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드디어 공작성이 보인다!
키리아는 마차가 달릴수록 멀리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성의 뾰족한 첨탑이 반가웠다.
꼭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위험합니다, 키리아. 나뭇가지들이 길게 뻗어 있어서.”
“괜찮아요! 다치면 약 바르죠 뭐. 그 유명한 독초 연고! 히히.”
텐션이 높아진 키리아는 농담 삼아 대꾸했다.
피식 웃은 제논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마차 벽면을 두드려 마부에게 정지 신호를 보냈다.
“어, 왜 갑자기 마차를 세우셨어요?”
“길가의 나무들을 전부 베어버리려 합니다.”
“에엥?! 갑자기 왜요!”
“그래야 그대가 머리를 내밀어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며 검을 챙겨 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제논.
농담 아니고 진짜로 할 셈이다!
키리아는 기겁해서 제논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잠깐! 고작 그런 일로 나무를 자른다고요? 여기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대가 다치는 일을 고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감사합니다. 감사한데요….”
나 때문에 애꿎은 나무들이 잘리게 둘 순 없어. 꿈자리가 엄청 사나워질 거 같다고!
꽃님이 얼굴은 또 어떻게 봐?
“안 다치면 되잖아요. 머리 안 내밀고 얌전히 앉아 있을게요. 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그럼 알겠습니다.”
슬쩍 웃은 제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키리아는 뭔가 찝찝했다.
‘뭐지. 나 방금 은근슬쩍 조련당한 느낌인데.’
이 와중에도 잘생긴 제논의 얼굴을 의심의 눈길로 힐끔거리며, 키리아는 제논의 옷자락을 놓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때, 마차가 출발했다.
덜컹!
“엄마얏…!”
갑작스러운 마차의 흔들림에 키리아의 몸이 일순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갈 뻔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친 건 제논이었다.
키리아의 상체가 뒤로 꺾임과 동시에, 제논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확 커졌다. 일순 숨을 멈췄다.
“괜찮습니까?”
“…소, 손 좀 놔주세요.”
하지만 제논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힘을 주어 잡는 듯했다.
덜커덩 덜커덩.
마차 소음만이 나는 적막 속에서, 제논이 키리아의 붉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길이 아직 험합니다.”
키리아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난처하게 떨리는 그녀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다 제논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순간 제논의 눈꼬리가 작게 움찔했다.
“…….”
키리아를 잡지 않은 제논의 다른 한쪽 손이 감정을 누르듯 한번 꽉 쥐었다 펴졌다.
“…이제 마차가 흔들리지 않는군요.”
제논이 키리아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키리아는 그제야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와, 진짜 숨 막혀 죽는 줄.
근데 나만 어색한가? 공작님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이 포커페이스였다.
키리아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서 나오는 대로 조잘댔다.
“아, 공작성이 이제 더 가깝게 보이네요! 오랜만이라 완전 반가워요.”
“…….”
“그거 아세요? 항상 있을 땐 모르다가, 한번 떨어져 보고 나니까 그때 딱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깨닫는 거요.”
“압니다.”
제논이 턱을 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공작님도요?”
“네. 이젠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 정도예요?”
공작님이 다시 집돌이로 돌아가는 건 곤란한데. 키리아는 중얼거렸다.
키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살폈다.
그러다 이상한 행렬이 눈에 띄었다.
“어? 공작님, 저게 뭐죠?”
“……?”
성으로 향하는 길은 키리아와 제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정비를 했는지 깨끗하고 넓었다.
그런데 그 길을 마차와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탓에 키리아와 제논의 마차도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때아닌 교통 정체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예.”
제논의 명령에 마차를 몰던 하인이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저, 주군. 이 사람들 전부 주군과 주치의님께 선물을 드리러 왔다지 말입니다.”
“뭐?”
키리아와 제논의 놀란 눈이 서로 마주쳤다.
두 사람은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마자 행렬 속 누군가가 외쳤다.
“공작님!”
“주치의님이다!”
순식간에 행렬이 떠들썩해지고, 마차에서 귀족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러고는 앞다투어 꽃다발과 플랜카드를 위로 치켜들었다.
[공작님은 너무 허전해요. 명불허전!]
[주치의님 때문에 제 마음에 비가 와요. 심장마비!]
[공작님과 주치의님에게서 향이 나요. 제 취향.]
그리고 귀부인들이 보내는 쌍따봉까지.
“…….”
키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모두 신문을 통해 공작과 주치의의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었다.
공작의 복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북부인들에게, 신문이 전한 사냥대회에서의 일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였다.
게다가 평범한 복귀도 아니다.
얄미운 남부까지 뒤흔든 화려한 복귀인 것이다!
“…참신하군.”
제논이 그들의 주접 멘트에 작게 감탄했다.
그 말을 들은 키리아가 나지막이 충고했다.
“배우지 마세요, 공작님.”
“…….”
속을 들킨 듯한 침묵이었다.
º º º
“빨리 가요, 빨리.”
마차에서 내린 키리아는 제논을 재촉했다.
북부 귀족들의 선물 행렬이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작성은 사람보다 마물이 많은 곳이니까.
‘저 많은 손님들의 시중을 들 사람이 부족할 텐데!’
게다가 마물들이 몰려든 사람들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나?
그래서 부랴부랴 왔는데….
본성으로 들어온 키리아는 급히 오던 것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그거 이리 주셈.”
“히익.”
마물들이 손님들의 짐을 빼앗아서 손님 방으로 직접 옮겨주고 있는 게 아닌가?
“피루룻.”
하피가 깃털을 수신호처럼 사용해 손님들에게 길 안내를 했고,
“거긴 위험하다, 인간.”
켈베로스가 낡아서 위험한 곳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부랴부랴 청소도구를 들고 뛰는 임프와 그렘린들까지.
“거기 임프 삼형제! 손님들에게 팁을 갈취하지 마세요!”
소리치던 로하넨이 키리아와 제논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주군, 키리아 양! 다녀오셨습니까.”
근처에 있던 가울과 앨마, 조앤도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공작성 마차가 다가오는 걸 보고 일찍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왕! 왜 이렇게 늦었어요? 풀떼기 너도 너무하다.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매정하냐?”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아가씨!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키리아는 오랜만에 만나는 공작성 식구들과 반가운 해후를 나눴다.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로하넨이 뿌듯하게 말했다.
“주군과 키리아 양의 활약상을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공작성에 연일 손님이 늘고 있어요.”
“인간이 성에 쥐처럼 들끓는다고요.”
“가울. 주군의 앞입니다.”
로하넨의 지적에 가울은 쳇, 궁시렁거렸다.
“성에 저들을 다 수용하진 못할 텐데, 어떻게 하고 있지?”
제논의 물음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앨마가 킬킬 웃었다.
“그래서 라데츠에 숙박업소로 전향한 사람들이 대폭 늘었지요.”
“치안대를 추가로 편성해야겠군.”
“그럴 필요 없어요, 도련님.”
“음?”
“포이즌 리저드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라데츠는 전례 없이 인파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이 낮다고 했다.
심지어 포이즌 리저드 경비병이 명물 비슷하게 되면서 일부러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고.
“마물이 명물인 관광지가 된 거예요?”
키리아가 황당해하면서도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마물에게 짐을 빼앗기면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귀족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저도 놀랐습니다. 이 흐름을 이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작게 웃은 로하넨이 다시 업무 태도로 돌아가 어깨를 바르게 폈다.
“돌아오시자마자 죄송하지만, 주군. 마탑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이 주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스도 생명석 건으로 상담할 것이 있다고 하고요.”
“…아, 그래. 바로 가지.”
마물이 명물이란 말에 얼떨떨해하던 제논이 대답했다.
이어 로하넨이 키리아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키리아 양을 기다리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독초 연고의 거래를 원하는 상단들이에요.”
“와, 오래 기다렸겠는데요?”
“목마른 자가 기다려야죠.”
키리아는 로하넨과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전에 없는 활기가 넘치는 공작성.
사람이 붐비는 걸 좋아하지 않는 키리아지만 지금만큼은 그저 뿌듯하기만 했다.
º º º
키리아가 돌아오자 조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여러 상단주와 거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아가씨가 자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내내 쳐다봤다.
앉아 있던 상단주가 물러가자 조앤이 방문객 리스트를 넘겼다.
“아가씨, 다음은 크라운 상단과 라이츠 상단이에요.”
“들어오시라고 해.”
조앤이 문을 열자 두 상단의 상단주가 키리아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단주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키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소문 속 바로 그 주치의님! 오오….
공작님과 북부의 은인! 오오….
그런 표정으로 각자 열변을 토했다.
“독초 연고를 독점 거래해 주시면 저희 상단이 다년간 쌓아온 다양한 홍보전략을 총동원해서….”
“저희 상단은 북부에서 가장 많은 거래처를 갖고 있어 독초 연고가 보다 빨리 유통될 수….”
조건은 최대한 이쪽에 맞추겠으며 판매를 맡겨달라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키리아는 흐뭇하게 듣고 있었다.
클로버필드 상단주의 딸인 만큼 거래 조건을 제법 잘 따져볼 수 있었다.
‘오, 이 두 상단이 제일 마음에 드는걸? 그런데 어느 쪽으로 하지?’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할 때였다.
“잠시 실례합니다.”
크라운 상단주의 비서가 급히 들어오더니 상단주의 귀에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상단주의 표정이 급격히 곤혹스러움을 띠었다.
‘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키리아는 스멀스멀 불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