도 꾹 참았다.

미인계가 나날이 발전하는 게 보였다.

<우리 애는 죵말 머시써….>

꽃님이까지 홀려버렸다.

두 여성(?)의 모습에 셜론이 혀를 찼다.

“신전에 본때를 보여준 일은 됐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소?”

“네?”

정신을 차린 키리아가 셜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분명 마법 해제 장치가 작동한 것 같은 마나의 흐름을 느꼈는데…. 내 아티팩트가 아직 작동 중인 걸 보면 공작의 마법이 해제된 건 아닌 듯하고 말이오.”

셜론이 제논을 쳐다봤다.

제논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하는 눈치였다.

“아, 맞아요.”

키리아는 작게 손뼉을 쳐 모두를 집중시켰다.

“마법 해제 장치는 분명 작동했어요. 대신녀한테요.”

“…대신녀에게 말입니까?”

“공작님, 전에 저한테 대신녀님은 노부인이라고 하셨죠?”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가끔 둘이서 차를 마실 때 대신녀는 베일을 벗곤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키리아는 잠깐이지만 똑똑하게 보았던 대신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제가 본 대신녀님은 아주 젊은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저와 비슷한 나이일 거예요.”

“……!”

가울을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키리아 양. 잘못 본 건 아니오? 틀림없소?”

“아주 가까이서 봤는걸요. 잘못 볼 리 없어요. 눈도 마주쳤고.”

키리아는 셜론에게 대답했다.

“게다가 대신녀님이 저한테 얼굴을 보인 것 같자 추기경도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어요.”

“허어…….”

대신녀의 얼굴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신전에서는 새로운 대신녀를 발표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신녀는 진짜 대신녀와 바꿔치기 된 가짜라는 말이었다.

<어찌 그론…! 감히 신을 기만하다니! 그론 주제에 우리 신목의 신성을 으심해따구?>

꽃님이가 녹색 머리카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잔뜩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키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죠심해. 네가 비밀을 바버렸다면 신전에서는 너룰 노릴 고야.>

“키리아 양만 노리진 않겠지.”

셜론이 끼어들었다.

“키리아 양은 공작의 주치의요. 자신이 본 바를 상관에게 보고해야 하는 위치니, 이미 그쪽에선 공작도 대신녀의 비밀을 알 거라고 확신할 것이오.”

셜론의 말에 동의하는 듯 제논은 말이 없었다.

키리아도 그에게 동의하는 바였다.

‘나와 공작님, 둘 다를 노릴 거야. 하지만 우리가 신전을 떠나온 이상 한 번에 둘을 해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누구를 먼저 표적으로 삼을까.

그 문제의 답은 금방 밝혀졌다.

º º º

“젠장, 젠장!”

와장창! 추기경이 던진 유리 램프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대신녀는 그 옆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멍청한 것! 하필 약제사한테 얼굴을 보이다니! 왜 마법 해제 장치에 걸리느냔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추기경이 대신녀를 후려칠 듯 손바닥을 올렸다.

그러나 방으로 들어온 누군가 때문에 행동을 멈춰야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 으음, 전하.”

추기경이 애써 진정하며 허리를 숙였다.

공손히 소파로 황태자를 이끌고는 대신녀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보냈다.

대신녀가 얼른 황태자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치웠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알렌스가 추기경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없었다.

“폐하께서 실망이 크시겠군요. 추기경이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까?”

“…송구합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처리요?”

“예.”

추기경은 감히 앉지도 못한 채 알렌스에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신목에 관한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공작가에 사람을 심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성공했지요.”

“흠.”

“대신녀의 얼굴을 들키긴 했지만, 교단의 수장에 대한 추문을 그쪽도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증거도 없고요. 그러니… 목격자를 제거하면 큰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약제사를 제거한다고요?”

알렌스가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흡족함으로 이해한 추기경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반드시….”

“예. 알아서 잘해보세요.”

“아? 네, 넷.”

“그보다 실험은 진척이 있습니까?”

이제야 알렌스가 본론을 꺼낸 듯했다.

분명 더 큰 분노를 받으리라 예상했던 롤스 추기경은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화제 전환을 반겼다.

“네. 원하시는 형태로의 완성이 가깝습니다. 꽃의 마기 통제는 이미 완성된 상태고요.”

“실험체는?”

“걱정 마십시오. 뒤탈이 없는 것들만 골라 실험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알렌스가 추기경의 어깨를 툭툭, 묵직하게 두드렸다.

“믿고 있습니다, 추기경.”

“감사합니다.”

“부디 내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요. 추기경을 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흠칫. 롤스 추기경의 어깨가 떨렸다.

알렌스는 빙긋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방을 떠났다.

º º º

셜론의 마법 덕분에 키리아가 탄 마차는 며칠 더 빨리 공작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작성의 방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어.’

공작성에 도착한 키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며 한 번 더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다짐이 조금 무색해짐을 느꼈다.

본성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그것도 손님이 아니라, 사용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로하넨이 서둘러 다가와 제논과 키리아를 맞았다.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별일은 없으셨고요?”

“로하넨, 저 사람들은 처음 보는데요…?”

“아, 그러실 겁니다.”

로하넨이 뿌듯하게 웃었다.

“한 달 뒤에 주군의 생신 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남부 귀족들도 오는 자리니 공을 들이려면 마물로는 부족해서 인력을 대거 충원했습니다. 아무래도 섬세한 일은 마물보다는 사람이… 어, 표정이 왜들 그러세요?”

키리아와 제논은 서로 난감한 시선을 교환했다.

로하넨의 조치는 나무랄 데 없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신전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뿐.

“사용인들의 신원을 한 번 더 점검해야겠다.”

제논이 말하자 로하넨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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