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41)

85화

그 사이에 다른 한쪽의 상단주의 비서도 같은 행동을 했다.

이윽고 두 상단주는 키리아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죄송하지만 주치의님. 이번 거래 건은 잠시 보류해도 괜찮을까요?”

“네? 어째서요?”

키리아는 당황했다.

방금까지 거래를 따내려고 온갖 조건을 내세우던 사람들이 이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고?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이렇게 일방적으론 안 되죠.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주세요.”

“그게… 대신녀가 며칠 전에 북부의 중앙신전으로 왔습니다. 그러며 연설을 했습니다만.”

“그 내용이 조금….”

난색을 표하던 상단주들이 귓속말의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들의 말을 들은 키리아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옆에서 들은 조앤이 분개했다.

“독초가 불행을 부른다니요!”

그랬다. 대신녀는 신도들이 가득 모인 연설에서 독초는 마족의 풀이라 아무리 좋은 효능을 갖고 있어도 결국 불행을 부를 거라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독초 연고와 마기 해독수에 직격타가 되는 발언.

사실 북부는 남부에 비해 교단의 입김이 강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란페르세 공작가가 신목의 가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마전쟁 후 여태까지 평민들의 일상생활을 지탱해온 건 신전의 성수였다.

이전에 비해 교단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는 말이다.

“허.”

키리아는 기가 막혔다.

허탈하게 힘이 빠진 몸을 소파 등받이에 푹 기댔다.

“그래서 거래를 그만두시려는 거군요.”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익을 좇는 상인이니까.

대신녀가 저런 발언을 한 이상 독초 연고가 얼마나 수익을 낼지 불투명해진 것이다.

“그럼 이 거래는 없던 걸로 하고….”

그런데 상단주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래 파기라뇨? 안 됩니다!”

“네?”

키리아는 눈썹을 의아하게 찡그렸다.

“방금 대신녀의 연설 때문에 거래를 보류한다면서요?”

“그건 더 좋은 조건의 계약서로 수정해오기 위해서입니다. 파기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에엥?”

황당하진 키리아는 늘어뜨렸던 몸을 바로 세웠다.

상단주들의 얼굴이 팬심으로 두근거릴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글이글했다.

“분명 대신녀의 연설로 타격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린 손익을 따지는 상인이기 이전에 북부인이에요.”

“맞습니다. 공작님이 어렵게 다시 돌아와 주시고 이제 막 일어서시려는데 보란 듯이 이런 방해가 들어오다니요.”

마치 일심동체가 된 듯 동시에 외치는 두 상단주!

“저희가 끝까지 공작님과 주치의님을 돕겠습니다!”

키리아는 멍하니 물었다.

“진심이세요…?”

“아내에게 프로포즈할 때보다 진심입니다!”

아니 그건 아내분에게 너무 미안하잖아.

어쨌든 그들에게서는 순도 백 프로의 진심이 느껴졌다.

키리아는 찡 감동했다.

“좋아요!”

벌떡 일어난 그녀는 마찬가지로 벌떡 일어난 두 상단주와 굳세게 악수를 나누었다.

“함께 이겨내자고요!”

“우오오!”

“만세!”

우렁찬 기합이 터진 직후, 응접실 바깥에서 우당탕하는 소음이 일어니 가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여기 다른 마물이 나타났냐? 위협적인 소리가 들렸는데!”

“이거 이거, 가울 경!”

공작성에 제법 오래 머무른 두 상단주는 마족인 가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먼저 악수하며 정답게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제 우린 한 배를 탔소. 잘해봅시다!”

“기운 내요!”

껄껄 웃으며 나가는 상단주들.

가울은 할 말을 잃고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키리아에게 물었다.

“풀떼기 너… 저것들한테 마계초라도 먹인 거야?”

º º º

두 상단주의 반응처럼, 공작성을 찾아온 북부 사람들은 대신녀의 연설 내용을 알고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이 뭔데 우리 애를 건드려!?’라는 분위기로 분개했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귀족보다 신전에 훨씬 많이 의지했던 북부의 많은 평민들은 아마 다를 터였다.

공작을 지지하더라도, 대신녀의 발언 때문에 찜찜함도 느끼겠지.

‘이대로 둬선 안 돼.’

희석된 성수를 계속 쓰는 건 그들의 건강에 좋지 않았다.

영지민들의 건강은 국력과도 연결된다.

“아가씨, 이건 모함이에요! 괜히 신전의 성수와 포션 판매가 밀릴 거 같으니까 수를 쓰는 거라고요!”

조앤이 씩씩거렸다.

“신목들이 아가씨와 공작님을 인정한 걸 모르는 걸까요? 다른 곳도 아니고 교단이 그 사실을 무시할 순 없을 텐데요.”

“그래. 분명 엄청 신경 쓰이겠지.”

신의 나무인 신목을 부정하는 건 교단의 근간을 흔드는 일과 같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신목의 은인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다니, 저의가 뭘까…?”

키리아는 고민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정을 알게 된 가울이 분개했다.

“뭐긴 뭐야! 우리보고 뭐 되라는 거지! 하여튼 신성력을 쓰는 놈들은 하나같이 겉만 깨끗해서는. 다 똥물에 담가버려야 해.”

“공작님도 신성력 있는데?”

“와, 왕은 제외.”

“로하넨은 신관인데?”

“그, 그 녀석도 빼고.”

키리아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당황하던 가울이 퍼뜩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맞아. 풀떼기. 너한테 편지 왔다. 로하넨이 전해주래.”

편지를 받은 키리아는 편지 겉면에 적힌 발신인을 보고 입술을 비죽 올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키리아는 손가락에 편지를 끼우고 가볍게 흔들었다.

“대신녀가 날 초대했어.”

º º º

편지는 바로 북부의 중앙신전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무어라 내용은 많지만 본론은 딱 하나였다.

‘신목의 은인을 직접 보고 싶다.’

이거였다.

제논 역시 비슷한 내용의 초대장을 받았다.

다만 제논의 초대장은 제논 본인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신목의 은인’, 즉 키리아를 데려고 와 달라는 요청의 내용이었으니까.

“이건… 굉장히 무례하군요.”

키리아와 제논의 초대장을 번갈아 본 로하넨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그가 제 안경을 추켜올렸다.

“분명 주군께 신목이 돌아왔다는 것도 알 텐데 그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제논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직 신전 측에서는 날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저를 이렇게 콕 집어 부르는 이유도 알겠네요.”

키리아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제가 신목의 은인이라는 소문이 맞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거겠죠? 꼬투리를 잡으려고.”

“그럴 겁니다.”

“신문 기사도 못 믿어서 이렇게 나오는데, 제가 아무리 사실을 얘기한들 신전이 들은 척이나 할까요?”

“…….”

키리아의 물음에 제논과 로하넨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가울이 가볍게 뱉었다.

“그럼 그냥 신목을 눈앞에 들이대 버려.”

“오, 그게 좋겠군요!”

로하넨이 안경을 반짝였다.

“신목을 여기까지 모셔올 순 없으니… 신목의 가지를 가져가는 겁니다. 신목은 다른 이에게 함부로 가지나 잎을 주지 않으니까요. 분명한 증거가 될 겁니다.”

하지만 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편지에서 벌써 언급됐어요.”

“예?”

“신목의 가지요. 저더러 신목의 일부를 가져오라고 하던데요?”

“그렇습니까…? 으음.”

당혹한 로하넨이 침음했다.

연설을 통해 신목의 은인을 부정했으면서, 신목의 은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인 신목의 가지를 먼저 요구하다니.

듣고 있던 제논이 입을 열었다.

“키리아, 그대에게 얽힌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단순한 뜻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신목의 가지를 부정할 수를 마련해뒀다고 봐야겠죠.”

“…그렇겠네요.”

꿀꺽.

제논의 말을 들으니 키리아는 바짝 긴장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신녀가 신목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그 타격은 엄청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겨우 불이 붙기 시작한 제논의 재기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쯤 되자 키리아는 신전 측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이용해서 공작님을 곤경에 빠뜨릴 셈이구나?’

비겁해!

‘정말 대신녀 맞아?’

화가 난 키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톡,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어느새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제논이었다.

“표정이 무섭습니다, 키리아.”

“으, 걱정이 되어서요…. 공작님은 괜찮으세요?”

“만약 일이 잘 안된다면.”

제논이 진지하게 말했다.

“가울의 말대로 신목들을 중앙신전 한가운데에 꽂아버릴까요?”

“…….”

“신목의 정령이 직접 나타나면 말문이 막힐 겁니다.”

“꽃님이도 말문이 막힐 것 같은데요.”

공작님, 신목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제논에게 달라붙던 꽃님이와 밀어내던 제논을 떠올리며 키리아는 생각했다.

“히. 그래도 재밌겠네요, 그거.”

“그렇죠?”

키리아가 마침내 웃자 제논도 안심한 듯 조금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는 두 사람.

소리 없이 꺄악 거리는 로하넨과 멀뚱멀뚱한 가울이었다.

º º º

“공작이 초대에 응했습니다.”

롤스 추기경이 말했다.

그는 하얀 사제복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러나 얇은 눈매는 상대의 약점을 탐색하는 듯 번들거렸다.

롤스의 보고를 들은 알렌스는 다리를 꼰 채 찻잔을 들고 있는 우아한 모습이었다.

“잘 됐군요. 폐하의 뜻은 기억하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

추기경이 쓱 웃었다.

“확실히 지원해주신 만큼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알렌스는 대답 대신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추기경 옆에서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여성에게 눈길을 옮겼다.

얼굴을 짙은 흰 베일로 가리고 있는 대신녀.

“대신녀님도 잘 부탁드립니다.”

“…….”

“후후. 그리 긴장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러자 추기경이 슬쩍 끼어들었다.

“걱정마시지요, 전하. 대신녀님도 폐하와 뜻을 함께하실 테니까요.”

“물론 믿고 있죠.”

알렌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부탁해요, 롤스 추기경.”

“맡겨주십시오.”

롤스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반드시 공작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밝혀내겠습니다.”

방을 나가며, 알렌스는 문밖을 지키고 서 있던 성기사를 지나쳐갔다.

황태자를 배웅한 롤스 추기경은 그 소년 성기사에게 몸을 돌렸다.

“할 일이 생겼다네, 루크 경.”

“…….”

“며칠 뒤 마물 공작이 올 거라네. 바깥의 소문과 달리 대신녀님은 그자가 마물의 본성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하셨어. 열쇠는 공작의 주치의가 쥐고 있을 거야. 자네가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게.”

“…….”

끄덕.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만 짧게 주억였다.

시선을 푹 숙인 그의 얼굴은 반 이상이 흉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물러가자 롤스는 혀를 찼다.

“쯧. 언제 봐도 음침한 놈이야. 신성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장 후보에 올려놓긴 했지만….”

보기 흉하니 조만간 치워야겠어. 그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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