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푸른달빛이 제논의 침대 위를 비췄다.
키리아는 침대에 누워있는 제논의 한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깜박 졸 뻔했네.’
밤마다 마나 진단을 하라는 제논의 부탁 같은 명령이 있은 후, 키리아는 거의 매일 밤 그의 옆을 지켰다.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다.
손을 잡고 마나 진단을 시작하면 얼마 안 가 제논은 곤히 잠에 빠졌으니까.
그러면 키리아도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좀 졸아서 시간이 더 늦었네.’
눈을 비빈 키리아는 제논이 자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엥.”
그런데 제논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게 아닌가.
뭐지.
빨리 자라고 동화책 실컷 읽어줬는데 오히려 정신 또렷해진 아이를 보는 이 기분.
“…왜 안 주무세요?”
“잠이 안 옵니다.”
“몸 상태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푸른달이 뜬 오늘, 제논은 어김없이 옅은 푸른빛 피부를 지닌 마족의 모습이었다.
이때의 제논은 팔의 통증도 없었다.
“몸 상태 때문은 아니고….”
제논이 천장을 바라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오랜만에 그곳에 걸음 한다고 생각하니 쉽게 잠이 오지 않는군요.”
“…….”
그러고 보니 중앙신전으로 출발하는 날이 바로 내일이다.
제논이 마물로 타락했다며 그를 퇴출한 대신녀가 있는 곳.
전쟁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 힘겹게 마계의 문을 봉인하고 돌아왔는데, 해결법을 함께 찾아줄 줄 알았던 사람에게 내쫓긴 것이다.
키리아는 조심스럽게 제논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제논은 또렷한 눈만 조용히 깜박이고 있을 뿐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대신녀가 원망스러우시죠?”
“원망….”
단어를 곱씹던 제논이 이내 대답했다.
“그보다는 괴리감이 들었습니다.”
“네?”
예상치 못한 단어에 키리아는 의아해졌다.
“대신녀는 날 손주처럼 대해줬거든요.”
“소, 손주요?”
키리아의 당황스런 되물음에 제논이 웃음기를 띠며 그녀를 바라봤다.
“몰랐습니까? 대신녀는 이미 노령입니다.”
“와… 몰랐어요. 신문의 삽화에선 체구가 아담하셔서 소녀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까요.”
대신녀는 전통적으로 얼굴을 흰 베일로 가린다.
주신의 대리인으로서 삿된 현상에 휘둘리지 않고 늘 신의 곁을 지킨다는 의미다.
“목소리도 나이에 비해 무척 젊고 기운차서 더욱 실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죠.”
“많이 친하셨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편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제 얼굴만 보고도 제 기분을 알아맞혔으니까요.”
그야 사람의 표정을 보면 기분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던 키리아는 처음 제논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그때 공작님은 정말 포커페이스였지.’
그런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분을 알아맞힌다면, 대신녀의 애정이 꽤 깊었던 모양이다.
그때를 회상하듯 잠겨들던 제논의 시선이 문득 굳었다.
“그래서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한마디의 경고나 언질도 없이 갑자기 단장직에서 박탈당했으니까요.”
“…….”
“어쩌면 교단의 수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논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잡고 있던 제논의 손을 더 꼭 잡았다.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다면 정말 당혹스러웠겠네요. 공작님의 부하들도 그랬을 거고요.”
“…….”
부하 얘기에 씁쓸함을 띠던 제논이 문득 떠오른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인상 깊은 견습 기사가 한 명 있었죠. 아무런 검증도 없이 단장을 퇴출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던 유일한 사람.”
“오, 정말요? 견습인데도 그랬단 말이에요? 이름이 뭔데요?”
“아쉽게도 까먹었습니다.”
“…인상 깊다면서요?”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어서. 하지만….”
기억을 더듬던 제논이 말했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던 건 기억나는군요.”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성기사….”
헉.
키리아는 퍼뜩 원작 속 정보가 떠올랐다.
‘그 사람 혹시? 이름이, 이름이….’
아쉽게도 이름은 까먹었다.
‘…아무튼! 원작에서 남주인 황태자의 충견으로 묘사됐던 거 같은데.’
“공작님, 그 사람 화상이 심해요?”
“네. 그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얼굴의 반이 흉터였으니까요.”
“……!”
그렇다면 맞다.
‘공작님의 자리를 이은 원작 속 성기사단장. 그리고 황태자의 광적인 충견.’
이름 모를 아무개 경.
‘마룡으로 변한 공작님에게서 황태자를 보호하고 대신 희생했지.’
충직한 성기사답게 마물을 혐오하는 그가 마룡에게 죽자살자 덤벼드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났다.
마룡 입장에선 황태자 다음으로 성가셨을 적.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공작님의 퇴출을 유일하게 반대했었다고?’
마물을 싫어한다지만 나름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확실한 모양이다.
‘가만있어 봐. 황태자한테 충견이 생긴 게 원작에서 언제쯤이었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쯤.
“…….”
기억을 되짚던 키리아가 입술을 슥 올렸다.
이왕 적의 둥지로 가는 거면, 미래의 적을 한 명쯤 제거해봐도 괜찮겠지?
최소한 황태자의 충견이 되는 것만 막으면 될 것 같다. 이왕이면 호감을 사두자.
내 편으로 만드는 건… 어우, 내가 릴리도 아니고. 욕심부리지 말자.
‘그럼 지금 당장 준비를 해둬야겠네.’
내일이 출발일이니 말이다.
“공작님, 저 이만 가볼….”
고개를 든 키리아는 어느새 잠들어 있는 제논을 발견했다.
두 눈이 곤히 감겨 있었다.
“잠드셨네.”
잠시 고민하던 키리아는 조심스럽게 제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락.
“와, 진짜 부드럽다….”
촉감이 기분 좋아서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한동안 그의 머리카락을 더 만지작거리던 키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침실 문이 닫히자 제논이 눈을 천천히 떴다.
“…하.”
그는 깊은숨을 토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뾰족한 귀가 붉어져 있었다.
º º º
공작성과 중앙신전은 거리가 제법 멀었다.
마차로 며칠을 이동한 후에야 키리아는 북부 중앙신전의 땅을 디딜 수 있었다.
“으그그.”
찌뿌둥한 몸을 쭉 편 키리아는 마차에서 내렸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신관들이 보였다.
그리고 양쪽으로 비스듬히 도열한 성기사들도.
전부 무장을 갖춘 모습이다.
바짝 경계심이 깃든 성기사들의 모습에 키리아도 절로 긴장감이 들 정도였다.
뭐야 이거?
“…나 때문입니다.”
옆으로 온 제논이 나지막이 말했다.
“교단은 나를 공식적으로 마물로 보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잘생긴 마물이 어딨는데요?”
“…….”
갑작스런 키리아의 칭찬에 제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제논의 망토가 펄럭였다.
망토가 일부 걷히면서 가려져 있던 제논의 오른팔이 드러났다.
이제는 긴 소매로 가리고 있지 않아서 갈고리를 연상시키는 용의 손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
철커덕!
성기사들이 즉시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눴다.
“역시 대신녀님의 말씀이 맞았어.”
“공작은 마물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경계와 두려움이 묻어나는 수군거림이 여기까지 들렸다.
“뭐라고요?”
키리아가 날을 세우자 제논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깥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대신녀의 뜻에 강한 영향을 받으니까요. 성기사들 중에 평민이 많은 것도 한몫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그러며 키리아가 성기사들을 향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초대받고 온 손님에게 검을 겨누는 건 무슨 경우예요? 지금 누구한테 검을 겨누는지 알고 있어요?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있고요?”
“…….”
성기사들은 조금 화난 듯했다.
하지만 키리아의 말이 맞았다. 성기사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이었다.
다들 천천히 검을 내렸다.
흥. 키리아는 승리의 콧바람을 내뿜었다.
이때 고위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서 키리아와 제논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란페르세 공작님과 그 주치의님.”
“손님을 맞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더군. 내게 검을 겨눈 건 대신녀의 뜻으로 봐도 되겠는가?”
제논이 싸늘히 물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성기사들은 다른 이들보다 마물에 민감한지라.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길.”
제논에게 어색하게 사과한 신관이 얼른 말을 이었다.
“대신녀님께선 아직 묵언 기도 중이십니다. 방을 안내해 드릴 테니 부름이 있을 때까지 여독을 푸시지요.”
여성 신관이 키리아를 따로 안내하기 위해 다가왔다.
신전은 성별에 따라 머무르는 건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나중에 보죠, 키리아.”
“네, 이따 봐요, 공작님.”
º º º
키리아는 제논과 헤어져 자신이 머무를 방을 안내받았다.
‘하얀 기둥이 줄지어 있어서 꽤 멋스럽네. 과연 신전다운 모습이야. 태도는 그렇지 않지만.’
그런 감상을 하는 사이, 안내를 맡았던 신관은 공손히 인사 후 떠났다.
키리아는 방으로 들어와 미리 옮겨져 있던 짐을 풀었다.
“말린 독초 묶음, 독초 추출 용액들, 독초 사전과 포이즌 리저드의 독액… 좋아. 다 있네.”
모두 어젯밤 부랴부랴 챙긴 것들이다.
필요한 재료를 쏙쏙 골라 책상 위에 늘어놓은 키리아는 머리를 올려 묶었다.
“빨리 완성해야 해.”
지금부터 만들 것은 화상 흉터에 특효를 보이는 약이었다.
아무개 경은 매우 과묵했고 늘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입술까지 번진 화상 때문에 말을 더듬게 됐고, 그래서 말수가 극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화상이 그에게 큰 콤플렉스인 건 당연했다.
“그걸 독초로 만든 약으로 치료해주는 거야.”
그러면 마물 공작의 주치의인 나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겠지?
“좋아쓰.”
키리아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나무 위에서 창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얼굴에 화상이 있는 소년, 루크였다.
‘오자마자 독초들을 꺼내 뭔가를 만들다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롤스 추기경이 괜히 지켜보라 한 게 아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 그 주치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만든 약을 챙기고 부랴부랴 방을 나섰다.
‘어딜 가는 거지?’
그 뒤를 루크가 몰래 따랐다.
빈민가에서 자라 온갖 일을 해 본 그는 누군가를 미행하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즉, 루크가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키리아가 그를 발견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키리아는 성기사 아무개 경을 찾아 연무장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