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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141)

81화

키리아의 눈가에서 아쉬운 듯 손을 뗀 제논이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이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할 테니까요.”

“머, 먼저 말한다고요…? 설마 지금 당장 스승님한테 고백하시려는 건….”

난감한 기색을 보이는 키리아.

제논의 입술이 멈칫했지만, 이윽고 굳은 결심으로 움직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키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침내 제논이 뒷말을 꺼냈다.

그대입니다.

“…….”

몇 초 동안 키리아의 눈이 깜박였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왜 말씀을 안 하세요?”

“…네?”

말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라니까요.

“왜 자꾸 말을 하다 마세요? 퀴즈도 아니구. 60초 후에 공개하실 거예요?”

“……?”

뭐지?

제논은 자신의 목을 손으로 짚으며 뻐끔거렸다.

“큼, 큼….”

목을 가다듬고, 이번엔 더 바짝 정신을 차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내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바로…?”

“바로…!”

제논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목이 막히는 듯하자 그는 억지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뒷말을 꺼낼 수 있었다.

“바로 메데이아입니다!”

“…….”

키리아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제논은 당황했다.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꼭 무언가가 키리아를 향한 고백을 방해하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던 제논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깨달음이 관통했다.

“……!”

왕의 맹세!

“젠장.”

맞아, 그랬었지.

예전에 침실로 숨어 들어온 키리아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무심코 왕의 맹세를 했던 제논이었다.

키리아에겐 결혼의 결 자도 꺼내지 않겠다고.

결혼의 결 자라니.

애매한 말이다.

‘그래서 맹세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건가?’

고백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게 분명했다.

“망할.”

“공작님…?! 저, 저한테 욕하시는 거예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하.”

사정을 모르는 키리아는 제논이 답지 않게 욕을 연이어 읊조리자 놀랐다.

“걱정마세요. 안 이를게요. 약속. 네?”

키리아는 그의 얼굴을 기웃기웃 살피며 평소답지 않은 그를 달래려 애썼다.

왕의 맹세 때문에 짜증스러운 와중에 그 모습이 귀여워서, 제논은 한숨을 삼켰다.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왕의 맹세를 누르고 고백하고 말겠다.

º º º

말로 할 수 없다면 글로 전하자.

제논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편지를 썼다.

처음엔 구구절절 내용이 길었지만 전부 버리고 한 문장만 썼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키리아, 그대입니다.]

수십 개 문장이 함축된 단 한 줄의 글이었다.

고백이 적힌 쪽지를 쥐고, 제논은 굳은 얼굴로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키리아를 바라봤다.

그녀와 마주쳤을 때, 키리아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제논은 그대로 키리아를 스쳐 지나가고 싶었다.

“이게 뭐예요?”

하지만 키리아가 쪽지를 받자마자 바로 펴보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쪽지의 내용을 같이 보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메데이아입니다.]

아주 기가 막히게 중요한 단어만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키리아의 눈빛은….

“…….”

뭐 어쩌라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윽.”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제논은 키리아에게서 쪽지를 휙 빼앗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곧바로 이어진 2차 시도.

제논은 키리아와 함께 식사를 할 때 또다시 쪽지를 건넸다.

쪽지를 읽은 키리아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성공인가?’

하지만 키리아는 황당해하는 얼굴로 쪽지를 제논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진심이세요?”

[앞의 건 전부 잊어주십시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로하넨이니까.]

“…….”

제논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계속된 3차, 4차, 5차 시도.

[자각하기 전부터 내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바로 앨마….]

[내가 평온함을 느끼는 건 오직 가울의 손을 잡았을 때….]

[베른울프 백작을 독점하고 싶습니다….]

꾸깃!

제논은 키리아에게서 회수한 많은 고백 쪽지들을 마구 구겨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하….”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키리아는 다행히 장난으로 여겨주는 것 같지만….

제논은 알아채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기 어린 눈동자 한편에 자리 잡은 동정심을.

‘나라도 웃어줘야겠지….’라는 그녀의 측은함을.

“빌어먹을 왕의 맹세.”

측은해하는 키리아의 눈빛이 수치스러워서 제논은 직접 해명하고자 했었다. 왕의 맹세 때문이라고.

하지만 맹세의 힘은 그마저도 막아버렸다.

결국 고백은 물론 맹세를 언급하는 일도 가로막힌 상황.

무언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제논에겐 연애 문제를 상담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건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의지가 되는데 말이다.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작님,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반갑군요.”

베른울프 백작과 마주쳤다.

제논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유부남이었지.”

“그렇습니다. 1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어디, 제 화려한 연애담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관심 없어.”

제논은 백작에게 들키기 전에 들고 있던 책을 얼른 다시 꽂았다.

하지만 백작이 먼저 보고 말았다.

“아니, 주군. 이건…?”

[연애 초보들을 위한 마담 러브의 조언 1권: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고백은 무서울 때!]

책을 내려다보던 그가 제논을 쳐다봤다.

곰처럼 작고 동그란 눈이 더욱 땡그래졌다. 콧구멍이 기분 나쁘게 씰룩였다.

제논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올바르지 않은 자리에 꽂혀 있기에 내가 다시 바로잡은 것이다. 그뿐이야.”

그러며 도망치듯 책상 앞에 착석했다.

백작이 실실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죠?”

“난 아주 평온한 상태야.”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 입 무거운 건 주군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게다가 공작성에 돌아가시면 누구와 상담할 수 있겠습니까? 천생 신관인 로하넨하고요? 아니면 주군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앨마하고요?”

“…….”

백작은 제논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유들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한참 망설이던 제논은 결국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심정.

그렇지만 제 마음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은 백작이 아니라 키리아였기에 제논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건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º º º

키리아는 공작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불법 아티팩트에 대한 자료 일부를 마탑주에게 넘겼다.

물론 공작인 제논의 허가를 받았고,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티팩트는 마탑의 승인 하에 출시되는 마도구니까.

그러니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불법 아티팩트가 있다면 마탑에 알려주어야 옳았다.

‘보답으로 공작성에 마탑의 마법사가 임시 연구원으로 오게 됐으니 개이득이지.’

공작가에서 아티팩트를 만들어도 된다는 마탑의 허가나 다름없었다.

아티팩트는 주로 마탑에서 만들어지지만, 마탑의 승인이 있다면 다른 곳에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기관이 아닌 한 가문에게 허가를 내준 전례는 키리아가 알기로 없었다.

공작성이 최초다.

이런 파격적인 대우가 가능했던 건 물론 마탑주인 셜론 덕분.

“쯧쯧. 말세로다. 이런 사악한 게 만들어지다니. 시장에 퍼졌다면 마탑의 명성에도 금이 갔을 것이야.”

셜론은 불법 아티팩트 단도를 이리저리 살피며 혀를 찼다.

“개조가 더욱 어렵게 아티팩트를 보완해야겠구먼. 아이고, 바쁘다. 그런데 키리아 양.”

“네?”

“여전히 마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소?”

“없어요.”

“흥….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척에서 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오. 마탑에 아주 오고 싶을걸?”

새치름하게 흥흥거린 셜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리아는 마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퍼뜩 붙잡았다.

“아! 셜론 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허허, 역시 마탑으로 오시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으… 전서구가 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나요?”

제논에게 정체를 들킬 뻔한 후, 키리아는 전서구가 문제가 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전서구는 키리아가 어떤 이름으로 활동하든 상관없이 그녀의 기운을 찾아 편지를 배달할 테니까.

‘만약 공작님이 메데이아에게 보낸 전서구가 나한테 오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게임 끝. 더 이상 잡아뗄 수가 없는 것이다.

여태까지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셜론이 제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마도구, 전서구 아티팩트는 우리 마탑의 대표작이오. 파괴하지 않는 한 수신인을 알아보지 못할 일은 없소.”

“으….”

“하지만 잠깐이라면 속일 수 있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면 말이오.”

“오…!”

키리아는 반가워하며 주세요, 하듯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변신 마법 쓸 수 있게 아티팩트든 스크롤이든 뭐든 빌려주세요!”

“맨입으로?”

그 말에 키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뒤쪽에 준비해 두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고…?”

의아하게 바구니를 열어 본 셜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에는 키리아가 주방에 부탁해 만든 닭죽이 있었다.

꿀꺽.

군침을 삼킨 셜론은 키리아를 의식하고는 흠흠 점잖은 척을 했다.

“이, 이런 음식은 취향이 아니지만 성의를 거절하면 안 되겠지. 나 같은 늙은이들에겐 치킨이라는 것보다 이쪽이 더 먹기 편하고.”

“그렇군요?”

반응을 보기 위해 준비했던 건데 잘 됐다.

키리아는 치맥 가게에 백숙과 닭죽 메뉴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셜론은 새파란 보석이 장식된 반지를 건네주었다.

“변신 마법은 고도의 것인데다 악용을 우려해 아티팩트로 만드는 걸 금하고 있소. 대신 이걸 드리지.”

“이건…?”

“잠깐 동안 착용자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각 마법이요.”

“오오!”

“다른 마법과 부딪히면 금방 풀리는 게 흠이지만, 전서구를 속이는 정도라면 충분할 거요.”

“네,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셜론이 떠나자 키리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하나 해결. 그럼 이제….”

키리아는 책상에 앉아 편지봉투를 들었다.

“편지를 읽어볼까?”

남부로 돌아간 릴리가 보내온 편지였다.

서두부터 사인지를 약탈당했다며 징징거리고 있었다. 키리아는 무시하고 다음 단락을 읽었다.

“오, 황립의료원에서 나온 모양이네.”

남부에서는 황립의료원의 수장을 꺾어버린 건 바로 독초 연고라는 식의 와전된 소문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지금이 독초 연고를 팔기에 좋은 기회랍니다! 우후후.]

릴리의 글이었다.

키리아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다만 불안한 점은, 아무래도 이 유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는 거예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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