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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41)

95화

거울 정원은 인공 호수가 있는 실내 정원이었다.

문을 통과하자 마치 바깥으로 나온 듯 주변이 탁 트였다.

납작한 돌이 깔린 돌길 옆으로 보랏빛, 푸른빛의 신비로운 꽃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달빛은 유리로 되어 있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것이었다.

하얀 달이 그대로 호수에 비쳤다.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는 호수가 있기에 거울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

다른 일은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제논은 감흥 없는 듯 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이거군.”

호수 근처 나무 위에 달빛을 반사하는 작은 거울이 있었다.

교묘하게 숨겨져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티팩트겠지.

제논은 가볍게 나무를 딛고 그것을 손쉽게 낚아챘다.

그리고 손 안에서 까득 부쉈다.

산산조각 나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울 파편들을 바라보던 제논이 조용히 말했다.

“한발 늦었군.”

그러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신관 복장의 황실 정보원이 있었다.

“어, 어떻게…!”

정보원은 당황한 듯 주춤했다.

“어떻게 알았지? 분명 필체까지 완벽히 복사했는데!”

“그래. 속을 뻔했지.”

그를 향해 완전히 돌아선 제논이 몇 걸음 다가갔다.

“하지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위화감이라고…? 하, 직감으로 알아챘다는 말인가?”

“아니.”

대답한 제논은 잠시 턱을 쓸며 고민했다. 스스로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짚어봤다.

“…아, 그래. 이렇게 말하면 되겠군. 네가 위장한 한스의 정보지는 열성적이지 않았다.”

“뭐…?”

“한스라면 나더러 움직이라고 종용하지 않아. 내가 고생하는 걸 꺼리기 때문이지. 만약 내가 움직여야만 한다면, 굉장히 죄송하다고 사과했을 거다. 하지만 정보지에는 양해 한 마디도 없더군.”

“……?”

“넌 더 공손하고 헌신적이었어야 했다.”

“…….”

정보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상황에 무슨 그딴 농짓거리를….”

“…어느 부분이 그렇게 들렸지?”

제논은 진심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설명하려던 정보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잇, 그딴 건 상관없어! 이렇게 된 이상 죽어라!”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날리며 정보원은 검을 빼 들고 제논에게 덤벼들었다.

제논은 신전을 방문한 손님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비무장이었지만, 사실 언제나 무장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마물의 팔이 훌륭한 무기가 되어주었으니까.

챙! 카앙!

손톱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튀었다.

전형적인 대사와는 다르게 정보원의 실력은 출중했다.

비록 서로 무기를 부딪친 지 몇 합 만에 제논에게 제압당했지만 말이다.

제논이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으며 그를 바닥에 내리눌렀다.

“크윽!”

“이제 진짜 정보를 들을 차례다. 네 소속과 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목적을 밝혀라.”

“…….”

“말하지 않겠다면.”

제논이 그의 머리통을 커다란 검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

머리통을 잡은 손가락에 힘이 서서히 들어갔다.

버티던 정보원은 결국 악 비명을 질렀다.

“화, 황실 정보부! 정보부 소속입니다!”

“황제의 사람이었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은 했다.

대신녀가 즐겨 찾는 정원에서 이런 일을 꾸몄다면 신전과 황제가 손을 잡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우위는 황제가 점하고 있겠지.

‘신목의 정령이 그랬었지. 마계의 문의 봉인은 처음부터 불완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걸 직접 봉인 마법을 건 대신녀가 몰랐을까? 의식을 지켜본 황제도 몰랐을까?

아닐 것이다.

제논 자신은 마계의 문과 연결된 봉인 마법진을 몸에 새겨야했기 때문에 당시 의식이 없었다.

자신에게만 함구하고 두 수장끼리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황제는 이걸 약점으로 신전을 휘두르고 있을 것이다.

“…….”

제논은 분노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 탓에 정보원의 머리를 잡은 손에 한층 힘이 가해지자, 정보원이 고통스러워했다.

“으아악…! 제, 제게 이번 임무에 관한 지령서가 남아있습니다. 그거면 전부 납득하실 겁니다…!”

“내가 가져가지.”

제논은 정보원의 품을 뒤져 돌돌 말린 서신을 찾았다.

그것을 펼치자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푸른달이 진실을 비추리라.]

그때였다.

제논이 들고 있던 서신이 마치 투명한 호수처럼, 거울처럼 표면이 매끄럽게 변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건 시리도록 푸른달이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과거의 시간대 하나를 그대로 잘라 붙인 듯 푸른달 특유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크윽!”

몸 안의 기운이 뒤틀렸다.

서신을 놓친 제논은 제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정보원이 재빠르게 빠져나와 웃었다.

“하하! 용을 잡는 데 무기를 하나만 준비했을 것 같으냐?”

퍽!

“커억!”

제논이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검은 주먹에 정보원은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갈비뼈가 부러짐과 동시에, 그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정원 끝까지 날아가 나무에 부딪히고 정신을 잃었다.

제논은 비틀거리며 정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으윽….”

하지만 호수에 비친 제 모습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모습은 푸른 피부와 유선형의 뿔을 가진 마족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º º º

“쳇. 까다롭긴.”

키리아는 투덜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야산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후, 키리아는 신전 주변의 풀들을 채취해 관찰해보려 했다.

정말로 마기에 물들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낮에 하면 들킬 것 같아서 일부러 밤에 몰래 나왔는데.

“왜 갑자기 경비병이 많아진 거야?”

때마침 순찰 중이던 경비병에게 딱 걸려 채취한 풀들을 전부 압수당했다.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키리아는 간 떨어질 듯 놀랐다.

“허억! 누, 누구세요?”

스윽.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예요.]

따콩!

“아!”

열 받은 키리아는 나타난 루크의 정수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안 그래도 긴장 상태인데 또 놀래켜? 또 이러면 디져, 진짜.”

“죄, 죄송합니다….”

예상외로 매운 손길에 눈물이 찔끔한 루크는 제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다 얼른 표정을 고치고 준비했던 수첩의 글을 보여줬다.

[공작님이 위험해요.]

“무슨 말이야…?”

[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공작님의 비밀을 밝히려는 어떤 일이 거울 정원에서 벌어질 거예요.]

“…….”

[들키기 전에 공작님을 데려와야 해요.]

심상치 않은 내용을 읽은 키리아는 정색해서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가 간절함을 띠고 육성으로 말했다.

“저, 정말이에요. 미, 믿어주세요.”

하지만 키리아가 그를 쳐다본 이유는 그를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키리아는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를 알아온 거지? 고마워.”

공작이 숨기는 비밀이라, 직접 가지 못하고 자신에게 먼저 알리러 온 마음도 고마웠다.

[저도 함께 갈까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아니야.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돼. 거기까지 안내해줘. 지금.”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거울 정원으로 뛰어갔다.

중간에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있어, 루크가 그들을 맡았다.

그 사이 키리아는 루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계속 달려 거울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의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키리아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키리아는 제논을 찾기 위해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바스락하고 누군가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그리로 고개를 돌린 키리아가 속삭이듯 외쳤다.

“공작님!”

나무의 그림자 속에 제논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천장의 유리가 특별한 것인지, 유리를 통과한 달빛이 정원 곳곳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키리아는 제논이 마족으로 변한 것을 한눈에 알았고,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은 푸른달이 뜨지 않았는데 왜…?”

“아티팩트 때문입니다.”

제논이 눈짓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서신을 가리켰다.

이미 찢어져 있었다.

“저걸로 푸른달을 투영했더군요.”

“맙소사….”

기가 막혔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순 없었다.

“일단은 제 방으로 가요.”

“바깥에 사람이 있을 텐데요.”

“제가 왔을 땐 없었어요. 오기 전에 얼른 가야죠.”

키리아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제논의 머리 위에 씌웠다.

마족의 날개는 제논이 숨길 수 있지만, 뿔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 어서 가요.”

키리아가 제논과 함께 정원을 나서려 할 때였다.

“이쪽도 반드시 확인하라는 지시야.”

바깥에서 또 다른 경비병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

키리아는 순간 굳었다. 이 정원에는 두 사람이 몸을 숨길만 한 적당한 곳이 없었으니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키리아의 사고회로가 정지한 그 순간.

“실례하겠습니다, 키리아.”

제논이 키리아를 덮쳤다.

º º º

거울 정원으로 들어온 경비병들은 감탄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다워. 매일 순찰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여기 경비를 강화한 건지 모르겠네. 도둑이라도 들었나?”

경비병들이 정원을 한 바퀴 수색할 때였다.

“…아.”

정체 모를 여성의 목소리가 수풀 안쪽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경비병들은 서둘러 수풀을 헤치고 달려갔다.

그리고 침입자를 제압하기 위해 창을 들었는데….

“어, 엇.”

그들은 기세를 잃고 당황하고 말았다.

나무 둥치에 남녀 한 쌍이 엉겨붙어 있는 게 아닌가.

둘만의 밀회를 즐기기 위함인지, 여자가 외투로 두 사람의 얼굴 근처를 가리고 있었다.

남자는 몰두한 듯 경비병들이 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손으로 여자의 허벅지를 붙잡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더욱 파고들었다.

여자가 고개를 젖히자 외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키리아였다.

경비병들을 본 키리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화가 나 쏘아붙였다.

“지금 감히 공작님을 훔쳐보시는 건가요?!”

“헛,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 역시 그런 사이였구나!

동시에 생각하며 경비병들은 허둥지둥 뒤를 돌았다.

그 와중에도 임무는 잊지 않았다.

“이, 이곳에 계시면 곤란합니다. 경비병들이 순찰 중이니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저희가 정원 입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추스르고 나오십시오!”

경비병들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탁.

정원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키리아는 흐으, 힘 빠지는 소리를 내며 외투를 든 손을 내렸다.

외투가 벗겨지자, 키리아보다 빨개진 제논의 얼굴이 드러났다.

키리아의 허벅지를 붙잡은 제논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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