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41)

92화

일각수는 벽난로가 있는 거실의 중앙에 다리를 접고 앉아 있었다.

오렌지빛 불빛이 검은 털과 은빛 갈기를 아른아른 비추면서 신수의 자애로운 분위기를 돋보이게 했다.

일각수의 주변으로는 아이들이 누워있었다.

거무죽죽한 혈색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아이들이.

“토, 토미! 레나! 아, 알렉스까지!”

기겁한 루크가 아이들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의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아이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숨쉬기를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키리아가 한쪽에 서서 겁먹은 얼굴을 한 타냐에게 물었다.

타냐가 울먹이며 제 손끝을 이로 잘근거렸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며칠 전부터 어지럽다고 하던 애들이 있긴 있었는데….”

[그걸 알고도 내버려 둔 거야?]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래서 평소보다 식사도 많이 준비했단 말이야. 희석 성수도 더 많이 쓰고!”

루크와 타냐는 서로 속상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키리아는 둘을 만류하며 타냐에게 물었다.

“음식에 쓴 식재료 좀 봐도 될까?”

“네에….”

주방에는 아이들이 저녁으로 먹은 스튜 냄비와 말라붙은 빵 조각이 있었다.

그마저도 싹싹 긁어먹어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음식을 살펴본 제논이 말했다.

“…성수를 너무 묽게 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키리아. 이 음식들은 정화되어 있어요.”

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한 채소들도 마찬가지예요. 마기는 제거되어 있네요. 성수를 써서 굉장히 푸석푸석하지만.”

“그렇죠? 음식엔 문제가 없어요. 제가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요. 원인을 모르는 병이라니, 이건 신수님만 해결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타냐의 간절한 말이었다.

하지만 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신수가 계속 이곳에서 같이 살 수는 없잖아. 신수가 떠난 후에는 어떡하려고?”

“그, 그치만… 그럼 어떡해야….”

줄곧 진지하던 키리아가 타냐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걱정 마. 애들이 아픈 원인을 알 것 같으니까.”

º º º

누워있는 아이들과 그 주변을 살핀 키리아는 곧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그때쯤 제논도 같은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역시 원인은 이것이었군요.”

“맞아요. 이것밖에 없어요. 타냐, 루크 경. 내 말대로 해줄래요?”

루크와 타냐는 키리아의 지시를 따랐다.

일을 마친 타냐가 물었다.

“이게 원인이라고요?”

앞에는 마른 장작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비축해 두었던 것, 그리고 벽난로에서 타고 있던 것까지 전부 빼낸 것이었다.

지금 벽난로 대신 아이들에게 온기를 전하고 있는 건 일각수였다.

“저어, 죄송한데 어째서 이걸 원인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냥 평범한 나무잖아요.”

“이걸 어디서 가져왔어?”

“음, 그게 사실….”

눈치를 보던 타냐는 곧 체념하고 털어놓았다.

“…신전에서 출입을 금한 야산이 있어요. 거기서 몰래 나무를 했어요.”

힐끔, 키리아와 제논의 눈치를 살핀 타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장작을 살 돈이 부족해서….”

“…….”

그 말에 루크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타냐를 보았다.

에휴. 그럼 그렇지.

키리아는 생각했다.

유통되는 장작에 문제가 있었다면 도시나 신전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증상을 보였을 텐데 멀쩡했으니까.

“신전 편을 들고 싶진 않지만, 그곳의 출입을 금한 건 이유가 있어.”

키리아는 마른 장작 한 개를 집었다.

“이건 마기에 오염된 나무거든.”

“그,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여기 나무껍질 사이를 잘 봐. 곰팡이 같은 검은 얼룩이 있지?”

키리아가 보여준, 벌어진 나무껍질 사이를 자세히 보던 타냐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전 정말 멀쩡한 줄 알고….”

“잘 보면 속도 얼룩덜룩해. 정상적인 목재랑 비교해보면 알 거야. 이걸로 불을 땠으니 아이들이 마기를 들이마셨겠지.”

“…….”

“그게 몸에 쌓이면서 결국 중독을 일으킨 것 같아.”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타냐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힘들게 말했다.

“저… 겨울 내내 저 장작으로 불을 땠어요.”

“…….”

루크가 타냐의 어깨를 위로하듯 짚었다.

타냐는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전 벌을 받을 거예요! 엄청난 죄를 저질러 버렸으니까요!”

“글쎄, 저 신수의 생각은 너랑 다른 것 같은데?”

“에…?”

어느새 일각수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타냐가 아니라 키리아를 보고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던 것 같아. 지금도 봐. 눈빛으로 나한테 말하고 있잖아.”

“시, 신수님이 언니한테 말을 걸고 있다고요? 뭐라고 하시는데요?”

키리아가 히죽 웃었다.

“신수가 말하기를….”

일각수가 신탁을 내렸던 신성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위대하신 키리아 님, 무능한 말대가리인 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이 엄청난 문제를 제가 존경하는 키리아 님이 대신 해결해주세요. 제바아아알!”

“……?!”

“푸르릉?!”

타냐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일각수가 벌떡 일어났다.

키리아가 일각수를 쳐다보며 케케케 웃었다.

“내 말이 틀렸어?”

“푸르르릇….”

일각수는 이를 악물었다. 매우 분해하는 기색으로 도로 주저앉아 씩씩댔다.

키리아는 의기양양해졌다.

“까불고 있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논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둘 사이가 해결되어 다행이군.”

‘이런 것도 해결로 치시는 건가…?’

옆에 있던 루크가 제논을 이해할 수 없단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 그럼.”

키리아가 두 팔을 걷어붙였다.

“원인도 파악했으니 재빨리 치료하자구.”

일각수를 치료했을 때처럼 생명석은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키리아는 우선 마기 해독수를 아이들이 복용할 수 있도록 순하게 개량했다.

거기에 약효가 빨리 발휘되도록 생명석 조각을 섞었다.

그러자 해독수가 시럽처럼 됐다.

이른바 마기 해독 시럽이다.

키리아는 스푼에 시럽을 떠서 아이들에게 먹였다.

“자. 천천히 마셔봐.”

“으으….”

아이들이 마기를 토해내고 나면 일각수가 제 뿔로 아이들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기진맥진한 아이들의 기운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일각수와 함께 아픈 아이들을 돌봐주는 키리아.

그 모습은 정신을 차린 아이들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세상에… 저분은 대체… 저런 신관님도 계셨어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은 타냐의 홀린 듯한 말이었다.

“신관이 아니다.”

“네? 그럼…?”

“그녀는 주치의다. 내 주치의.”

‘내 주치의’라는 말에 묘하게 힘을 주어 말하는 제논이었다.

그에 제논의 정체가 궁금해진 타냐가 제논의 복장을 새삼스레 살펴봤다.

그러다 발견했다.

망토 안으로 얼핏 드러난 그의 검은 마물의 팔을.

“……!”

이 사람이 소문의 그 마물 공작!

그렇담 저 언니가 분명 불행을 부르는 독초 약제사!

순간 겁에 질렸던 타냐는 하나 둘씩 기운을 차리는 아이들 덕분에 마음이 금세 차분해졌다.

그러고 보니 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뿐만 아니라 마물 공작과 그 주치의가 우리들을 이렇게 도와주고 있는 걸.

‘신성하다는 높은 분들조차 우릴 도와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원장님이 돌아가신 후 고아원은 운영자가 없는 시설이 됐다.

그러다 보니 신전의 얼마 안 되는 지원도 끊겼다. 루크가 보내주는 돈이 전부였다.

그래서 타냐도 아직 성년이 안 됐지만 일찍 독립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을 거라고 일찍이 체념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

타냐는 손등으로 제 눈가를 연신 문질렀다. 제논은 모른 척했다.

이윽고 타냐가 밝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손님들께 아무 대접도 안 하고 있었네요! 혹시 배고프시진 않으세요? 제가 금방 스튜를 만들게요.”

제논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타냐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마지막 식재료까지 전부 털어서라도 좋은 음식을 대접해 드려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희석 성수를 뿌리고….”

그런데 그때였다.

어느새 따라온 제논이 다른 약병을 내밀었다.

“성수 대신 이걸 써라.”

“네? 이게 뭐예요?”

그러자 제논의 입술이 자랑스러움을 품은 채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식재료를 정화하는 마기 해독수. 내 주치의의 대표작이지. 아이들에게 먹이고 있는 것과는 다르니 이건 직접 복용하지 마.”

“아, 네.”

제논의 미소에 타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마기 해독수를 사용해 만든 음식을 맛보고 깜짝 놀랐다.

“맛있어!”

꼭 흑백이었던 음식이 다채로운 제 빛깔을 되찾은 듯했다.

타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제논을 쳐다봤다.

“그걸 사용하면 음식을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겠지. 루크를 통해 고아원에 전달해주겠다.”

“어, 엇.”

갑작스레 지목받은 루크는 곧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서 알면 아주 안 좋아하겠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중요치 않았다.

수첩에 감사의 인사를 적던 루크는 생각을 바꿨다.

수첩을 집어넣고, 제논을 향해 고개를 숙여 직접 말했다.

“가, 가, 감사합니다.”

“인사는 내 주치의에게 해.”

“무, 물론 그럴 거예요.”

루크를 빤히 내려다보던 제논이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

“넌 목소리가 좋군.”

“어, 엇….”

바로 요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놀란 루크는 저도 모르게 키리아가 있는 거실 쪽과 제논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곁에 있으면 닮는 건가?’

생각하며.

º º º

“우리가 신수랑 여기 왔었던 건 비밀이야. 신전에서 너흴 귀찮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남기고 키리아와 제논은 신수와 함께 고아원을 떠났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전과 달리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벽난로에는 오염되지 않은 장작이 타고 있었다.

루크가 제논의 지시로 사 온 것이었다.

식탁 위에는 장작을 사고 남은 제논의 돈주머니가 있었다.

상당히 묵직해서 몇 개월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짜는 아니야.」

제논이 돈을 건네자 옆에서 키리아가 말했었다.

「건강해져서 억울하거나 부당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 아주 조금이라도. 그게 너희들이 갚아야 할 빚이야.」

루크와 타냐는 돈주머니를 가운데에 두고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각자 키리아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다 타냐가 굳은 결의로 말했다.

“이건 이상해, 오빠.”

“……?”

“이렇게 좋은 분들을 왜 신전에서는 불길하다고, 위험하다고 하는 거야?”

“…….”

“나 결심했어. 주치의 언니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당장 말이야.”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누구를 도울 건데?]

“오빠도 참. 억울하고 부당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바로 공작님하고 주치의 언니잖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