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급하게 행동하느라 키리아의 옷매무새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제논은 흠칫 손을 거뒀다.
그리고는 휙 뒤를 돌았다.
의아해진 키리아가 그를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공작님?”
“거, 거기 그냥 있으십시오!”
제논이 굉장히 다급히 제지했다.
“네?”
“옷이….”
“아.”
제 옷차림을 깨달은 키리아가 황망히 차림새를 정돈했다.
그 사이 제논은 키리아에게 들리지 않게, 최선을 다해 열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일 초가 일 년처럼 느껴지는 노력 끝에 제논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도 당황했을 텐데, 미안합니다. 경비병의 눈을 속일 방법이 그것밖에 안 떠올라서.”
“…이런 방법은 어떻게 알게 되셨죠?”
“책에서.”
“그거 앞으론 금지예요.”
“…….”
대답을 회피하던 제논이 키리아에게 화제의 방향을 돌렸다.
“어쩌면 예상외로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대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그그건!”
‘아’하는 야릇한 신음으로 경비병들의 주의를 끌고 말았던 키리아였다.
당황한 키리아가 온갖 손짓으로 해명했다.
“고, 공작님이 숨 쉴 때마다 귀가 너무 간지러워서! 공작님이 숨을 참으셨어야죠!”
“간지러웠습니까?”
“그럼요!”
“그것뿐?”
“…네?”
등을 보이고 있던 제논이 다시 키리아를 바라봤다.
오직 키리아만을 담고 있는 제논의 눈동자가 은밀한 열망을 감추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습니까?”
“…그… 으음, 그러니까… 당연하잖아요.”
키리아는 마구 흔들리는 시선을 숨기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제논이 물었다.
“정말입니까?”
“네. 정말.”
“그렇다면 다시 해 봐도 별로 상관은 없겠군요? 간지럽기만 할 테니.”
“……!”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감싸 보호했다.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제, 제가 간지럼에 좀 약해서요!”
“하하하.”
제논이 웃음을 터뜨렸다. 약간의 만족스러움이 담긴 웃음이었다.
물음표를 띄운 채 제논을 멍하니 보던 키리아는 퍼뜩 인상을 구겼다.
“지금 저 놀린 거죠?”
“이런, 들켰군요.”
“으으, 정말!”
공작만 아니었으면 콱 그냥, 이라고 중얼거리는 키리아.
그 뒷말을 자연스럽게 못 들은 척하며 제논이 키리아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가죠.”
“아, 밖에 경비병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랬다.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제논은 여전히 마족의 모습이었고 정원의 유일한 출입구 바깥에는 사람이 있었다.
밖에서까지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쓸 수는 없으니 다른 수를 강구해야 했다.
제 턱을 문지르던 제논이 말했다.
“둘 다 기절시켜버리면.”
“그럼 깨어난 후가 문제잖아요. 분명 우리를 수상하다고 보고할 걸요?”
제논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저들이 마족이 아니라 아쉽군요.”
가장 손쉽고 뒤탈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못해 유감인 듯했다.
“…약제사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주실래요?”
제논을 흘겨 본 키리아는 다른 방법을 계속 고민했다.
제논도 고민하면서 습관적으로 키리아에게 받았던 생명석을 손 안에서 굴렸다.
“아.”
그걸 본 키리아는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생명석은 약재의 기운을 더 잘 흡수시켜주잖아요?”
“그렇죠.”
“혹시 마법의 기운도 잘 흡수시켜줄까요? 그러니까, 공작님한테 마법이 듣게요.”
“마법이라.”
제논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물의 팔 때문에 웬만한 마법은 내게 듣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마족의 모습이기도 하니…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시도할 가치는 있네요.”
“키리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던 겁니까?”
“히히. 제가 아니라 요게 있거든요.”
키리아는 가방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전서구를 잠시 속여야 할 때를 대비해 마탑주 셜론에게서 받은, 착각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다.
“모습을 다르게 보이게 해줄 착각 마법이에요.”
“왜 그런 걸 갖고 있던 겁니까?”
“그,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시고.”
키리아는 반지를 제논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제논의 푸른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공작님, 갑자기 왜 손을 떠세요? 추워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논이 반지를 작동시킨 손에 생명석을 쥐자, 잠시 후 조금씩 마법이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키리아는 제논의 모습이 마족에서 본래의 인간으로 변하는 걸 보며 작게 박수를 쳤다.
“오. 원래의 공작님 모습으로 보여요!”
“그렇습니까?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그때, 멀리서 말이 높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몇 번쯤 반복됐다.
그 소리에 키리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이제 됐으니 얼른 나가요.”
키리아는 제논과 함께 경비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정원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 어.”
그러나 바깥에 서 있는 건 경비병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이런. 이제야 나오셨군요.”
대신녀와 롤스 추기경이 와 있던 것이다.
대신녀의 표정은 여전히 베일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추기경의 희번득거리는 눈빛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논이 담담하게 물었다.
“이런 시간에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일각수가 울었습니다.”
롤스 추기경이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일각수는 마족을 감지하면 울음소리로 그것을 알려주는 영험한 신수지요.”
“……!”
키리아는 속으로 뜨끔했다.
일각수는 분명 마구간에 있을 텐데, 멀리 떨어진 이곳의 기운까지 감지했다고?
너무 뛰어나도 탈이다.
‘그래서 추기경의 표정이 저렇게 자신만만해졌구나.’
마법 덕분에 제논의 모습은 평소처럼 보였지만, 추기경은 이미 함정에 걸린 사냥감을 보듯이 웃었다.
“그게 일각수의 울음소리였군요. 그럼 어서 마족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내게 도움을 요청하시고 싶은 겁니까?”
확신에 찬 추기경 앞에서도 제논은 흔들림이 없었다.
“도움이라니요. 손님께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지요. 다만… 한 가지 협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
“마족은 다른 존재로 감쪽같이 변신할 수 있는 존재. 그를 경계하기 위해 지금 신전의 고위 인사들부터 마법 해제 장치를 거치게 하고 있습니다.”
마법 해제 장치!
키리아는 손바닥에 배인 땀을 몰래 치맛자락에 닦았다.
‘그 장치에 걸리면 분명 공작님의 마법이 풀려버릴 거야!’
효과가 약한 아티팩트인만큼 순식간에 비밀이 드러나게 되겠지.
그것도 고위 인사들이 모인 모두의 앞에서 말이다.
키리아는 저항하기 위해 짐짓 화를 냈다.
“지금 우리 공작님을 가장 먼저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게 신전이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에요?”
“말씀드렸잖습니까. 고위 신관들 모두가 거칠 것이라고 말입니다.”
추기경이 음흉하게 웃었다.
“아니면, 검사에 응하실 수 없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
“…윽.”
“가죠.”
제논이 말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키리아는 그가 내심 긴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 해제 장치로 가겠습니다.”
º º º
마법 해제 장치는 본관의 출입구 앞에 있었다.
바닥에 마법진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마법진 위에 올라서면 대상의 마법이 해제되는 방식이었다.
롤스 추기경이 먼저 장치 위에 올라섰다.
푸른색을 내던 마법진이 이내 희게 바뀌었다.
“이렇게 되면 해제가 완료된 것입니다.”
“…….”
키리아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길, 내가 공작님과 그, 그, 그런 짓까지 했는데!’
쟤가 눈치 없이 울지만 않았어도!
키리아는 고위 신관들과 함께 장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각수를 노려봤다.
오랜만에 마족을 감지해 뿌듯해하던 일각수는 키리아와 제논이 나타나자 ‘어라?’ 당황해 안절부절못했다.
저가 감지한 마족의 정체까지는 몰랐던 모양.
일각수가 당혹해하는 걸 알아챈 키리아는 문득 눈빛을 바꿨다.
‘네가 정말 나한테 복종한다면, 내 뜻대로 해줘.’
“…….”
일각수는 키리아와 눈을 맞춘 채 조용해졌다.
키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거부할 수도 있어.’
이건 신전이 아닌 나를 우선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사이, 제논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마법 해제 장치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추기경과 대신녀가 장치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 해제 장치가 푸른빛을 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논의 입술이 열렸다.
그러나 그의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소리를 높인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히히힝!”
바로 일각수였다!
일각수가 앞발을 크게 치켜올리며 마법 해제 장치 위로 달려들어 주변의 모두를 밀쳐버렸다.
키리아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좋아, 잘했어!’
키리아는 환호성을 꾹 참았다.
‘교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일각수가 미쳐 날뛰면 수습할 수밖에 없어. 몇 시간은 벌 테니 그동안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히힝! 히이히힝!”
일각수의 미친 척은 훌륭했다.
제논은 일각수의 흔들리는 머리를 쉽게 피했고, 추기경도 가까스로 일각수의 뒷발 일격을 모면했다.
하지만 베일을 쓰고 있던 대신녀는 피하는 것이 늦었다.
“아…!”
“윽!”
일각수의 몸통에 얻어맞다시피 한 대신녀는 키리아를 떠밀며 함께 넘어졌다.
대신녀의 주름진 한 손이 마법 해제 장치에 닿고, 베일 일부가 걷혔다.
그녀와 엉켜 있던 키리아는 본의 아니게 대신녀의 베일이 걷힌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됐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이었다.
“…어?”
“…흡!”
대신녀가 숨을 들이켜며 키리아를 밀쳐냈다. 그러며 황급히 베일을 고쳐 썼다.
눈을 부릅뜬 추기경이 황급히 대신녀를 부축했다.
“대신녀님께서 부상을 당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각수도 이상증세를 보이니 공작님께서는 날이 밝는 대로 다시….”
그때였다.
쿠르릉!
바깥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울리더니, 신전 바닥에 쩌적 쩌적 금이 갔다.
“꺄악, 뭐, 뭐지?”
일각수한테 이런 지시는 한 적 없는데?!
땅이 흔들려서 키리아도 휘청거렸다.
우지끈!
균열은 빠르게 번져 마법 해제 장치를 쪼개버리고 말았다.
신전의 기둥이 흔들거렸고, 일각수마저 지진에 당황해 더 높이 우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키리아. 이리로.”
“공작님?”
키리아는 제논이 이끄는 대로 그의 품에 안기듯 달라붙었다.
그녀의 어깨를 한 팔로 단단히 감싼 제논이 추기경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신전에서 손님을 대접할 여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 아니오, 아닙니다. 이 정도는 금방!”
“저런데도 말입니까?”
그러며 제논이 시선을 향한 곳은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손님용 별관이었다.
쿠르릉.
숙소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백해진 롤스 추기경은 마치 함정에 빠진 사냥감 같았다.
제논이 사냥꾼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예정보다 일찍 떠나드려야겠군요. 지금 당장 말입니다.”
“꺅!”
제논은 두 팔로 키리아를 공주님 안 듯 안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