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북부의 수도 펠리온은 놀브 후작이 공략하기 위해 공을 들이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그의 타운 하우스가 있었다. 호화로운 가구와 장식으로 가득 채운 곳.
그러나 지금은 더없이 황량했다.
곳곳의 가구와 예술품에는 흰 천이 씌워져 있다. 곧 다른 곳으로 옮겨져 처분될 것들이었다.
그렇게 하얀 실내 한가운데에, 놀브 후작이 망연히 앉아 있었다.
손에는 그의 재산이 모두 란페르세 공작에게 양도된다는 증서 한 장.
꼴랑 이 종이 한 장이 그에게 남은 전부였다.
누가 알았을까? 고작 말 한마디로 그동안 쌓은 가문의 재산을 이렇게 홀랑 날리게 될 줄이야.
“이건 꿈이야….”
놀브 후작의 마른 입술에서 힘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요 며칠 사이, 그는 온갖 발악과 부정, 분노와 좌절을 번갈아 겪느라 살이 쪽 빠져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후우….”
이제는 이 악몽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재산뿐만이 아니다.
아마 지금쯤 황제도 북부 사냥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됐겠지.
공작과 그 주치의에게 농락당한 자신을 황제가 옆에 둘 리 없다.
황립 의료원의 수장직은 물론이고 황제의 밑에서도 내쳐질 건 자명한 일.
영락없는 밑바닥이구나.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던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풍화된 듯 흐릿했던 그의 눈이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밑바닥으로 떨어졌어도 난 일어날 수 있다. 일어날 수 있고말고.”
나에겐 ‘그것’이 있으니까.
후작은 몸을 일으켜 지하실로 내려갔다.
술이 담긴 오크통과 오래된 술병들이 저장된 평범한 지하실로 보였다.
하지만 후작이 술병 진열대의 가장 아래쪽을 누르자 벽인 줄 알았던 곳이 열리며 숨겨진 공간을 드러냈다.
후작이 들어서자 비밀 공간의 불빛이 밝혀지면서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흐흐…. 이것들이 있으면 난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어.”
벽면 가득 걸려 있는 여러 종류의 도구들. 몇 개의 책상 위에는 온갖 공구와 실험 도구들이 있었다.
후작은 책상 서랍을 열어 단도를 집어들었다.
평범한 단도처럼 보이는 호신용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개조된 지금은 호신용이 아닌 살상용 아티팩트가 됐다.
한 번만 찔려도 극심한 고통 속에 온몸이 타들어간다.
이곳, 후작이 소유한 불법 아티팩트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법사도 아닌 내가 이런 걸 만들 수 있다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하겠지.”
물론 후작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아티팩트들이 재산을 다시 모아줄 것이라는 점과….
“내 복수를 위한 도구라는 점.”
후작의 얼굴에 살의가 가득했다.
그는 단도에 이어 기척을 숨기는 은신 아티팩트까지 챙겼다.
키리아라는 계집이 공작저의 어느 방에 묵고 있는지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곧장 이 단도를 심장에 꽂아주리라.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친 놀브 후작은 비밀 공간을 빠져나왔다.
º º º
후작은 아티팩트들을 이용해 공작저에 이어 키리아의 방까지 어려움 없이 침입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역시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저택의 경비도 별것 아니다.
후작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달빛이 비치는 침대 위로, 복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드리운 키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새근새근.
평온한 숨소리에 따라 그녀의 둥근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후작은 증오에 찬 눈으로 키리아를 노려보며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끝이다!’
날카로운 단도가 아래로 내려꽂히려는 바로 그 순간.
탁!
가죽 장갑을 낀 누군가의 손이 후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손목까지 붙잡혔다.
그런데 손목을 붙잡은 손이 이상했다. 꼭 마물의 발톱 같은….
“……!”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가 눈알을 굴려 자신을 뒤에서 제압한 이를 쳐다봤다.
‘고, 공작!’
“그흐읍!”
“쉬.”
제논이 놀브 후작의 얼굴 가까이서 낮게 속삭였다.
“그녀가 깨잖아.”
다행히 키리아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음냐….”
그녀를 바라보는 제논의 눈빛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퍽 다정했다.
“메두사꽃이란 것이 나타난 후로 밤늦게 무리하더군. 깨우고 싶지 않아.”
“으읍….”
제논의 목소리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그래서 그대가 발길을 돌릴 기회를 줬어. 그랬다면, 그대가 길바닥에 나앉는 것으로 참아줬을 거다.”
후작의 입을 틀어막은 제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서 후작의 피부가 구겨졌다.
“하지만 네가 이런 선택을 했으니.”
“으읍, 읍!”
“선택의 대가를 치러라.”
뚜둑.
후작의 목이 꺾이면서 제논의 팔 위로 축 늘어졌다.
“그녀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제하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러나 후작에게 제논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제논은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키리아를 바라봤다.
깨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트 위로 드리워진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한 줌 부드럽게 손에 쥐고,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매끄럽고 차가운, 기분 좋은 감촉.
평화로운 키리아의 숨소리.
그 모든 것이 제논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대에겐 좋은 꿈만 깃들기를.”
아주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키리아의 침실에는 평온함만이 감돌았다.
끔찍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º º º
“후아아암.”
식당으로 들어서며, 키리아는 마음껏 하품을 했다.
입이 하마처럼 벌어진 그녀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식당에 이미 와 있던 제논이 보고 있었다.
“잘 잤습니까?”
“하아암― 컥.”
키리아는 당황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악, 내 턱…. 아니 공작님, 왜 식당에 계세요?”
“점심시간이니까요.”
“평소에 점심은 건너뛰시잖아요? 제가 드시라고 할 때만 마지못해 드시면서.”
“나는 그렇지만.”
제논이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한쪽으로 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점심을 먹으러 여기에 올 테니까.”
“…매, 매일 보는 얼굴인데요 뭐.”
훅 들어오는 제논의 솔직한 말에 키리아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메데이아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나한테 직구를 던지는 거지?
제논이 말한 ‘특별한 사람’의 뜻을 자신이 오해하고 있음을 모르는 키리아였다.
‘물론 내가 메데이아긴 한데.’
나한테 이 정도면 메데이아한테는 아주 애교까지 부리시겠네?
…아니? 나 내 부캐한테 질투하는 거 아니거든? 내 부캐잖아? 나잖아?
아니 그래도 공작님은 메데이아가 내 부캐란 걸 모르고 있고, 하지만 그건 내 부캐고….
‘아 빡쳐.’
갑자기 뾰로통한 기분이 들었다.
키리아는 언제 삐걱거렸냐는 듯 휙, 제논을 새초롬히 쳐다보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논이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다.
“키리아?”
“뭔데요.”
“잠을 잘 못 잤습니까?”
“왜요?”
“아까부터 목을 좌우로 돌리는 모습이 꼭 결린 것 같아서요.”
그러며 제논이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대는 운동 부족이 심하던데, 설마 오십견이 온 건 아닙니까?”
“……!”
말로 뒤통수를 후드려맞은 듯한 충격!
안 그래도 뾰로통했던 키리아의 눈매가 캭, 하악질 하는 고양이마냥 사나워졌다.
“…그건 아닌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제논이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려 피했다.
힐끔힐끔, 키리아가 정말 화가 났는지 살피는 눈치.
멍뭉이 같은 모습이라 키리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아, 정말. 그런 얼굴 계산하시지 말라고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 싶긴 했지만.”
“치. 그런데 공작님.”
“음?”
키리아는 자신의 앞에 나온 스프를 한 스푼 뜨며 말했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제논이 표정을 점검하듯 머쓱하게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대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어서요.”
“네? 뭔데요?”
“곧 알려주겠습니다. 안전 점검이 마저 끝나면.”
“……?”
뭐길래 안전을 점검한다는 거지?
궁금했지만 곧 알게 될 거라니 키리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죄송하지만 나가주세요.”
“어째서요?”
“저 밥 먹는데 누가 구경하는 거 싫어해요.”
“…….”
수긍한 제논은 얌전히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º º º
식당을 나온 제논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푸드득.
어제 그에게 소식을 전달해주었던 정보원의 전서구가 다시 날아들었다.
손가락에 전서구를 앉힌 제논은 이번에도 작게 말린 종이를 펼쳤다.
[후작의 지하실의 보안장치는 전부 해제했습니다. 이제 안전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이제 키리아에게 알려줄 수 있겠군.”
후작의 불법 아티팩트 공방은 잘 활용하면 돈이 되어줄 거다.
즉, 키리아가 좋아할 거라는 말이다.
빚을 갚으라고 돈을 턱 내어주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일조하는 것을 더 반기는 키리아였다.
‘분명 기뻐하겠지.’
얼른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자.
“수고했다. 이제 돌아가.”
하지만 전서구는 날아가지 않고 다른 종이를 뱉었다.
“……?”
제논이 첨부된 종이를 읽었다.
[루쿠스 숲 외곽에 떨어져 있던 것인데, 공작님께서 얼마 전 구입하신 제품으로 쓰인 것 같아 동봉합니다.]
이게 뭐기에?
접힌 종이는 여기저기 굴러다닌 듯 지저분했다. 종이를 펼쳐 본 제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메데이아의 사인?!
두근두근.
제논은 말없이 자신의 가슴께를 꽉 쥐었다.
친필 사인이라니! 갑자기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메데이아가 수도에 머물렀었나?
흥분하던 제논은 사인지를 더 들여다보다가 멈칫했다.
“이 잉크….”
검푸른빛의 잉크. 바로 제논이 키리아에게 선물로 준 만년필의 잉크 색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키리아가 쓴 건가? 하지만… 어째서 메데이아의 사인인 거지?
그 만년필은 매우 드물긴 하지만 유일무이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제논은 계속 커지는 의혹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 사인지의 주인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그때였다.
“아앗!”
갑자기 놀란 듯한 외침이 들려와서 제논은 고개를 들었다.
릴리가 제논이 들고 있는 사인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그거 어디에서 나셨나요? 제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