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제논은 사라진 알렌스를 생각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뭐 하러 왔던 거지?’
제논은 그를 경계대상으로 정했다.
알렌스의 호의는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 목적을 잘 모르겠다.
“어라?”
약을 갖고 돌아온 키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하는요?”
“먼저 돌아갔습니다.”
“에엥. 그럼 나 괜히 갔다 온 거잖아요. 쓸데없는 운동을 시키다니.”
키리아는 황태자에 대한 호감도가 깎였다.
“히히힝!”
줄곧 소외되어 있던 일각수가 신경질적으로 울어댔다.
그에 제논이 불청객 때문에 못했던 말을 꺼냈다.
“저녁에 만나죠, 키리아.”
“저녁에요?”
제논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각수를 쳐다봤다.
“이 녀석이 앞으로도 건강하려면 불만을 해결해줘야 하니까요.”
º º º
제논과 약속 시간을 정한 키리아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까는 얼른 약을 가져가려고 서두른 탓에 그냥 넘겼는데….’
방의 가구들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책상 아래에 처음 보는 상자가 있었다.
침대에 평평하게 정돈되어 있던 이불은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 살짝 볼록했고,
닫혀 있었던 옷장까지 가느다란 틈새를 두고 열려 있었다.
꼭 누군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
키리아는 옆에 있던 꽃병을 몽둥이처럼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옷장의 측면으로 접근해, 문짝을 벌컥 열었다.
동시에 꽃병을 내려쳤다.
“이얍! 꺄아악!”
하지만 오히려 덮쳐진 건 키리아였다.
옷장을 열자마자 쏟아진 크고 작은 선물상자들에 말이다.
와르르르.
둑이 터진 듯 쏟아진 선물들이 키리아를 깔아뭉갰다.
키리아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이게 다 뭐야? 왜 내 방에 이런 게? 잠깐. 그럼 설마 저것도?”
이불을 확 걷었다.
짠, 하고 나타난 최고급 과일 바구니.
이번엔 책상 밑 상자를 확 열었다.
또 짠, 하고 나타난 최고급 드레스와 장신구.
“……?”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띤 키리아는 선물 포장지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그 VIP…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당신 같은 분을 기다려왔다오. 절 회원으로 받아주실 그런 분….]
“아하.”
선물들의 정체를 알게 된 키리아는 킥킥 웃었다.
“한스 씨가 일을 잘해준 모양이네.”
생명석을 어떻게 판매할 것인지에 대해 한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회원제 얘기도 그때 나온 것이다.
생명석을 마정석처럼 원석 그대로 판매하면 황제가 분명 태클을 걸어올 것이다.
지금 그쪽과 신경전을 벌이는 건 괜한 에너지 낭비라고 키리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보류일 뿐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회원제를 생각해 낸 것이다.
본격적인 일반 판매에 앞서, 우선 판매 형식으로 엄선한 회원들에게만 판매하는 것.
처음에는 다른 세력의 방해 없이 시장의 반응을 보려고 했을 뿐인데….
“설마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이야.”
그렇다면 신관들 중에서도 신수와 비슷한 곤란을 겪는 이들이 있다고 봐야겠지. 어쩌면 성기사도.
생명석도 홍보하고 신관들의 약점까지 알아냈다.
추기경은 이걸 알려나 몰라.
“흐흥.”
기분이 좋아진 키리아는 메모지에 글을 써서 방문 앞에 붙여놨다.
[분실물 찾아가세요. 안 찾아가면 전부 소각함.]
선물은 전부 반려할 셈이다.
“한 번에 받아주면 재미없잖아?”
이들은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다. 어디 속 좀 태워봐라, 케케케….
내 1호 팬 개무시한 벌이다!
사악하게 웃은 키리아는 낮잠이나 자기로 했다.
그리고 제논과의 약속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섰다.
º º º
키리아는 제논과 함께 신전 밖으로 나왔다.
중간에 신전의 경비병들이 수상하게 여겨 제지했지만, 잠시 산책을 다녀올 거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보내주었다.
아마 일각수까지 데리고 나왔으면 더 강하게 제지했을 테지만….
“역시 신수는 영특하군요.”
일각수는 혼자서 빠져나와 약속 장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햇빛보다 저녁의 달빛이 기꺼운지 고개를 쳐들고 달빛을 듬뿍 받고 있었다.
그러다 제논의 칭찬에 일각수가 히힝,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칭찬해달라는 듯 머리를 제논의 손에 비벼댔다.
키리아가 녀석을 흘겨봤다.
“영특하고 사특해요 아주 그냥.”
“푸르릉.”
“왜. 뭐. 앞니도 못생긴 게.”
찰싹.
일각수의 신성한 은빛 꼬리가 키리아의 뺨을 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되게 기분이 나빴다.
“…요게!”
열받은 키리아는 일각수의 꼬리털 몇 가닥을 확 뽑아버렸다.
따끔한 강제 제모에 일각수가 펄쩍 뛰었다.
“히히힝!?”
“또 까불래!?”
“푸르릉!”
“잠깐 진정하십시오, 키리아. 잠깐, 둘 다….”
“말리지 말아 봐요, 공작님!”
키리아와 일각수가 서로 감자를 먹이며 투닥거리고, 제논이 두 여자(?) 사이에 끼어 고생할 때였다.
쐐액!
번득이는 검광이 제논에게 쇄도했다.
“……!”
날카로운 기류를 감지한 제논이 망토에 가려져 있는 검은 팔을 휘둘렀다.
챙!
마물의 손톱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키리아는 화들짝 놀라 그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한 루크를 발견했다.
“아무개 경…!? 이 아니라 루크?”
루크는 긴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제논을 습격한 루크의 공격에는 투기가 없었다.
그저 신전의 허가도 없이 일각수를 외부로 끌고 나온 것을 추궁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루크는 제논에게 뜻을 전하듯 일각수 쪽으로 계속 시선을 던졌다.
“…….”
하지만 제논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키리아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 ……!”
루크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수첩을 꺼내 열심히 글자를 적었다.
그 와중에 잘못 썼는지 멈칫하더니, 페이지를 넘겨 새로 썼다.
‘나라면 그냥 직직 긋고 계속 쓸 텐데. 성실하네.’
키리아의 평가였다.
척. 루크가 수첩을 내밀었다.
[신수를 왜 데리고 나온 거죠? 대답에 따라 강경하게 대응하겠습니다.]
“오랜만이군, 루크.”
마침내 제논이 대답했다.
하지만 기대하던 해명이 아니라 인사가 나오자 루크는 당황했다.
한때 기사 단장으로 모시던 분이 견습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고마워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 그는 신전의 경계 대상이니까.
“…….”
루크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제논이 말을 이었다.
“신수를 왜 데리고 나온 건지 말해줘야겠지.”
그러며 검을 뽑는 제논.
신전 밖으로 나올 때 잠시 돌려받은 것이었다.
“……!”
갑자기 제논이 검을 들자 루크도 긴장해 검을 고쳐쥐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제논의 검이 가볍게 휘둘러지면서 일각수의 고삐가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랐던 일각수는 자신을 답답하게 하던 고삐가 사라지자 개운한 모양인지 신이 난 모습이었다.
“히힝, 히히힝!”
멍해진 루크에게 키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일각수가 아픈 뒤로 밖으로 나온 적이 없죠? 고삐까지 답답해할 정도로 밖으로 나오고 싶어했거든요. 물론, 공작님이 알아챈 거지만.”
“나 역시 마음껏 밖으로 나가지 못해 힘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논이 동질감이 담긴 시선으로 일각수를 바라봤다.
“마음껏 뛰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제논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일각수와 그걸 지켜보는 키리아의 아니꼬운 시선.
그런데 그때였다.
“푸르르.”
신이 나서 고개를 턴 일각수가 제논과 키리아의 주변을 한두 바퀴 가볍게 돌더니….
다그닥 다그닥!
시내로 맹렬히 달려가는 게 아닌가.
“어엇!”
“……!”
키리아와 제논은 갑작스러운 일각수의 행동에 놀랐다.
키리아가 먼저 뒤쫓아갔다.
“야! 이 말대가리 진짜!”
“그대 체력으론 무립니다.”
제논이 키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루크를 돌아봤다.
“내가 추적하고 있을 테니 넌 말을 끌고 와라. 서둘러.”
“……!”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루크는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키리아 일행은 루크가 데려온 말을 타고 일각수를 쫓아갔다.
제논의 앞에 탄 키리아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목적지가 있는 것 같은데.”
“일각수는 마족의 기운도 감지하는 신수죠. 무언가 신경 쓰이는 또 다른 것을 감지한 것 같습니다.”
“신경 쓰이는 것…? 설마 잘생긴 수말은 아니겠죠?”
“…….”
키리아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제논도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할 말이 없었다.
º º º
“여기서 흔적이 멈췄습니다.”
기감을 펼쳐 일각수를 추격하던 제논이 말을 멈췄다.
제논에게 들려 말에서 내려 온 키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봤다.
“으, 뭐야 이 폐가는?”
[제가 있던 고아원이에요.]
대답한 루크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주 앤틱한 건물이야. 역사가 느껴져.”
마음 여려 보이는 소년을 위해 얼른 말을 바꾸는 키리아였다.
“들어가 보죠.”
제논이 앞장서 고아원의 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몇 박자 늦게 들려왔다.
“누구세요?”
“이곳에 온 신전의 일각수를 데리러 왔습니다.”
“아….”
달칵, 낡은 나무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타난 사람은 매우 지쳐 보이는 한 소녀였다.
“신전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오늘 하룻밤만 신수님이 여기 계시도록 하면 안 될까요? 제발요.”
“……?”
키리아와 제논이 의아해할 때.
소녀가 두 사람의 옆에 있는 루크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앗, 오빠?”
“오빠?”
키리아는 루크를 쳐다봤다.
루크가 수첩에 글을 썼다.
[이곳에서 자란 모두가 형제자매예요. 지금도 제가 돌보고 있고요.]
“그랬구나.”
일각수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루크의 고아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애는 일각수가 머물러주길 부탁하는 걸까?
자신을 타냐라 소개한 소녀의 안내에 따라 키리아는 고아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 타냐가 그렇게 부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