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41)

83화

로버트의 울화통에 다른 직원들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세상에.’

‘우리 메데이아 님이래.’

‘언제부터 친했다고.’

그에 아랑곳없이 로버트는 혼자서 메데이아와 친밀감을 마구 높여대고 있었다.

“이건 메데이아 님이 고안한 거야. 칼럼에 실은 적이 있어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응, 그래, 여기 있네!”

“어, 그렇지만 제품으로 나온 적은 없잖아요?”

“바로 그거야. 분명히 우리 메데이아 님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만든 게 틀림없어!”

독초 연고는 현재 수도 최고의 유행 아이템이었다.

만약 연고가 메데이아의 이름으로 출시됐다면….

‘욕만 먹던 우리 메데이아 님이 엄청난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건데! 구박받던 약제사가 사실은 흙 속의 진주였다! 그리고 그걸 일찌감치 알아본 로버트라는 일류 편집장…!’

분명 사장님도 엄청나게 칭찬했을 것이다. 높은 포상에 이어 고속승진도 꿈은 아니었겠지.

그걸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 배가 너무 아픈 로버트였다. 그래서 뜨거운 정의감이 솟구쳤다.

“불의를 보고 참으면 사내가 아니지.”

로버트는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북부로 간다. 가서 공작의 주치의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어! 도대체 어떻게 훔쳤는지 따져야지!”

북부까지 직접 간다고?

저 엉덩이 무거운 길치 편집장이?

직원들이 놀라워하며 웅성거렸다.

“그런다고 제대로 상대해 줄까요?”

한 직원의 회의적인 물음에 편집장은 흥! 자신만만한 코웃음을 쳤다.

“몰랐나 본데, 독초 연고 제조법은 특허가 걸려 있거든?”

“예에?”

“우리 메데이아 님 연구의 대단함을 내가 딱 알아보고 제안했었지. 특허 거시죠! 그랬더니 그러든지요, 라고 하셨단 말이야.”

사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고, 메데이아의 대답도 농담에 대충 응수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농담 직후 로버트는 ‘어쩌면 가능성 있을지도?’라고 생각했다.

잘만 되면 엄청난 반전 드라마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당사자 허락도 받았겠다, 바로 특허를 등록했지만….

메데이아는 그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연구에만 매진하는 데다 안티팬은 나날이 늘기만 했다.

결국 로버트는 헛수고했다고 여겨 그 일을 빨리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빛을 보다니!

“특허가 걸려 있으면 감히 짝퉁 따위가 함부로 나올 수가 없거든? 완전 독점이란 말이야.”

제국에서는 특허를 받은 기술과 제품을 엄격히 보호하기 때문이다.

“흐흐. 그러니 독초 연고의 홍보와 판매를 우리가 도맡는다면 우리 수익도 엄청날 거란 말이지…!”

리치골드 출판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외에도 다양한 레이블로 제국 출판시장을 꽉 잡고 있는 대기업이다.

제국 너머로 시장을 확대하고 싶은 리치골드 사는 독초 연고를 전폭 지원할 것이다.

물론, 메데이아를 서포트할 사람은 로버트 본인이 될 것이고!

“릴리 양에겐 미안하지만, 일은 바로잡아야지.”

한낱 사교계 명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자본의 힘을 보여주마!

“기다리십쇼, 메데이아 님. 이 로버트가 전부 바로잡겠습니다!”

메데이아를 위해 공작의 약제사에게 결투장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º º º

탁!

접힌 신문이 테이블 위로 세게 내쳐졌다.

신문을 내던진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도대체 놀브 후작은 일을 어떻게 한 거야!”

그가 버럭 성을 내자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흥분해 씩씩대는 그와 달리 여유롭고 우아한 몸짓이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바로 알렌스 황태자였다.

“교단에서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니, 이 유행은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유행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그 공작이 정말 이런 활약을 했다고? 신문기자 놈들이 단체로 돌아버린 게 아니고?”

“후후.”

잔뜩 성난 황제의 말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 알렌스가 작게 웃었다.

작은 눈물점이 그의 웃음에 묘한 매력을 더했다.

“거의 모든 신문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마물 공작이 마물로 사람을 지켰고 사라졌던 신목까지 불러들였다고….”

“그래. 나도 읽었다. 그게 모두 어떤 한 주치의 덕분이라고도 했지. 도대체 어떤 돌아버린 인간이 마물 공작의 옆에 붙어 있는 건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작은 분명 푸른달 밤에 마물들이 날뛰는 것과 관련이 있을 텐데. 아주 위험한 작자란 말이다.”

“목격자가 없잖아요.”

“그래, 그게 문제야….”

톡톡, 테이블 위 신문지를 검지로 두드리던 황제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알렌스를 쳐다봤다.

“지금 롤스 추기경과 대신녀는 북부 중앙신전에 있는 게 맞느냐?”

“아… 그렇네요. 오는 봄부터 북부에 있을 테죠.”

제국이 북부와 남부로 크게 나뉘어 있기 때문에 중앙신전 역시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있었다.

대신녀는 일정 주기로 두 개의 중앙신전에 번갈아 상주했다.

“좋아.”

황제가 턱을 문지르며 흡족한 표정을 띠었다.

“롤스 추기경이라면 믿을 수 있지. 너와도 친분이 있고 말이다.”

“잘 아는 분이죠.”

“사람을 보내 추기경을 돕도록 해야겠다. 롤스 추기경이라면 내 뜻을 잘 알아듣고 좋은 수를 내겠지.”

그러자 알렌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가 가면 안 될까요?”

“네가?”

“네. 북부 공작과 그의 주치의가 퍽 흥미로워서 말이죠.”

그러자 황제는 꾸짖는 듯 엄한 표정을 했다.

“무슨 소리냐? 이게 장난인 줄 아느냐? 안 된다.”

공작과 얼굴 모를 주치의만 생각하면 속에 뒤집어질 것 같은데, 태평하게 흥미로워하는 황태자가 괘씸한 황제였다.

그래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 굳은 결심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쿨럭!”

“알렌스!”

알렌스가 심한 기침을 하며 몸을 숙였다.

“콜록콜록! …전 괜찮습니다, 아버지.”

알렌스가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싱긋 웃었다.

그러자마자 그의 웃는 입술 사이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장면인데도 황제는 뜨악 비명을 질렀다.

“안 괜찮지 않느냐아! 아이고 내 아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쯤이야 인간의 생리현상 같은 것이죠.”

“각혈은 생리현상이 아니다!”

안절부절.

황제는 알렌스의 피를 장인의 수가 놓인 호화로운 제 소매로 닦고 서둘러 시종을 불러 알렌스의 몸을 챙기게 했다.

황태자 알렌스는 황제의 늦둥이 아들이자 유일한 후계자다.

옅고 부드러운 금발에 푸른 눈.

우아하고 세련된 외모와 묘한 매력을 더하는 눈물점은 그야말로 동화 속의 왕족.

하지만 몸이 너무 약했다.

인마전쟁 때 그의 몸에 마기가 침투한 이후로, 알렌스는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허약해졌다.

“콜록….”

알렌스는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며 가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요양을 겸해서 대신녀의 축복을 받으러 가고 싶었는데요… 불허하신다니 어쩔 수 없군요. 콜록콜록.”

“그, 그런 뜻이 있었느냐? 진즉에 말했어야지!”

황제는 알렌스의 등을 살살 토닥이며 냉큼 말을 바꿨다.

“다녀와라! 네가 다녀와!”

“감사합니다, 아버지.”

즉시 기침을 멈춘 알렌스가 입가에 피를 닦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그 주치의가 어떤 사람인지 기대되네요. 이름이….”

알렌스의 시선이 신문으로 향했다.

“키리아라고 했죠?”

의미심장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º º º

“누나 이름이다….”

침대에 앉은 리안은 신문을 보며 헤 입을 벌렸다.

늘 침실에 머무르는 리안조차도 소식을 접할 정도로 북부 공작과 주치의의 소문은 시끄러웠다.

“헤헤.”

리안은 신문 기사에 적힌 ‘키리아’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소중히 더듬었다.

키리아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기에, 기사 속 키리아가 바로 제 누나라는 것을 아는 리안이었다.

“누나 보고 싶다….”

그때였다.

“너도 신문을 보고 있었느냐?”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이 저녁식사를 실은 트레이를 직접 끌고 리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요즘 그는 아무리 바빠도 리안과 꼭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아, 아버지도 보셨어요?”

리안은 당황하며 신문을 접어 옆으로 감췄다.

하지만 별 보람 없는 행동이었다.

마이언은 이미 신문을 다 읽은 후였으니까.

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요즘 하도 난리여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 나오는 주치의 이름이 키리아더구나.”

“……!”

“혹시 내가 아는 키리아는 아니겠지…?”

“그, 그럼요.”

리안이 허둥지둥 긍정했다.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겠죠.”

“그 녀석도 북부로 간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누나는 약제사도 아니고 실력도 별로 없잖아요. 이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어요.”

누나 미안.

“그건 그렇지….”

미간의 주름과 함께 백작의 의혹이 깊어졌다.

그럴수록 리안의 가슴이 졸아들었다.

‘아버지가 알면 누나를 당장 데려오려 할 텐데!’

백작은 헷갈린다는 듯 고민하고 있었다.

“역시 키리아라는 주치의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네에? 그, 그럴 필요 있을까요? 별로 상관없잖아요.”

“아니지. 네 누나라면 당장 불러들여야지 않겠느냐. 지금이야 화제가 되지만 벌써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

“당장 사람을 시켜야겠군.”

마이언이 하인을 부르기 위해 벨을 누르려 했다.

리안은 다급해졌다.

어쩔 수 없다.

‘아버지 미안해요!’

리안은 이를 질끈 악물고 무릎 위에 올려뒀던 밥상을 엎었다.

그 와중에 시트가 더러워지지 않게 멀리 던지는 건 잊지 않았다.

와장창!

“아버지 너무해!”

“리안?!”

착하기만 했던 아들의 돌발행동에 마이언은 깜짝 놀랐다.

“항상 일만 신경 쓰고,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죠?!”

리안은 잠옷의 단추를 툭툭 뜯어 앞섶을 벌렸다.

그러자 아기 티가 남아 있는 리안의 뱃살이 드러났다.

동시에 복부의 반을 뒤덮은 석화도.

“……!”

순간 눈을 부릅뜬 마이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리안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어… 언제 이렇게… 악화된 것이냐?”

“…좀 됐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가족들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이 사실을 숨겨왔던 리안이었다. 누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나가 매주 약을 보내주고 있지만, 이젠 그 약으로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내가… 몰랐구나. 일만 하느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무너지는 듯한 마이언의 표정에 리안은 자신의 행동을 조금 후회했다.

“죄송해요….”

“아니, 아니다. 네가 사과할 게 뭐가 있느냐. 앞으론 너를 더 살피마.”

마이언이 서투르게 리안을 끌어안았다.

리안은 그의 품에 안기고서야 자신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석화를 마주보기 두려운 듯이 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누나, 빨리 돌아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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