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41)

89화

롤스 추기경은 두 손으로 신목의 가지를 받쳐 들었다. 모두가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신목의 가지에서 환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오…!”

“정말 신목의 가지인가…?!”

그 순도 높은 신성력에 모두가 감탄했다.

엄숙히 늘어져 있던 롤스 추기경의 입꼬리가 슥 위로 들렸다.

정보에 따르면, 어차피 이 신목의 가지로는 신수를 정화할 수 없다.

다만 추기경은 신성력을 발현하는 경외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자, 이제 이 가지를 신수에게….”

그런데 이게 웬걸.

팟!

신목의 가지가 내뿜던 신성력이 꼭 누가 촛불을 끈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진 게 아닌가.

“응?”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롤스 추기경도 당황해 다시 한 번 신목의 가지를 위로 올렸다.

신목의 가지는 반딧불이처럼 깜박깜박 빛을 내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추기경에게 집중되었다.

신목의 가지가 문제인지 아니면 추기경이 문제인지 조심스레 의심하는 시선들.

추기경은 애써 침착하게 자신의 신성력을 가지에 넣어보기도 하고 가지를 만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추기경은 사람들의 의심에 대답하듯 소리쳤다.

“역시 이건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그가 가지를 한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추기경인 내 신성력에도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키리아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주신의 나무인 신목은 예부터 신성력을 지닌 자에게 응답해준다는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신목님께도 우선순위라는 게 있을 수 있잖아요.”

꽃님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

“뭐…?”

키리아는 저벅저벅 걸어가 추기경에게서 자연스럽게 신목의 가지를 가져갔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조금 전 추기경이 그랬던 것처럼 두 손에 받쳐 들었다.

‘대충 말하는 것보다 뭔가 있어 보이게 말해야 멋져 보이겠지?’

중앙신전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니까 말이다.

‘엇, 근데 뭐라고 하지? 나 멋있게 말하는 거 진짜 못하는데.’

키리아는 살짝 당황해서 일단 떠오르는 대로 엄숙하게 말했다.

“가지에 깃든 신목의 정령이시여. 제가… 제가 은인이 맞다면 고마우신 만큼 빛나주세요!”

번쩍―!

홀은 온통 새하얀 곳이어서 모여 있는 사람들은 밝은 빛에 이미 적응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눈이 아플 만큼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한순간이 아니었다.

태양만큼 강렬한 빛이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강해졌다!

“으아악! 주신이시여!”

“내 눈!”

신기한 건 이러는 와중에도 키리아와 제논만은 눈부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감탄한 키리아는 눈을 감싸고 몸을 비트는 사람들을 잠시 구경했다.

“제, 제발 그만!”

“주신이시여, 죄송합니다!”

화려한 신성력이 그들을 감쌌다.

만족스러워진 키리아는 들고 있던 가지를 내렸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그제서야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한동안 사람들은 눈물이 절로 나오는 눈을 문지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롤스 추기경은 실핏줄이 터져 눈이 빨개진 상태였다.

“이렇게 강력한 빛을 내다니, 대신녀님께 해가 될 수도 있었소!”

“추기경님이 들고 있을 때는 잠잠해서 저도 이 정도로 강한 신성력이 나올 줄은 몰랐죠.”

“으윽…!”

확실히 눈이 아플 정도의 신성력은 처음이었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은 그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키리아에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단순히 강한 빛이었다고 해서 신목의 신성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 신수를 정화해 보시지요!”

“알겠어요.”

장난스럽던 키리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긴장감이 깃들었다.

마물에 이어 이번엔 신수를 치료하게 될 줄이야.

특별한 존재들의 치료 사례들을 읽었던 적이 있긴 한데, 솔직히 막막했다.

키리아는 일각수에게 다가갔다.

“일각수의 본래 몸은 순결한 백색입니다. 갈기와 꼬리도 마찬가지죠. 어디, 그 숭고함을 다시 되찾아 보시죠.”

추기경이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

‘본래는 하얀 몸이라면….’

일각수는 영락없이 마기에 오염된 상태라는 뜻이다.

검은 얼룩들이 그 증거.

그러나 오염이 심하다 못해 중독이 된 탓에 뿔도 형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

키리아는 우선 신목의 가지를 일각수에게 가까이 대어 봤다.

황금빛 신성력이 부드럽게 흘러나와 일각수를 감쌌다.

그러나.

“푸르르!”

신성력이 닿자 일각수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며 앞발을 들었다.

하마터면 키리아가 발에 채일 뻔했다.

“으앗!”

“키리아!”

제논이 재빨리 다가와 일각수의 고삐를 붙잡아 진정시켰다.

“괜찮습니까?”

“흐어. 네, 괜찮아요….”

깜짝 놀랐네.

문득 키리아는 추기경을 비롯한 신전의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럼 그렇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였다.

미간을 찡그린 키리아는 한층 더 신중하게 일각수를 노려봤다.

일각수도 인상을 쓰고 키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 좀 봐? 내가 한 번만 더 아프게 했다간 여길 뛰쳐나갈 기센데?’

신수는 처음 다뤄보는데 실수 없이 치료해야 한다니. 부담이 백배였다.

그때 키리아의 눈에 제논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에 있었잖아?’

강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지만 마기가 침투해 병이 난 환자가 말이다.

그래. 우선은 마나 진단부터다.

“자자, 착하지.”

키리아는 저를 노려보는 일각수에게 애써 웃어 보이면서 일각수의 목에 양 손바닥을 대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키리아의 마나가 일각수의 미세한 기운들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과연 신수구나. 신성력이 굉장히 강력하게 느껴져. 마기도 만만치 않아. 꽤 오래전부터 마기에 시달렸을 거야. 그래서 그런가?’

마기가 꼭 혈관을 틀어막은 지방처럼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진단해보던 키리아는 그 원인이 바로 신성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강력한 신성력이 마기를 억눌렀고, 마기는 그에 저항하며 점점 단단하게 뭉쳤다.

그래서 일각수의 몸을 자연스럽게 순환해야 할 신성력까지 막히면서 몸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어느새 키리아는 주변을 잊고 일각수를 치료하는 방법에만 집중했다.

“일단 순환이 되게 해야 하는데. 섣불리 건드리면 한쪽이 터져버릴지도 몰라….”

중얼중얼 고민하는 키리아.

그런 그녀의 얼굴을 일각수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키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 방법이라면 될지도.”

그러면서 키리아가 가방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마계초였다.

꺼내자마자 옅은 마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지켜보던 신관들이 경악했다.

“아니 그건 마계초가 아닙니까!?”

“마계의 독초를 아픈 신수에게 처방할 셈이에요? 절대 안 됩니다!”

신관들의 명령에, 성기사들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제논이 키리아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움직이지 마라.”

제논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검을 이쪽으로 향한 자는, 베겠다.”

“……!”

성기사들은 제자리에 굳은 듯 멈췄다.

눈앞의 공작은 비무장인데도 그들은 본능적인 압박감을 느꼈다.

제논이 롤스 추기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정중한 목소리에 명령조가 섞여 있었다.

그래도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작의 말대로 아직은 아무것도 증명된 게 없었으니까.

“…모두 진정하시죠. 키리아 약제사, 계속하세요.”

안 그래도 키리아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잠깐의 소란이 일어나는 사이, 마계초를 일각수에게 차근차근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각수는 고역스러운 듯 푸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제법 참는 모습이었다.

“이쯤이면 됐어.”

키리아는 다시 마나 진단을 했다.

기운의 흐름을 조정해, 일각수에게 흘러들어온 마계초의 마기를 움직였다.

덩어리로 굳어 있던 마기를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꿈쩍도 안 했지만 조심스럽게 계속 시도하자 마침내 막혀 있던 마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히히힝!”

일각수가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뱉었다.

“이제 거의 다 했어.”

일각수의 콧잔등을 연신 쓰다듬은 키리아는 이번엔 생명석을 꺼냈다.

힘의 흡수를 도와주는 특별한 물질.

이걸로 일각수의 신성력을 정상화시킬 것이다.

키리아는 일각수가 생명석 조각을 삼키게 한 후 다시 신목의 가지를 꺼냈다.

신성력을 일각수에게 흘려보내면서 마나 진단을 계속 이어갔다.

새롭게 흐르는 신성력과 마기가 또다시 충돌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키리아가 그 흐름을 정리했다.

다시 고착되지 않도록 온 힘을 쏟은 덕분에, 일각수의 몸에는 점차 신성력이 더 많이 차올랐다.

하지만.

‘마기가 사라지지 않아.’

어쩐다? 이대로라면 내가 마나 진단을 그만두면 다시 병들어버릴 텐데.

입술을 깨물던 키리아는 곧 절충안을 찾아냈다.

‘좋아. 이렇게 해보자.’

그리고 얼마 후.

신목의 가지의 빛이 사라지면서 키리아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끝났어요.”

씩 웃은 그녀가 짠, 소개하듯이 일각수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이제 환자분은 마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거예요!”

“…….”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

모두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제논도 뜻밖의 결과에 할 말을 잃고 일각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몸이 검은색이 되어 버렸잖습니까!”

추기경의 외침대로 일각수는 백마가 아닌 흑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매끄러운 검은 몸체에 대비되는 은빛의 갈기와 뿔.

길고 단단해진 네 다리는 꼭 양말이라도 신은 듯 끝부분이 희었다.

엉망이었던 전과 달리 균형 잡힌 모습에서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심지어 백마였을 때보다 풍채가 한층 더 크고 늠름했다.

“…솔직히 멋있군요.”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롤스 추기경이 그를 휙 흘겨봤다.

중얼거린 이를 입 다물게 한 추기경이 날카롭게 따졌다.

“신수가 신성을 잃고 검게 변하다니 개탄스럽군요.”

“색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지금의 일각수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잖아요.”

키리아가 대꾸하자 추기경이 한쪽 입술을 올렸다.

“뭘 모르시는군요. 일각수는 그 신성력으로 마족을 감지해 울음소리로 알려주죠. 하지만 특히 특별한 점은 바로 신탁입니다.”

추기경이 검은 일각수를 힐끗 곁눈질했다.

“일각수는 대신녀님을 도와 신탁을 전하는 성스러운 신수. 그런데 이렇게 변해버렸으니, 우린 소중한 신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그, 그런 말씀은 안 하셨잖아요?”

처음 듣는 정보에 키리아는 당황했다.

그런데 이때였다.

일각수의 뿔이 은은한 은빛을 내더니,

<신목과 신수의 은인이 걸을 앞날을 보노라.>

일각수가 신탁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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