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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141)

90화

뜻밖의 상황에 키리아는 그만 굳어버렸다.

은은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신목과 신수의 은인이 신의 대리인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제국의 은인이 되리라.>

뿔의 빛이 사그라들면서 신탁도 끝났다.

“푸르르.”

고개를 턴 일각수는 어떠냐는 듯 고개를 위풍당당하고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롤스 추기경은 물론 신관과 성기사들까지 신탁에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신탁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신의 대리인이라 하면….’

‘저 사람이 제국의 은인이 될 거라고?’

다들 할 말을 잃고 정적을 지켰다.

겨우 정신을 차린 추기경이 말했다.

“…신수가… 크흠! 돌아왔다고… 봐도 될 것 같군요.”

“봐도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

키리아가 흐흥,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었다.

“이제 인정하시고 사과하세요. 공작님에 대한 입장도 철회하시고요.”

추기경은 발끈했다.

“…아직은 경과를 지켜봐야겠지요! 내일까지 한번 두고 봅시다.”

그렇게 말하는 추기경의 끈덕진 눈빛이 키리아에게서 제논으로 옮겨갔다.

º º º

신목의 은인을 시험하는 자리에 있던 고위 신관들은 홀을 나와 삼삼오오 흩어졌다.

말없이 회랑을 걷던 한 무리가 인적이 드문 구석에서 걸음을 멈췄다.

“신수가 설마 치료될 줄이야.”

“그러게 말일세. 너무 갑작스럽게 오염이 됐을 땐 깜짝 놀랐는데.”

“누가 아니랬나. 하룻밤 사이에 마기를 뒤집어쓴 것처럼 흉하게 변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웅얼거리던 신관들은 잠시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마침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런데 혹시… 자네도 아까 봤나?”

“설마 그 초록색 수정 같은 것 말인가?”

“그래그래. 바로 그거 말일세.”

나만 눈여겨본 거 아니지? 고위 신관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무리 신성력으로 치유하려 해도 일각수가 신성력을 튕겨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지경까지 갔던 것이고.”

“그랬지.”

“그 약제사가 신목의 가지를 썼을 때도 그랬어. 그런데 초록색 수정을 함께 사용하니까….”

“신성력이 흡수가 됐지.”

“마기에 오염이 되면 신성력이 잘 안 듣지 않나? 그런데 만약 그 수정이 있다면….”

“…….”

서로 눈치를 보는 고위 신관들.

후. 깊은 한숨을 내쉰 한 신관이 자신의 넓은 소맷자락을 걷어 팔목 안쪽을 드러냈다.

그의 팔목에는 마기에 오염된 흔적인 검은 얼룩이 있었다.

“…그 수정이 있다면 나도 마기를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내 생각도 마찬가질세.”

이어 다른 고위 신관들도 각자 숨기고 있던 얼룩을 슬쩍 내보였다.

마기는 초목뿐만 아니라 신성력이 강한 이들도 오염시키고는 했다.

남들보다 강한 신성력을 지닌 고위 신관들일수록 오염되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하지만 결코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대신녀가 마기에 오염된 란페르세 공작을 ‘타락’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고위 신관들은 아주 작은 얼룩도 감춰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타락했다고 몰려 파문당할 테니까.

고민만 깊어가던 와중, 오늘 키리아라는 약제사가 선보인 녹색 수정을 알게 된 것이다.

“얘길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그건 신목이 약제사와 공작에게 내어 준 생명석이라고 말일세.”

“생명석이라. 신목이 내어준 거라면 효과가 확실하겠군그래.”

“그렇지. 북부의 특산물이 될 거야.”

“그럼 그냥 구매하면 되겠군?”

“허나 문제가 있네.”

“무슨 문제?”

정보를 알려주던 신관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른 신관들도 따라서 몸을 숙였다.

“생명석은 아직 시판 계획이 없어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판매한다고 들었네.”

“특별한 사람들?”

“바로….”

제논의 지시로 신관으로 변장해 있던 한스가 속삭였다.

“회원으로 승인된 VIP에게만 우선 판매한다고 말일세.”

그리고 이 회원제 소문은 키리아의 지시였다.

º º º

“히히히힝!”

“으꺄악!”

덮칠 듯이 앞발을 치켜든 일각수 때문에 키리아는 안장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제논이 붙잡아준 덕에 다치지는 않았다.

바로 선 키리아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일각수에게 주먹으로 감자를 먹였다.

“이 은혜도 모르는 짐승! 좀 태워주면 닳냐?”

“히히힝!”

닳는다, 어쩔래! 라고 대꾸하는 듯한 반항적인 일각수의 눈빛!

키리아는 이를 으득으득 갈며 일각수를 노려봤다.

일각수도 언제 고분고분했냐는 듯 키리아를 노려봤다.

녀석은 온몸으로 반항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무도 날 건드릴 순 없으셈!’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키리아는 억울하게 외쳤다.

“야! 정말 너무하네. 까칠할 거면 공평하게 까칠하든지, 왜 공작님한테는 얌전한데?”

“히힝.”

그 말대로였다.

제논이 일각수의 고삐를 잡고 뺨을 어루만져주자 일각수는 아주 순한 양이 되었다.

심지어 제논의 손에 얼굴을 다정스레 비벼댔다.

녀석을 살펴보던 제논은 방금 발견한 사실을 툭 던졌다.

“암컷이군요.”

“헐. 설마 그래서…?”

“프히힝.”

그러자 보란 듯이 긴 속눈썹을 애교 있게 깜박거리는 일각수.

키리아는 조금 전과는 색다른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너 신수 아니지? 아주 불경해 너.”

“푸르르 힝힝.”

새침 떨던 일각수는 이내 제논의 손길에서도 벗어났다.

그러고는 연신 몸을 크게 들어올릴 듯이 앞발을 들썩여댔다.

고삐를 잡으려는 제논의 손길도 피하고 불만스럽게 뒷발로 마구간의 벽을 퍽퍽 쳐대기까지.

키리아는 움찔 물러났다.

“왜 저래요? 말도 광견병 걸리나? 야,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음….”

지켜보던 제논이 말했다.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엥? 저 꼴을 보고 바로 안다고요?”

제논이 피식 웃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요.”

“네에? 말도 안 돼. 진짜예요? 뭔데요?”

“그건….”

제논이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이런 곳에서 보는군요.”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습 신관복을 입은 알렌스였다.

알렌스가 제논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반갑군요, 공작. 그때 이후로 오랜만입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논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그와 짧은 악수를 나눴다.

알렌스가 말하는 그때란 인마전쟁이었다.

키리아는 머쓱해졌다.

‘아. 날 기억하고 있어서 눈웃음 보낸 게 아니었구나?’

공작의 주치의라니까 관심을 보였던 모양이다.

알렌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자 키리아는 얼른 예를 갖췄다.

“제국의 별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 그렇게 번거로운 예는 그만두세요. 궁 밖에서는 나도 좀 쉬고 싶군요.”

그러며 알렌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견습 신관복을 툭툭 두드렸다.

의외로 털털한 그의 모습에 키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나 예법 자신 없었는데.’

그러나 키리아의 미소는 이내 어색해졌다.

알렌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순간적으로 키리아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주 찰나였다.

내가 너무 긴장했나?

다행히 제논이 끼어들었다.

“전하께서 혼자 다니시면 걱정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빨리 꺼지라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알렌스는 오히려 유쾌하단 듯이 웃었다.

“아, 전부터 꼭 한번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 나도 모르게 결례를 범했군요. 내가 몸이 조금 약하다 보니….”

알렌스의 눈웃음이 키리아를 향했다.

“실력이 뛰어난 약제사를 보면 관심이 가서요. 쿨럭.”

주륵.

웃고 있는 입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왔다.

키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약제사가 아픈 황태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전하, 실례합니다.”

얼른 알렌스의 손목을 잡고 마나 진단을 했다.

제논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전하. 전하의 상태는 조금 약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완전 약골인데요.

“하하하…. 이 정도는 일상이라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다들 옆으로 서 있습니까?”

“전하께서 옆으로 쓰러지신 거예요!”

키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작에서 불치병에 걸렸다더니, 이건 원작보다 심한 거 같은데?

알렌스의 잔기침이 계속 이어지자 키리아는 고민스럽게 다시 허락을 구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더 자세한 마나 진단을 위해서 손을….”

“개의치 말고 마음껏 하세요.”

“…네. 그럼.”

키리아는 알렌스와 깍지를 꼈다.

제논의 입술이 일자로 딱딱하게 굳었다.

본인도 모르게 붉은 눈이 선득해졌다.

그때 알렌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제논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보내는 게 아닌가.

꼭 약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제논은 키리아가 종종 중얼거리는 ‘빡친다’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제논이 키리아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자연히 키리아와 황태자의 깍지가 풀렸다.

“키리아. 전하의 용태는 전담 주치의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논이 단호히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건강을 살피는 일은 시간을 들여 신중해야 하니까요. 감히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일입니다.”

감히 남의 주치의 손 빌리지 말고 자기 주치의한테나 가라는 말이었다.

알렌스는 유감스럽다는 듯 콜록콜록 소리 내어 기침했다.

“맞는 말입니다, 공작. 그런데… 하아. 이 기침만이라도 진정시킬 순 없을까요?”

그러며 키리아를 봤다.

움찔한 키리아는 눈을 굴리다 대답했다.

“기침에 듣는 약은 방에 있어요…. 음,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고맙군요.”

키리아가 자리를 비우자, 알렌스는 기침을 멈추고 옷을 털며 일어났다.

“공작이 무척 아끼는 인재인가 보군요. 하긴, 나라도 그러겠어요.”

“…….”

“신수를 그런 식으로 치료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하지만 공작의 마물병은 신수보다 한층 복잡한 것이겠죠? 그러니 아직도 회복 중인 거겠고….”

알렌스가 제논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잘 대해주셔야겠군요. 만약 저 사람이 다른 이의 주치의라도 된다면 공작의 병은 영영 낫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쓸모없는 말씀입니다.”

“…예?”

제논이 도전자를 내리누르듯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녀가 내 옆을 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안심이군요. 난 공작이 건강하길 바라니 말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신하진 마세요.”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를 욕심내는 사람은 공작 혼자만이 아닐 테니까요.”

º º º

말이 없는 공작을 뒤로 하고 알렌스는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걷던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었다.

그리고 저만치 지나가는 신관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컥!”

여성 손님용 숙소로 향하던 신관은 갑자기 날아온 돌에 맞고 절명했다.

오러가 실린 돌이었으니까.

추기경의 명령으로 키리아를 노리던 이였다.

“그녀를 건드리면 안 되죠.”

알렌스는 시체를 무심히 지나쳤다.

그의 얼굴엔 조금 전과 달리 서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공작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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