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백작의 눈짓에 집사가 인사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제논은 백작이 짚고 있는 목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했다.
“백작. 다리는 좀 어떻지?”
“괜찮습니다, 주군. 키리아 양의 약 덕분에요.”
베른울프 백작이 소탈하게 웃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었다.
북부의 귀족들이 제논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자신의 기쁨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용기를 낼 수 있게 됐다.
백작은 속으로 마음 졸이면서도 겉으로는 곰 같은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주군. 다리가 이래도 제 외모는 여전히 주군과 똑 닮았잖습니까.”
과거에 자주 했던 농담이었다.
그건 백작이 제논과의 골을 허물기 위해 건네는 서툰 사과였다.
하지만 제논의 반응은 무척 싸늘했다.
“우리가 그런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백작.”
베른울프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그런 농담을 하기엔, 그대와 내 외모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은가?”
“네?”
백작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논의 얼굴에 엷은 장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대의 산적 외모를 내게 견주어 올려치는 건 무리수야. 반역에 가까워.”
“……!”
백작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감격의 기쁨이었다.
“…그, 그렇죠? 하하하! 그렇고 말고요! 이거 참, 주군을 놀리기가 힘들어졌군요!”
백작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키리아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잘됐어.’
공작님과 백작님은 군신 관계이지만 동시에 형제 같은 친구이기도 하니까.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의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키리아는 백작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약을 계속 보내드릴게요. 메두사 병의 치료법은 계속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고맙습니다, 키리아 양.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꽃님이를 만나러 나가야 하는데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마계의 문 때문에 정작 메두사꽃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여유가 생긴 지금 키리아는 꽃님이를 만나 메두사꽃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또 산 타기 싫으니까 백작에게 준비를 부탁해서 말이다.
베른울프 백작이 씩 웃었다.
“제가 주군과 키리아 양을 찾아온 이유를 아직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군요.”
백작이 안내하겠다는 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신목의 정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º º º
공작저에는 응접실이 여러 개 있었는데, 꽃님이는 그중 가장 큰 귀빈용 응접실에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키리아는 놀랐다.
“꽃님아, 지금 뭐 먹고 있는 거야?”
<웅?>
무언가를 와구와구 집어먹던 꽃님이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붉은 양념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테이블 가까이 온 제논이 음식의 정체를 보고는 어이없어했다.
“치킨을 먹고 있군요.”
“헐. 육식하는 신목이라니.”
<조 인간이 먹눈 게 마시써 보이길래….>
당황한 꽃님이가 냉큼 베른울프 백작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백작히 큼, 헛기침을 했다.
“…그, 키리아 양이 말씀한 치맥 가맹점 말입니다. 저희 영지에도 들이면 어떨지 고려하기 위해 먼저 먹어봐야 했습니다.”
<수도에는 무적권 들여! 마시쓰니까!>
꽃님이가 닭다리를 꼭 쥐고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제논이 냉정하게 말했다.
“수도에 들여도 신목께 무조건 드리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수도를 지켜주자나. 그 정도는 조!>
“그렇다면 일 년에 한 번 신목께 감사를 드리는 봉헌제 때 공물로 드리면 되겠군요.”
<일 년에 한 번만 머그라구? 이 마싰는 걸?>
시무룩해하는 꽃님이.
<우리 아이는 너무 차갑그나….>
“루쿠스 산과 숲의 신목들 모두가 닭을 자주 먹으면 수도엔 병아리도 남지 않을 겁니다.”
<헤유우.>
그렇담 지금이라도 많이 먹어둬야겠다며 꽃님이가 부지런히 닭을 뜯었다.
신목이 닭을 뜯다니.
“마물화가 되긴 됐나 보네….”
키리아는 꽃님이의 맞은편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가올 봉헌제 때는 신목에게 치킨을 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겠는걸.
그건 그렇고.
“날 찾았다면서? 메두사꽃에 대한 거야? 안 그래도 그걸 물어보려고 했거든.”
<아, 그러치.>
꽃님이는 아쉬운 듯 치킨을 내려놓고 입과 손을 잎사귀로 닦았다.
<안 구래두 그 얘길 하려고 여기에 온 그야.>
제논과 백작이 자리에 앉았다.
모두를 앞에 두고, 꽃님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메두사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키리아는 중요한 정보를 정리해봤다.
“신목들이 마계의 문을 붙잡고 있던 중에 메두사꽃이 갑자기 나타난 거라고?”
<구래. 루쿠스에서 우리가 모르는 식물은 없어. 우리의 집이니까.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처음 보는 꽃이 있는 게 아니게써?>
그 불청객 같은 꽃은 마계초처럼 마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신목들은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꽃이 나타난 후 마계의 문을 붙잡아두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계의 문이 좀 더 강력해진 걸 느꼈지.>
“그래서 꽃을 태우러 다녔고, 그러다 암살자를 쫓던 백작님하고 만났던 거구나.”
<응.>
그때의 일이 거론되자 베른울프 백작이 꽃님이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미 여러 번 감사 인사를 받았던 꽃님이는 그저 흐뭇하게 끄덕여 주었다.
“그럼 혹시 남아 있는 꽃이 있을까?”
키리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반짝였다.
꽃님이가 난감한 듯 웃었다.
<백작을 만났을 때 태운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눈데…. 하지만 발견하면 보관해 두께.>
“윽….”
잔뜩 실망한 키리아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논이 심각하게 말했다.
“사라진 마계의 문이 걱정이로군요.”
<마자. 그건 불완전하게 봉인되어 있어서 언제 또 마물을 쏟아낼지 몰라.>
제논이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봉인마법을 다시 걸어야 하는 건가.”
북부만이 아니라 제논 본인의 재기에도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계의 문을 봉인하는 건 오직 신성 마법만이 가능했다.
제논의 몸에 새겨진 봉인진도 신성 마법이었다.
즉, 교단의 수장인 대신녀의 협력이 필수.
하지만 제논은 그녀에게 퇴출당한 몸이다. 과연 순순히 협조해줄까?
제논의 미간이 좁게 패였다.
모두가 마계의 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키리아는 메두사 병의 단서가 잡힐 듯 사라져버려 허탈해하고 있었다.
메두사꽃이 없다니. 내가 한발 늦었다니. 아씨, 조금만 더 빨리 절벽에서 떨어져 볼걸!
그래서 빨리 꽃을 채취해갔다면 마계의 문도 캠프에 나타나지 않고… 응?
그러고 보니 마계의 문이 이동한 건 메두사꽃 때문이 아니었잖아?
“…놀브 후작의 아티팩트.”
키리아가 중얼거리자 제논과 다른 이들의 시선이 키리아에게 향했다.
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마물을 끌어들이는 후작의 아티팩트 때문에 마계의 문이 캠프에 나타났던 거잖아요.”
“예. 그 아티팩트는 작동하지 않도록 이미 조치했습니다.”
베른울프 백작이 답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예?”
“메두사꽃이 마계의 문을 흔들고 아티팩트가 마계의 문을 신목에게서 벗어나게 했죠…. 이거 우연이에요?”
“…….”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황제가?”
“…그건 아닐 겁니다.”
키리아의 의문에 제논이 고개를 조심스럽게 저었다.
인마전쟁 때 제국은 중대한 위기를 겪었다.
그때 황제는 궁지에 몰렸는데 상대를 물 힘도 없음을 깨달은 생쥐 같았다.
“황제는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대담하진 못합니다.”
그를 옆에서 보았던 제논이기에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으로선 무엇 하나 확신할 순 없지만 말이다.
“칫. 워낙 밉상이라 황제일 줄 알았지 뭐예요.”
키리아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꿍얼거렸다.
그 귀여움이 묻어나는 모습에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키리아는 계속 재잘거렸다.
“놀브 후작도 밉상 그 이상이에요. 솔직히 저와 공작님께 하려던 짓을 생각하면 금화 한 닢도 남겨주고 싶지 않아요.”
“나 역시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제논이 동의했다.
베른울프 백작의 빠른 일처리 덕분에 놀브 후작은 수도 관리직에서 이미 퇴출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제논의 붉은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기반이 될 만한 건 전부 빼앗아서 재기할 가능성 따위 단 한 톨도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
키리아는 동그래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내 옷자락을 잡고 고개를 도리도리하던 그 공작님이 맞나…?
“기반이 될 만한 거라면 비자금 같은 것 말인가요?”
“네. 이미 조사 중입니다.”
“정말요? 언제요?”
키리아는 놀라 되물었다.
내내 나만 졸졸 따라다녔으면서 언제 무슨 조사를 하셨다는 거지? 몸이 두 개도 아닌데.
그때였다.
푸드덕!
응접실의 창문 가까이 전서구 한 마리가 날개를 퍼득거렸다.
제논이 손을 까딱이자 바람이 창문을 열었다. 전서구가 안으로 날아들었다.
“삐삣.”
키리아는 전서구를 유심히 봤다.
“저건 처음 보는 디자인의 전서구인데요?”
“새로 들였습니다. 정보원의 보고를 빠르게 들어야 하니까.”
“정보원이라니요? 혹시 본가에 있던 부서예요?”
“아뇨. 이번에 신설한 정보부입니다.”
“…처음 듣는데요?”
의아해하는 키리아에게 제논이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대도 아는 사람일 텐데요. 한스와 자경단원들 말입니다.”
“아!”
맞아! 그 사람들 전직 정예 정보 길드원이었지!
예비 치맥 가맹점주로만 머릿속에 저장해놨지 뭐야.
“북부 곳곳에 가게를 열어 그곳을 정보수집에 이용할 생각입니다. 한스가 그 책임자고요.”
“헉.”
“이미 새로운 정보원도 한스가 영입하는 중입니다.”
“헉…!”
제논의 짤막한 설명에 베른울프 백작은 물론 키리아도 입을 벌렸다.
‘아니, 가맹점을 이렇게 이용하실 줄이야. 좋은데…?’
그렇게 감탄하는 사이.
제논의 손에 앉은 전서구가 목을 꿀렁거리며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돌 말린 종이를 뱉었다.
종이의 내용을 빠르게 읽은 제논이 그것을 말없이 벽난로에 태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생겨 가보겠습니다. 키리아.”
“네?”
“오늘 밤은 내 방에 오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 주무십시오. 그럼.”
그 말을 남기고 제논이 자리를 떴다.
남겨진 키리아는 경악한 꽃님이와 주책맞은 흥분으로 콧구멍을 들썩이는 베른울프 백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오눌 밤은…?>
“주군의 방에…?”
<혼자 주무시라구…?>
키리아가 뜨악했다.
“아, 아니야! 이상한 뜻이 아니라고요! 악!”
말을 그렇게 하고 혼자 가버리면 어떡해!
“공작니이임!”
뒤늦게 경악하여 제논을 부르짖는 키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