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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41)

88화

“…….”

대답이 없어서 이쪽에서 먼저 루크의 손을 덥석 끌어왔다.

“……!?”

당황한 루크가 손을 빼려 했다. 키리아는 그의 손목을 꽉 붙들고 째려봤다.

“루크 경이 날 미행하고 있었다고 다 꼰지를까?”

“……!”

“그럼 비밀스럽게 임무를 수행하던 루크 경이 아주우 곤란해지겠지? 난 상관없는데 어쩔까나. 응?”

부들부들.

루크의 까만 눈동자가 외쳤다.

역시 사악해…!

무시하고 키리아는 그의 손바닥을 폈다.

루크의 손바닥과 손날이 조금 전 키리아에게 날아가던 검에 베여 있었다.

꽤 깊게 벌어진 피부에서 피가 아직도 나오고 있다.

“에휴. 이걸 참고 있다니, 바보도 아니고.”

키리아는 가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꺼내 피를 닦아내고 간단한 소독을 했다.

마지막으로 독초 연고를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손바닥의 상처가 시간이라도 되돌리는 듯 스르륵 아물었다.

“……!”

루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못 본 건 아닌지, 크게 뜬 눈으로 상처를 빤히 관찰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 같다.’

아, 아니. 강아지 같다는 말이다.

공작님도 종종 대형견 같은데, 그쪽이 기품 있는 도베르만 같다면 이쪽은 느낌이 다르다.

‘시고르자브 종 강아지랄까.’

“풋.”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키리아는 웃고 말았다.

루크와 키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루크에게 키리아의 그 웃음은 그리운 이를 떠올리게 했다.

루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아줌마….”

“아줌마아?”

키리아가 눈썹을 삐뚤게 치켜떴다.

당황한 루크는 허둥지둥 사과했다.

“죄, 죄송….”

그러다 깜짝 놀라 입을 조개 마냥 딱 다물어버리는 루크.

그는 화상 때문에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고, 그래서 롤스 추기경은 루크가 말하는 걸 몹시 듣기 싫어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자가 온전한 말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여길까? 루크. 자네가 주신을 욕보이기 싫다면 말을 아끼는 편이 좋겠네.’

“…….”

루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키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급한 손놀림으로 수첩에 휘리릭 한 마디를 갈겨 썼다,

[죄송합니다.]

키리아에게 보여주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저 키리아라는 주치의는 난감해하겠지.

아니면 말더듬이인 자신을 한심하게 보거나. 혐오하거나.

이미 숱하게 받아왔던 반응이기에 루크는 전부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말할 줄 알잖아. 근데 왜 내 말 씹었어요. 네?”

“……?”

말하라며 꾸짖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오, 근데 목소리 되게 좋다.”

바로 칭찬까지 하는 사람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루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키리아를 멍하니 쳐다봤다.

키리아는 왠지 신이 나 보였다.

“원래 과묵한 사람들이 목소리가 좋은가? 우리 공작님도 그렇거든요. 평소엔 차가운데 요즘은 자주 웃음기도 섞이거든요. 그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갑자기 공작님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 어…….”

“아무튼 그쪽 목소리도 꽤 괜찮네요. 이런 말 많이 듣지 않아요?”

“…….”

키리아는 안절부절못하는 루크를 바라보다 가방에서 약병을 꺼냈다.

그걸 루크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내가 만든 화상치료제. 흉터도 낫게 해줄 거예요.”

“…….”

“괜찮으면 한번 써보세요. 내 용건은 이제 끝. 더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목적을 달성한 키리아는 시원하게 돌아섰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크는 작은 약병을 내려다봤다.

‘불길한 독초 약제사….’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그녀와의 대화가 루크의 기억 한 조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가 견습 기사였을 때의 일이다.

[선배님. 왜 단장님은 종자를 두지 않아요?]

루크가 수첩에 질문을 썼다.

경력이 있는 정식 기사라면 대부분 견습 기사 중 한 명을 종자로 데리고 다니면서 직접 지도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란페르세 공작이자 성기사단장인 제논은 누구도 옆에 두지 않았다.

루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그라면 종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설 텐데.

선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워낙에 딱딱하고 까다로워서. 누가 버티겠어?」

선배는 못 먹는 감을 아니꼬워하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잘나가는 후작 가문의 견습 기사가 종자가 된 적 있었는데, 24시간도 안 돼서 잘렸어. 아침에 숙취가 남아 있었다는 게 이유지. 아니, 밤에 술도 못 마시나?」

「…….」

「후작 영식도 그런 판인데 우리 같은 평민들한텐 얼마나 더 매정하게 굴겠냐? 봐. 지금도 저렇게 곁을 안 주는데.」

어디 무서워서 다가가겠어?

선배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루크는 오히려 단장이 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위세 있는 후작 가문의 아들을 그런 식으로 내치는 건 공작이라도 조심스러운 일일 테니까.

저런 분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믿을 수 있는 사람일 거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

루크는 화상치료제의 병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추기경님이 추궁하면 할 말이 없을 거야. 미행은 들켰지만 뭐라도 건져야 해.’

추기경이 약속한 포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이번에 고아원에서 독립하려는 동생에게 작은 밑천이라도 줄 수 있을 테니까.

고생하다 돌아가신 고아원 원장, 마샤 아줌마를 대신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크는 화상치료제를 버리려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결국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º º º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키리아는 신관의 안내를 받았다.

“대신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를 따라가자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제논과 합류할 수 있었다.

신관의 안내를 뒤따르며 키리아는 제논을 올려다봤다.

제논이 키리아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음, 역시 공작님 목소리가 좀 더 좋아요.”

“……?”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제논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앞으로 자주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군요.”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 같은데요.”

“지금보다 조금 더.”

“바쁜데….”

“명령입니다.”

아놔, 괜히 칭찬했다.

키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침내 키리아는 대신녀가 있는 홀에 도착했다.

화려한 홀에는 고위 신관을 비롯한 무장한 성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저만치 상단에는 앉아 있는 대신녀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추기경이 보였다.

키리아는 대신녀를 향해 걸어가며 제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목의 가지라는 강력한 증거를 뒤집을 신전 측의 수라…. 대체 뭘까?’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지만 긴장이 됐다.

‘응? 그런데 저 사람은?’

키리아는 고위 사제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 견습 사제를 발견했다.

‘견습인데도 이 자리에 있다니, 신전 유망주인가? 아니, 잠깐만.’

금발에 푸른 눈. 눈물점이 찍힌 수려한 얼굴.

‘저거 황태자잖아?’

데뷔탕트에서 봤던 아주 잘생긴 얼굴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원작의 남주이기도 하고.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것도 견습 신관 옷을 입고.’

눈이 마주치자 황태자가 키리아를 향해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건가?

아주 잠깐 고민하던 키리아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조금 충격받은 듯한 황태자를 보지 못했다.

마침내 키리아는 대신녀의 앞에 섰다.

‘저 사람이 대신녀…. 역시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네.’

키리아는 제논과 함께 인사를 올렸다.

“주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북부의 공작과 그 주치의에게 빛이 깃들기를. 이곳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대신녀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연 제논의 말대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그래도 잘 들어보니 노부인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제논이 대신녀의 환영을 무심히 받아쳤다.

“특별한 환영 감사했습니다. 성기사들의 검마다 주신의 뜻이 깃들어 있더군요.”

“…성기사들의 미숙한 실수를 아직 마음에 담고 계셨습니까?”

롤스 추기경이 못마땅한 듯 끼어들었다.

제논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훈련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만,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하셨습니까? 마음에 담고 계셨나 보군요.”

“…흠흠!”

롤스 추기경이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를 냈다.

“공작님과 주치의의 활약상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북부에 신목을 되찾아주고 신목의 인정도 받으셨다고요. 하지만 교단에서 신목의 뜻을 아무런 검증 없이 이어받을 수는 없습니다.”

“…….”

“그런 고로, 이 자리의 주인공이신 신목의 은인에게 묻겠습니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키리아는 긴장한 채 추기경의 말을 기다렸다.

“키리아 약제사. 그대가 신목의 은인이라는 증거를 준비해 오셨습니까?”

“물론이에요.”

키리아는 신목의 가지가 들어 있는 함을 두 손에 들었다.

그걸 추기경에게 건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추기경은 신목의 가지를 대충 살펴보기만 했다.

“…더 자세히 보지 않으세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짜 신목의 가지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있는 건 제가 아니니까요.”

롤스 추기경이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자, 신호를 받은 신관이 홀의 또 다른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각다각.

웬 몸집 큰 당나귀가 신관에게 이끌려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왔다.

갈비뼈가 드러나는 비쩍 마른 몸.

푸석푸석한 갈기와 활력 없이 축 늘어진 눈동자.

젖소처럼 얼룩덜룩한 몸은 추레했다.

심지어 이마에는 추한 혹까지 달려 있었다.

‘저 당나귀는 뭐야…?’

키리아가 당나귀를 망연히 쳐다보는 사이, 추기경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신목의 은인께서 들고 있는 게 정말 순수한 신목의 가지가 맞다면, 저 신수를 정화할 수 있을 테지요.”

“…신수라고요?”

“그렇습니다.”

추기경이 당나귀로 시선을 향했다.

“저 당나귀는 대신녀님을 수호하는 신수인 일각수입니다. 정확히는 오염된 일각수.”

“…….”

키리아의 옆에서 제논이 낭패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녀와 추기경이 노리는 바를 알아챈 것이다.

신목은 일전에도 의혹이 나왔던 것처럼, 반쯤 마물화되었다.

당연히 신목의 순도 높은 신성력은 변질되었다.

여전히 찬란한 신성력이지만, 신수를 정화하기엔 부족할 터였다.

‘여기선 마탑주의 보증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순수한 신성력.

그걸 저 신수의 정화를 통해 증명하지 못한다면….

키리아와 제논, 그리고 신목 전체가 부정당할 수도 있었다.

“자, 지금부터 이 신목의 가지로 신수를 정화해보도록 하지요.”

추기경이 신목의 가지를 높게 들어 보인 뒤 신수에게 다가갔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양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제논은 무심코 키리아를 쳐다봤다.

그러다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키리아의 보랏빛 눈이 짓궂은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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