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41)

80화

후하후하.

릴리는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던 사인지를 드디어 발견해내어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마물이 들이닥친 난리 통 속에서 그걸 잃어버린 걸 알았을 때 어찌나 사는 재미가 없던지!

꼼짝없이 남부로 돌아가는 날이 되어서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신이여, 당신은 절 버리지 않으셨군요!

“흠흠.”

릴리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제논의 앞으로 총총 다가왔다.

“어머나, 공작님. 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사인지를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슥….

제논이 릴리의 손길을 피해 사인지를 옆으로 치웠다.

“…공작님?”

“…….”

“제 것이랍니다…?”

그럴 것 같다.

알지만 제논은 사인지를 순순히 넘겨줄 수가 없었다. 아니, 싫었다.

그래서 슥, 슥, 휙! 릴리의 마수를 연속해서 피했다.

나중엔 제 머리 위로 사인지를 들어올려 릴리의 손이 닿지도 못하게 했다.

“공작님? 왜 이러실까요?”

화를 꾹 참느라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릴리.

제논은 자신의 행동이 유치한 걸 잘 알고 있었다.

알지만 주기 싫은 걸 어떡하나!

메데이아의 친필 사인이라니,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자신에게도 없는 희귀 아이템인데!

사인을 달라고 하면 꼭 그런 걸 목적으로 편지를 보낸다는 오해를 살까 봐 차마 하지 못했단 말이다.

사실은 엄청 갖고 싶었는데….

“…증거는.”

“네?”

“이게 그대의 것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북부를 다스리는 공작의 입에서 나온 유치한 땡깡!

경악하는 릴리의 앞에서 제논은 그만 눈을 딱 감아버렸다.

창피스럽지만 후회는 없다. 이걸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런데 뒤이어 나온 릴리의 말에, 제논이 눈을 팟 떴다.

“증거는 없지만 증인은 있는걸요! 그건 키리아 님이 제게 주신 거니까요!”

“…키리아가?”

“그럼요. 키리아 님이라면 증명해주실 거예요!”

“확실합니까? 이걸 키리아가… 이런 색을 가진 만년필로 썼단 말입니까?”

“이런 색이요? 아.”

검푸른 잉크를 올려다보며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예쁜 만년필이었죠. 맞아요. 딱 저 잉크 색깔이었어요.”

“…….”

키리아가 메데이아의 사인을 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혹시.’

“이제 돌려주실… 공작님?”

제논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사인지는 그대로 가진 채였다.

“어, 어머, 어머머! 공작님?!”

등 뒤로 들리는 릴리의 경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때마침 식당으로 돌아온 제논과 마주쳤다.

“공작님, 점심 드시려고요?”

“키리아.”

제논이 떨리는 눈동자로 키리아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가 좋아할 소식이 있다고 했죠? 지금 함께 가줬으면 합니다.”

“아, 네. 좋아요. 기대되네요!”

키리아는 씩 웃고는 얼른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º º º

“우와….”

키리아는 놀브 후작의 불법 아티팩트 개조 공방을 감탄하며 둘러봤다.

“이것들이 다 아티팩트예요? 불법으로 개조한?”

“그렇습니다. 위험한 물건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손대지는 마십시오.”

“앗, 네.”

무심코 물건에 손대려던 키리아는 얼른 손을 거뒀다.

“후작이 개조에 쓴 기술을 우리가 입수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미 수집해서 정리 중입니다.”

“우와아.”

키리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거기에 마탑에서 기술 협력까지 받으면 공작성 오리지널의 아티팩트도 만들 수 있겠네요! 엄청 돈이 될 거예요! 무슨 아티팩트가 잘 팔릴까요?”

깨어나라, 사업 세포!

키리아는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즐겁게 고민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제논이 문득 표정을 굳혔다.

“…그대가 자금을 원하는 건 메데이아의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했죠.”

“맞아요. 스승님의 빚이 아주 억 소리나거든요.”

“빚을 다 갚으면 어떡할 겁니까?”

“다 갚으면요? 음….”

키리아는 제 입술을 누르며 눈동자를 위로 데굴 굴렸다.

지금의 문제만 생각했지, 이후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확실하게 원하는 건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죠. 리안이랑.”

제논이 멈칫했다.

“…리안 경, 말입니까. 일전에 편지에서 언급됐던?”

“리안 경, 아 맞아요. 그렇죠. 기사님이죠. 하하.”

가상의 역할을 입 밖으로 꺼내려니 영 부끄럽네.

키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에 제논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 됐다.

“리안 경은 그대의… 소중한 사람입니까?”

“부끄럽게 그런 걸 물으세요?”

새침하게 대답했지만 인정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키리아는 부끄러움을 누르며 시원하게 말했다.

“맞아요. 리안은 제가 처음으로 소중하게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이에요. …공작님?”

키리아가 제논의 얼굴을 보고 놀라 가까이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팔이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은데.”

“리안 경의 레이디는 메데이아라고 했었죠. 기억납니까?”

키리아의 걱정에 대답하는 대신 제논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라, 그랬던가?

키리아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네… 에. 그랬었죠…?”

“어째서 레이디가 따로 있는 기사와의 미래를 꿈꾸는 겁니까, 그대는.”

“그, 그건….”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강풍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구 흔들렸다.

잘은 몰라도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키리아는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제논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말해 볼까요. 어째서 그대와 그대의 스승이 같은 기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네, 네?”

“그건 그대가….”

심호흡을 하듯 한 번 입을 다물었다가, 마침내 입 밖으로 뱉는다.

“그대가, 메데이아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

철렁!

일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흔들리던 시선까지 딱 멈춘 키리아에게, 제논은 천천히 사인지를 꺼내 보였다.

“릴리 양이 그대에게 받은 사인지입니다. 메데이아의 사인이 있더군요.”

“아…!”

맙소사, 릴리!

이 칠칠이! 바보! 멍텅구리 천사!

속으로 마구 욕을 하는 키리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논의 침착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이 오늘따라 조금 무서웠다.

물론 정체를 숨겨야겠다고 더욱 다짐하게 된 건 메데이아를 향한 그의 감정을 알아버려서다.

공작님이 나의 영원한 팬, 숲지기로 남아 있길 바랐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으로, 정체를 부정하고 싶은 강력한 이유가 지금 생겨버렸다.

‘화… 화난 건가? 배신감을 느끼는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콱 막혔다. 가슴 안쪽이 마구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배신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렇지만 공작님이 그렇게 생각해서 날 미워하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은 싫어. 진짜 진짜 싫어.’

이 거부감의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할 틈은 없었다. 키리아는 인생 최고의 연기력을 끌어올렸다.

“아아, 이거요?”

졸아드는 속과 달리 태연히 웃으면서 사인지를 받아들었다.

“스승님 사인을 흉내 내본 거예요. 멋있죠?”

“…흉내 낸 거라고요?”

“네. 진짜 팬인 공작님을 속일 정도로 똑같았어요?”

“…….”

제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굳이 메데이아의 사인을 따라했습니까?”

“음, 그, 그거야… 제 사인은 별로 멋있진 않거든요.”

실제로 메데이아의 사인은 화려하고 멋있게 연습했다.

차가운 도시의 독초 여인 메데이아답게.

반면 본캐라고 할 수 있는 키리아 본인의 사인은 그저 이름을 대충 흘려 썼을 뿐이다.

그야 평범한 귀족 영애의 사인은 쓸 일이 별로 없는걸.

“릴리가 절 되게 추켜세우더라고요. 그래서 멋있는 사인을 해주고 싶었나 봐요, 저도 모르게….”

“메데이아가 그대보다 멋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잖아요? 악플조차 메데이아의 연구를 막지 못해요. 항상 원하는 인생을 살죠.”

키리아는 조금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작은 연구 하나 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걸요.”

집에서 연구를 할 때면 독초가 아닌 척, 재능 없는 사람의 보잘것없는 실험인 척 온갖 시치미를 떼곤 했다.

“그러다 혼기가 차면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도 시킬 수 있고요. 그러면,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마다 눈치를 봐야 하고….”

키리아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어? 어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지만 말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진짜 소중한 환자 한 명 치료도 못 했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전 거부할 수가 없잖아요. 나도 메데이아처럼 살고 싶은데. 나 싫어하는 사람들 싹 무시하면서.”

눈에 바짝 힘을 주었지만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버렸다.

“……?!”

제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양손을 어정쩡 들어 올린 채, 키리아를 어루만져 달래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키, 키리아?”

“아 씨, 진짜아….”

뚝, 뚝.

안구가 고장 났나, 눈물이 의지와 다르게 계속 쏟아졌다.

그럴수록 제논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키리아의 얼굴엔 분노가 들어찼다.

그녀가 제논을 째려봤다.

“이게 다 공작님 때문이야!”

“미, 미안합니다. 정말로. 이러려던 게 아닌데…!”

“왜 사람을 그렇게 난감하게 해요? 네?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아니요.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울지 마십시오.”

쩔쩔매던 제논이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키리아의 눈가를 닦았다.

그 와중에 키리아는 자꾸 나오려는 콧물을 훌쩍훌쩍 들이켰다. 쪽팔리게 진짜!

패앵!

키리아는 손수건을 휙 뺏어 대차게 코를 풀어버렸다.

움찔한 제논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시원하게 하십시오.”

“이거 제가 가질 거예요. 새로 하나 사시든지 하세요.”

“내가 아끼는 건데요.”

“아, 싫다고요!”

잠시 후.

본의가 아니긴 해도, 눈물 콧물을 한바탕 쏟아낸 덕에 키리아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아무튼.”

흑역사를 갱신하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챙길 건 챙겨야지.

키리아는 확실히 말했다.

“전 스승님이 아니에요. 또 이렇게 나오시면 공작님이 스승님 좋아하는 거 다 일러바칠 거예요.”

“그러십시오.”

“…네? 일러도 상관없어요?”

제논은 키리아의 발간 눈가에 남아 있는 물기를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네. 상관없습니다. 그대는 이를 수 없을 테니까.”

“에에? 제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시는데요?”

“왜냐하면….”

제논은 그동안 몰랐던 키리아의 속내를 듣게 된 순간, 굳게 다짐했다.

내가 그녀를 지킬 거라고.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하게 해줄 거라고.

그래서 결심했다.

바로 여기서 키리아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로 말이다.

더는 미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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