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드르륵!
타냐가 의자를 뒤로 끌며 벌떡 일어났다. 주먹 쥔 손이 투사처럼 굳건했다.
“온 도시에 공작님과 주치의 언니가 어떤 선행을 했는지 퍼뜨릴 거야. 신수까지 따를 정도의 분들이라고 말이야.”
가난했던 탓에 도시의 온 골목을 뒤지고 다녔던 뒷골목 베테랑 타냐였다.
사실 고아원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거리의 노숙자들하고도 잘 알았다.
그래서 소문을 퍼뜨리는 것 정도는 식은 수프 먹기였다.
[위험해. 신전에서 알면….]
“당연히 우리 고아원에서 있던 일이라고는 안 하지. 그리고 들켜도 괜찮아, 오빠.”
타냐가 영악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사 가려고 준비 중이었거든. 소문 퍼뜨리고 주치의 언니가 있는 곳으로 이사 갈 거야. 그러니까!”
타냐가 루크에게 으름장을 놨다.
“우리를 위한다면 오빠도 공작님하고 언니한테 점수 깎일 짓은 하지 마. 알겠지?”
“……!”
갑작스레 이사를 선언한 타냐의 충격 발언에 루크는 혼란에 빠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동의했다.
공작님과 약제사에게 큰 빚을 졌다는 것.
[나도 꼭 갚을 거야.]
루크가 쓴 글씨에는 또박또박 힘이 들어가 있었다.
º º º
오전부터 롤스 추기경은 어제와 같은 홀에 섰다.
대신녀를 비롯해 고위 신관과 성기사들도 함께였다.
“란페르세 공작님과 키리아 약제사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쯧쯧. 신수의 상태를 오늘 최종적으로 확인해보자고 말씀드렸는데 늦으시다니요.”
혀를 차면서도 추기경은 내심 당연하다 여겼다.
‘지금쯤 약제사의 몸 상태는 다 죽어갈 테니까 말이야. 후후.’
어제 추기경은 모두의 앞에서 굴욕을 당했다.
이 이상 약제사를 건드리는 건 오히려 제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그래서 추기경은 신수의 상태를 확인해봐야 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평소 자신의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는 자를 시켜, 약제사의 음식에 약을 넣도록 한 것이다.
병에 걸린 듯 앓다가 목숨을 잃는 독약이었다.
일이 잘못되지 않는 이상 따로 결과 보고를 받지는 않으니 이번에도 그가 잘 수행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일각수에도 조치를 했지.’
일각수의 먹이에 마기에 오염된 과일을 섞도록 했다.
어제 저녁에 루크에게 시켰으니 틀림없이 수행했을 것이다.
‘고아원만 언급해주면 다루기 쉬운 놈이니까.’
모든 일이 계획대로였다.
이제 건방진 독초 약제사는 제거될 것이고, 그녀 때문에 회복될 뻔했던 공작의 명예는 도로 추락하겠지.
후후후후.
롤스 추기경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눌렀다.
“란페르세 공작님과 그 주치의께서 입장하십니다.”
마침내 키리아와 제논이 등장했다.
롤스 추기경이 두 팔을 여유롭게 펼쳐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의 손님 대접에 모자람이 없었길 바랍니다. 간밤은 잘 보내셨는지요?”
“덕분에 평안했습니다.”
“저도 좋았어요.”
제논과 키리아의 기분 좋은 대답이었다.
제논은 어제 키리아를 자랑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키리아는 마기 해독 시럽도 판매할 생각에 들떠서 기분이 좋았다.
예상과 다른 두 사람의 안색에 추기경은 내심 당황했다.
‘어찌 된 일이지? 독약 효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가? 아니, 실패한 건가?’
그는 애써 침착했다. 이럴 줄 알고 두 번째 조치도 취해놓지 않았는가.
간단한 형식적인 말이 오간 뒤 추기경이 말했다.
“그럼 어제 키리아 약제사가 치료를 했던 일각수의 상태를 확인해 보도록 할까요.”
그가 눈짓하자, 다른 신관이 옆문을 열고 일각수를 데리고 들어왔다.
추기경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마기에 오염된 먹이를 먹였으니 분명 상태가 나빠졌겠지. 물이 빠져 젖소 같은 꼴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홀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것은 은빛의 고귀함을 지닌 흑마였다.
윤기가 흐르는 털은 어제와 같이 균형 잡힌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어제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
“허어. 일각수의 기분도 좋아 보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노에 차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신관들의 수군거림대로였다.
일각수는 마치 오늘부터 제 전성기라는 양 건강미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기꺼운 듯 앞발을 살짝 들고 포즈를 취하기까지 했다.
롤스 추기경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젠 아주 팔팔하네. 추기경님, 이 정도면 납득하시겠어요?”
키리아가 그렇게 묻자 굳어 있던 추기경 대신 일각수가 먼저 움직였다.
다각다각.
일각수가 키리아의 앞으로 다가와 정면으로 섰다.
풍채 놓은 흑마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뭐, 뭐야? 나한테 감자 먹이려고?”
“푸르릉!”
어제의 굴욕이 생각났는지 일각수는 큰 눈을 못마땅하게 끔뻑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키리아의 앞에 네 다리를 접고 앉는 게 아닌가.
일각수의 은빛 뿔이 키리아의 손에 조심스레 닿았다.
“……?!”
홀에 있는 신관과 성기사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일각수가 누군가의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는 건, 상대에게 복종하겠다는 의미였다.
뿔까지 바치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었다.
“야… 왜 이래?”
키리아는 당황해서 계속 속닥거렸다.
“푸르르.”
“뿔 잡으라고…?”
키리아는 일각수의 뿔 위에 엉거주춤 손을 얹었다.
그러자 금빛 신성력이 커다란 촛불처럼 사방으로 따스하게 번져갔다.
신성력에 닿은 모두의 마음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동시에 키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얘는 내 아래 서열이라고.
기분이 좋아진 키리아는 일각수의 갈기를 비벼대듯 쓰다듬었다.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구나?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제부턴 공작님한테 징그러운 애교 부리지 말고. 알았지?”
일각수가 저를 쓰다듬는 키리아의 손을 깨물었다.
“이게!”
“푸르릉!”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둘.
잠시 이마를 짚은 제논이 얼른 다가가 키리아를 만류하며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조차 신관과 성기사들에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간들 사이에 섞이려 들지 않던 고고한 일각수가 아닌가.
심지어 대신녀님에게도 언제부턴가 데면데면하게 굴었는데.
그런데 독초 약제사와 저렇게 사이좋은 모습이라니?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고위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어서 발표하라는 듯 롤스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키리아와 제논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추기경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모든 분들께서 보시다시피, 일각수는 건강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키리아 약제사를 인정하게 되었군요. 비록 순백이었던 일각수의 본질은 다소 흐려졌을지라도….”
끝까지 고집스런 한 마디를 덧붙이는 그였다.
“자격을 증명했으니 신전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대신녀님, 말씀해주시죠.”
말하며 추기경이 옆으로 한 발 물러났다.
대신녀의 목소리가 짙은 하얀 베일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현 시간부로 교단은 키리아 약제사를 향한 모든 오해의 발언을 철회합니다.”
“물론, 독초가 불행을 부른다는 말씀도 정정해주시는 거죠?”
키리아가 얼른 따져 물었다.
그에 대신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요.”
짝짝짝!
한 고위 신관이 먼저 박수를 쳤다.
그는 사실 키리아에게 몰래 선물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신관들은 순간 선수를 뺏겼다는 표정으로 얼른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러자 또 그 옆에 있던, 신성력 발현을 배우고 싶어하는 성기사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곧 홀이 열성적인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럴수록 대신녀는 깊이 침묵했고 추기경은 이를 악물었다.
º º º
키리아는 제논을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몸을 풀기 위해 제논이 연무장 하나를 통째로 빌린 것이다.
“신수의 인정을 받다니, 그대는 역시 대단하군요.”
“흐흥. 이 정도는 되어야 공작님의 주치의라고 할 만하죠.”
허리에 손을 짚고 콧대를 치켜드는 키리아의 모습에 제논이 조용히 웃었다.
키리아는 문득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보셨죠? 저를 인정했으면서 제가 맡은 공작님의 마물병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 한 거요.”
“내 마물병과, 그에 대한 신전의 입장은 제국의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그걸 철회하고 사과하려면 상당한 타격을 감수해야 하죠.”
제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교단의 신뢰도와 위신에 큰 손상이 갈 테니까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할 겁니다.”
“흠… 역시 제가 더 분발하는 수밖에 없네요.”
마물병이 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루쿠스 산에 메두사꽃이 한 송이라도 남아 있었음 좋았을 텐데요. 다른 서식지는 없나….”
“…백작이 계속 수색 중이라고 합니다. 소식을 기다려보죠.”
한 박자 늦게 나온 제논의 대답이었다.
그런 대화를 하며 두 사람은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보게 됐다.
“엥? 분명 연무장을 다 빌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공작님?”
“네. 분명 맞습니다만….”
연무장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신관과 성기사들을.
홀에서 적극적인 박수를 보냈던 이들은 두 사람이 나타나자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곧장 달려오지는 못했다.
대신 키리아와 제논이 가는 길을 양옆으로 비켜주며 열성적이고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다가가고 싶은데 먼저 했던 짓이 있어 염치없이 그럴 수는 없고, 크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체통 없는 성직자로 보이면 어쩌지 걱정스럽고….
다가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마음이 그들의 몸을 들썩거리게 했다.
대신 열띤 귓속말을 수군수군 쉴 새 없이 주고받는 하얀 옷의 신관들.
일렬로 선 그들을 지나치며 키리아는 어이없어했다.
‘전깃줄에 모여 앉은 뱁새들이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