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41)

82화

[이런 유행 열풍에도 불구하고 독초 연고를 거부하는 곳이 있으니까요.]

그곳은 바로.

[신전 인근의 상점가예요. 홍보 포스터조차 붙이지 못하게 했답니다.]

“신전이라.”

키리아는 중얼거리며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신전 인근의 상점가라면 아무래도 신전의 입김이 가까이 닿는 곳이겠지? 아니면 신전의 관리를 받거나.”

어찌 됐든 신전이 이 일을 아니꼽게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남부에서 신전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신전에 납품하는 업체라는 인증마크인 세인트 워런트를 받으면, 마물의 침도 성수처럼 구매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

그런 신전의 눈 밖에 난다면….

“음… 릴리의 사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유행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릴리의 경력에 독이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건 릴리의 선택이었으니까, 걔도 아마 각오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자꾸만 불편했다.

불편함의 이유가 바로 릴리를 위하는 우정 때문임을 깨닫지 못한 채 키리아는 찌푸린 얼굴을 갸우뚱거렸다.

º º º

“고백할 수 없는 상대에게 고백하는 방법이라 하셨습니까?”

제논의 이야기를 들은 베른울프 백작의 목소리가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높아졌다.

제논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아는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직접 마음을 전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백작의 얼굴에 웃음기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제논의 시선이 닿기 직전에 싹 갈무리됐다.

“어떠한 수로도 직접 고백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마음은 전하고 싶다라….”

톡톡, 제 이마를 두드리며 고심하는 백작.

그를 바라보는 제논은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백작이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그게 뭐지?”

“상대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제논의 기대감이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푸쉬쉬 꺼졌다.

“내가 바랐던 대답이 아닌데.”

“주군. 사람들이 고백을 언제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제논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상대방을 마음에 품었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겠지.”

“아니요.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았더라도 고백을 하기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째서?”

“거절이 두려우니까요.”

그에 제논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키리아가 루쿠스 산에서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마음을 고백하길 미루지 않았던가.

백작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상대방 역시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고백에 대한 두려움은 확실히 낮아진다고 백작이 말했다.

“때로는 마음이 뻔히 보이는데도 망설이는 상대가 답답해서 먼저 고백해버리는 화끈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

그래도 제논은 영 마뜩잖았다.

그는 망설일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오히려 키리아가 자신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 제논을 진정시키듯 백작이 부드럽게 누르는 손짓을 했다.

“게다가 냉큼 고백만 하면 어떡합니까. 상대방은 어떡하고요?”

“…….”

제논은 제 입술을 천천히 쓸며 고민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렇군. 내가 경솔했어.

‘리안 경이 있었지.’

키리아에게 소중한 사람은 아직 제논이 아니었다.

바로 리안 경이라는 미지의 사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을 해 봐야 키리아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다.

“고백에만 얽매였다가 상대방에게 부담만 주게 된다면, 그보다 최악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니 우선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백은 그다음 문제고요.”

“일리 있다. 이해했어.”

제논의 눈동자가 조용한 투지로 불타올랐다.

메데이아도 인정한 아주 잘 생기고 매력적인 리안 경….

‘반드시 그를 뛰어넘어야 해.’

굳게 다짐한 제논은, 의외로 쓸만한 것 같은 베른울프 백작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마음을 얻는 효과적인 방법, 혹시 아는 게 있나?”

“음….”

백작은 제논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택에서 내내 키리아 양을 졸졸 따라다니던 주군….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유혹적인 눈웃음을 치시던 주군….

그리고 의도적이 아닌, 성격에서 우러난 돌직구.

“그냥 하시던 대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내 얘기가 아니라,”

“예. 아는 분 이야기죠.”

제논은 백작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고 그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음을 알아챘다.

못마땅하긴 했지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고민에 대한 답은 찾았으니 만족했다.

“조언 고맙다. 이제 가봐.”

제논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가져온 책에 다시 집중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볼 차례였다.

그를 바라보던 백작이 제논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했다.

“주군. 그건 마계의 힘에 대한 책입니까? 옆에 있는 건 아티팩트 개조에 대한 것이군요?”

“맞아.”

“불법 아티팩트 공방 때문에 그러십니까? 후작이 사용한 방법이라면 제가 계속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굳이 수고하시다니요.”

제논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모르겠나, 백작?”

“예?”

“후작은 마법사가 아니야. 그런데도 어떻게 아티팩트를 그런 식으로 개조했을까?”

“그런 식이라면…?”

“마물을 끌어들이는, 마계의 힘을 지닌 아티팩트 말이다.”

“……!”

제논이 시선을 들어 백작을 바라봤다.

“분명 후작을 뒤에서 움직인 누군가가 있다.”

“혹시 일전에 신목의 정령님과 이야기했던… 마계의 문을 움직인 배후일까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건,”

제논의 붉은 눈이 적개심을 띠었다.

“상대가 흑마법사거나… 혹은 마족, 둘 중 하나라는 거야.”

“으으음….”

백작이 침음했다.

전부 마계로 돌아간 줄 알았던 마족이 남아 있었다면?

남아 있는 이유는 결코 사람들에게 이롭지 않을 터였다.

이참에 백작에게 다 말해두려는 듯 제논이 말을 이었다.

“후작은 메두사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네 다리의 치료를 두고 키리아에게 농락만 당했으니까.”

“예. 저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후작은 처음부터 버림패로 이용당할 말이었다는 얘기지.”

“자, 잠깐만요 주군.”

엄청난 소리라는 듯 백작이 당황하여 말했다.

“감히 제국의 후작을 이용만 하고 버리다니요. 그 정도라면 어쩌면 후작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중에도…?”

제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후작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허, 허어….”

백작이 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한동안 입을 다물던 백작이 돌연 씩 호기롭게 웃었다.

“상대할 맛이 나겠군요!”

“그런가.”

제논도 빙그레 웃었다.

“북부의 저력을 보여줄 기회 아닙니까. 언제든 와보라 그러십시오.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고로 주군, 부탁드립니다.”

“뭘 말이지?”

“뭐긴요. 주군의 생일 연회 말입니다.”

제논의 표정에 껄끄러움이 묻어났다.

“귀찮은데.”

“귀찮아하시면 안 됩니다! 북부 귀족들의 충성을 다시금 받아내셨으니, 오는 봄에는 확실히 알리셔야죠. 북부의 왕이 돌아왔다는 것을요.”

넓은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의 생일 연회에는 남부의 귀족들도 대거 참석하고는 했다.

인마전쟁 후에는 작은 연회조차 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제논의 생일 연회는 인마전쟁 후 공작이 정식으로 여는 첫 연회였다.

제논보다 백작이 기대에 들떠 있었다.

“아주 성대하게 여시는 겁니다. 남부 놈들은 물론이고, 대신녀도 초대하시죠!”

대신녀.

나를 교단에서 퇴출한 그녀가 과연 어떻게 나올까.

제논은 그것이 궁금했다.

º º º

“호외요, 호외―!”

신문 파는 아이가 거리를 뛰어가고, 행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신문을 구매했다.

가던 길도 멈추고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남부 수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신문뿐만 아니라 온갖 소식지에서도 한 가지 소식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었다.

바로 마물 공작의 복귀 소식.

“사냥대회에서 고블린들을 혼자 물리쳤다고?”

“게다가 마물을 자유자재로 부려서 귀족들을 전부 구했대!”

“북부 귀족들이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는군.”

그리고 공작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있었다.

“이 모든 게 공작이 데려온 주치의 덕분이라는데?”

“독초 약제사라고?”

“독초 연고가 아니었다면 많은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데… 사실인가?”

마물 공작의 복귀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독초를 다루는 약제사라는 특이함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에이, 다 과장된 거야. 독초가 독초지, 어떻게 포션만큼이나 효과가 좋겠어?”

“그럼 그럼. 신성 모독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호기심이 일었다.

모든 신문이 같은 얘길 하는 걸 보면 공작과 그 주치의에 대한 기사가 허구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마치 이런 여론의 호기심을 예상한 듯한 광고가 잡화점 전면에 붙었다.

“어? 레이디 릴리잖아?”

“이번엔 어떤 광고를 했을까?”

가까이서 광고지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사교계만이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도 인망 높은 레이디 릴리가 독초 연고를 들고 있지 않은가!

[천사가 사랑하는 연고. 이젠 아프지 말고, 바르세요.]

심지어 이런 광고 문구까지.

“독초 연고라니, 진짜 있는 거야?”

“레이디 릴리까지 이러니까 좀 궁금하긴 한데….”

사람들이 슬금슬금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제국 수도에는 때아닌 독초 연고 열풍이 불게 됐고, 마물 공작과 그 주치의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물론 신전 인근의 상점가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열풍을 아니꼬워하는 사람이 둘이 더 있었다.

첫 번째는 다름 아닌,

“남의 것을 누가 멋대로 파는 거야! 응? 천사라고 이래도 돼?!”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편집장 로버트.

로버트는 릴리의 독초 연고 광고지를 쥐고 분통을 터뜨렸다.

“독초 연고는 우리 메데이아 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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