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41)

94화

신관들은 저들끼리 몸을 들썩거리며 수군거릴 뿐, 일정반경 이상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제논의 겉옷을 받아 벤치에 앉았다.

어제 고아원 아이들을 정신없이 돌봐주었더니 아직까지 피로가 남아 있었다.

키리아는 혼자 검술 훈련을 시작하는 제논을 지켜보며 하품을 했다.

“후암.”

그때, 키리아의 옆으로 그림자가 스윽 나타났다.

느껴지는 기척에 하품을 하느라 감았던 눈을 무심코 뜬 키리아는 흠칫 놀랐다.

“아, 깜짝이야.”

[죄송해요.]

루크였다.

키리아는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려다가 루크의 부어 있는 뺨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루크의 뺨에 손을 대보려다 아파할까 봐 그만뒀다.

“어, 이게 뭐야? 너 맞고 다니니?”

그러며 은근슬쩍 말을 다 놨다.

사실 루크는 연무장으로 오기 전, 롤스 추기경에게 불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때 루크는 추기경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분명히 마기가 든 과일을 일각수에게 먹였다고 말이다.

처음엔 믿지 않던 추기경은 루크가 끝까지 주장하자 점차 반신반의했다.

루크는 감히 자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고아원을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못 할 테니까.

‘약제사 때문에 일각수가 마기를 견딜 수 있게 된 건가? 제길. 역시 서둘러야….’

추기경은 혼자 중얼거리고 나서야 루크를 풀어줬다.

이러한 사정을 루크는 키리아에게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더 묻지 말아 달라는 뜻을 담아서.

“신경 쓰지 말라고?”

사정을 모르는 키리아는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일로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내가 준 화상약도 안 바르고 말이야.’

하긴 상처가 갑자기 나으면 추기경이 가만히 둘 리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황태자 대신 공작님의 심복이 되어줬으면 했기에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루크가 수첩이 아닌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를 꺼냈다.

그걸 가로로 들고 키리아에게 보이도록 표지를 넘겼다. 정성들여 쓴 글자가 보였다.

[약제사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일 죄송해요.]

또 한 장을 넘겼다.

[그런데도 제가 도움을 받다니, 그것도 죄송해요.]

그리고 또 한 장.

[이번엔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약속드립니다. 반드시 아가씨의 도움이 될 거라고요.]

마지막 한 장이었다.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오….”

키리아는 어색한 탄성을 흘렸다.

‘뭐야. 러브 액○얼리야?’

오랜만에 전생에서 봤던 명작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었다.

키리아가 ‘오’ 뒤에 아무 말도 잇지 않자 루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키리아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조금 놀라서 그래. 물론 받아야지. 응응. 고마워.”

그제야 루크가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방금 생각난 듯 수첩에 다른 문장을 썼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고아원 아이들이 야산에 드나든 건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그야 당연하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던 키리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키리아는 루크의 팔을 끌어당겨 옆에 앉히고는 물었다.

“신전이 출입을 금지한 그 야산 같은 곳이 얼마나 더 있는 거야? 여기, 내 생각보다 마기에 많이 오염된 곳인가?”

잠시 고민하던 루크가 슥슥 대답을 적었다.

[야산과 그 인근 쪽을 통제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다른 장소도 오염이 된 적 있긴 했지만, 신전에서 전부 정화했고요.]

“정화했다고?”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을 다루는 자들이 모여 있는 중앙신전이다.

웬만한 오염은 정화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정화를 못하고 출입을 금지한 장소가 있다는 건.

고위 신관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마기, 혹은 마물들이 그 야산에 있다는 걸까?

‘뭔가 냄새가 난단 말이지.’

하지만 지금 당장 더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생각을 잠시 접어둔 키리아는 가방을 열어 타박상 약을 꺼냈다.

약을 검지와 중지에 묻혀 루크의 부은 뺨에 살살 문질렀다.

“그냥 두면 꽤 오래 갈 거 같은데. 약 줄 테니까 이건 꼭 발라. 알겠지?”

“……!”

얼굴이 빨개진 루크가 벌떡 일어났다.

키리아가 내민 약도 받지 않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급히 멈추고는, 다시 키리아를 돌아봤다.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마저 도망치는 루크.

키리아는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아니 왜 챙겨줘도 못 가져가는 거야?”

“그, 그럼 저희는 어떻습니까?”

“엥?”

어느새 성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다가와 있었다.

루크가 키리아와 친밀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낸 이들이었다.

성기사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모아 말했다.

“부디 맑은 신성력을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알려주십시오!”

일제히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부탁하는 성기사들이었다.

“어어…. 아뇨, 전.”

키리아는 거절하려 했지만, 그때 가방에서 신목의 가지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걱정 말고 맡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에라, 해보지 뭐.’

키리아는 신목의 가지를 꺼내 들고 엣헴, 헛기침을 했다.

“그럼 한 번 알려줘 볼까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이 모습을 본 나머지 성기사들도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때 아닌 키리아의 신성력 발현 교실이 열렸다.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지!”

그에 신관들도 용기를 냈다.

“저어, 공작님. 이 주스 좀 드시고 하시죠.”

“아이구, 마침 저도 검술로 신의 말씀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습니다. 한 수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작님, 주치의님께선 무얼 좋아하시지요…?”

회원권을 따내기 위해, 신관들은 키리아의 상관인 제논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제논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점잖은 척 온갖 재롱을 떠는 신관들을 바라봤다.

방해되니 꺼지라고 할까, 고민했지만….

힐끔, 성기사들의 스타 강사가 되는 중인 키리아를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제논이 다시 검을 들며 중얼거렸다.

“망고 바나나 주스를 먹고 싶군.”

그 말에 신관들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제,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그들은 앞다퉈 달려갔다. 서둘러 수행 신관들을 불러 남부의 값비싼, 그것도 수확하려면 몇 개월이나 남은 여름 과일을 구해오라고 난리였다.

덕분에 방해꾼을 전부 치운 제논은 여유롭게 다시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정말로 망고 바나나 주스를 가져온 신관이 있다면….

평소 혼자 배를 채우고 아랫사람을 굉장히 닦달하는 인물일 터였다.

그 자는 회원으로 받지 말라고 키리아에게 일러둘 셈이었다.

º º º

롤스 추기경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며 제 방으로 들어왔다.

신관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달려가기에, 어디서 오는 것인가 보니 바로 란페르세 공작이 있는 연무장이었다.

심지어 공작의 약제사는 성기사들을 모아놓고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혈압이 올랐다.

의자에 주저앉은 추기경이 뒷목을 주무를 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추기경은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들어오시죠.”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를 확인한 그는 태도를 바꿔 물었다.

“준비는 끝났나?”

“예. 말씀하신 대로 거울 정원에 장치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작동할 겁니다.”

“좋아. 하지만 정작 사냥감이 나타나지 않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겠지?”

“걱정 마십시오.”

상대방이 확신에 차 말했다.

신관복을 입고 있지만, 그는 황실 정보부의 일원이었다.

황제가 추기경에게 특별히 빌려준 인재였다.

“공작의 사람으로 위장한다면 아무리 공작이라도 의심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공작의 사람은 이미 재워두었습니다.”

그는 신관으로 위장해 있던 한스를 습격해 재워둔 참이었다.

롤스 추기경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두 눈이 기대감으로 음흉하게 빛냈다.

“내 콧대를 눌렀다고 생각하겠지만… 좋아할 수 있을 때 실컷 좋아해 둬라, 공작. 비밀을 전부 파헤쳐 줄 테니까.”

결국 승리자는 내가 될 것이다.

추기경은 흐흐흐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밤이 찾아오는 걸 기다리기 힘들었다.

이러한 그들의 대화를 누군가가 엿듣고 있었다.

º º º

창밖을 바라보며 제논은 검은 손으로 생명석을 만지작거렸다.

숙소 건물이 다른 탓에 신전에 도착한 뒤부터는 밤마다 키리아의 마나 진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마물의 팔이 발작을 일으킬까 내심 걱정한 제논이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도 잠잠했다.

“그동안 매일 마나 진단을 해서 그런가.”

그래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발작이었기에 제논은 내일 낡이 밝으면 공작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미 대신녀와 추기경에게 말을 해 둔 상태였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남아 있지만….’

고아원 소녀가 말했던 야산.

마음 같아선 그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마물의 팔이 자극받을지도 모르고, 혹시 들킨다면 키리아가 기껏 높여 놓은 명예도 다시 실추될 것이다.

일단은 성으로 돌아가 기회를 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제논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슥―

문 밑으로 얇은 종이 한 장이 재빠르게 밀어넣어졌다.

문밖의 인기척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에 제논 혼자 있는 이 시간이 되면, 한스는 이런 방식으로 그날 획득한 정보를 보고했다.

제논은 한스가 보낸 간단한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보고서에는 한스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거울 정원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거울 정원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분명 대신녀가 머무르는 본관 근처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정원이 있었지.

“…….”

제논은 잠시 동안 한스의 보고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고서를 벽난로에 던져 태운 그는 망토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거울 정원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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