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41)

77화

그리하여.

놀브 후작은 키리아가 수필로 작성한 재산 양도 문서에 서명을 했다.

“곧 제가 정식 문서로 공식적인 모든 절차를 완료하겠습니다.”

베른울프 백작이 이 일을 맡게 되면서 문서를 가져갔다.

놀브 후작은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알거지가 된 귀족으로 오래오래 회자되리라.

그 충격 때문인지 그는 서명 직후 제논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키리아가 깨소금을 머금은 얼굴로 종알거렸다.

“발도 핥아야 하는데.”

“난 내 신발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키리아.”

“하긴 지지예요, 지지.”

“흠흠.”

셜론이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이제 나와 이야기를 했으면 하오만.”

“앗, 네.”

키리아는 드레스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인사했다.

“마탑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탑주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제논이 악수를 청하며 감사를 표했다.

셜론은 그에 응하며 에헴, 흐뭇하게 웃었다.

“뭐, 도움이랄 것도 없이 내겐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신목의 정령과 오래 교류해왔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몰랐는데.

키리아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마니 늙었꾸나, 셜론.>

“그러게 더 일찍 오지 그랬나?”

서로 티격태격하는 셜론과 꽃님이.

오랜만에 해후한 친구에 대한 반가움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노인과 아이가 서로 늙었다고 놀리는 모습을 키리아가 신기하게 구경했다.

하지만 제논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두 사람의 훈훈한 수다를 무심하게 끊어버렸다.

“그런데 마탑주께선 이 북부 수도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그건 공작성 주치의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지요. 공작을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예?”

제논을 보는 셜론의 눈이 잔잔한 감동으로 일렁였다.

몇 년 전 상처받고 틀어박혔던 공작이 지금은 제 치부를 드러내고도 이토록 당당하다니.

이런 놀라운 변화를 만든 건, 역시 그의 곁에 있는 저 키리아라는 약제사겠지.

게다가 사라졌던 신목들까지 그녀와 함께한다.

“과연, 내 예상보다 더 매력적인 인재야.”

매력만 있나? 솔직히 마탑으로 납치해가고 싶은 인재였다.

키리아를 보는 셜론의 눈빛에 욕심이 가득했다.

그에 눈매가 가늘어진 제논이 키리아를 제 뒤로 숨겼다.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마탑주.”

“아니, 뭘 그렇게 경계합니까? 내가 키리아 양을 마탑으로 몰래 스카웃할까 고민한다는 것처럼.”

“용건.”

“…흠흠! 딱딱한 건 변함없군요. 키리아 양?”

“네?”

키리아가 제논의 뒤에서 쏙 나왔다.

셜론은 그녀에게 돌돌 말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여기 와서 확신할 수 있었소. 키리아 양이 원하는 거래, 받아들이겠소.”

마기 해독수 거래를 말하는 것이었다.

키리아는 서류를 펼쳤다.

책정된 마기 해독수의 단가는 키리아가 처음에 요구하려던 금액과 일치했다.

“뿐만아니라 마탑은 공작가의 우방이 될 것이오. 나의 친구를 찾아준 보답이니 괘념치 마시게.”

“헉…!”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들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마탑은 하늘섬에 있는 만큼 속세와는 동떨어진 집단.

하지만 황제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강력한 세력이다.

그런 마탑의 지지를 받는다고? 이보다 든든한 방패는 없었다.

당연히 넙죽 받아야 이득인 제안.

그런데 키리아의 반응이 모두의 예상과 달랐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어요.”

셜론이 건넨 거래계약서를 다시 돌돌 말아 돌려주는 게 아닌가!

“지, 지금 거절한 것이오? 마탑이 거래도 해주고 지지도 해주겠다는데?”

셜론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수염을 쥐어뜯었다.

키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가격이 안 맞아요.”

“가격이라니, 이만하면 잘 쳐주는 걸 텐데! 독초로 만든 마기 해독수잖소. 원가가 높은 것도 아니고!”

“방금 상품의 가치가 좀 많이 높아졌거든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키리아가 꽃님이의 앙증맞은 손을 잡으며 방긋 웃었다.

“꽃님이와 여기 이분들은 전부 신목이죠. 마계의 문 때문에 마물이 될 ‘뻔’했지만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회복한 신목들. 그렇죠?”

키리아는 특정 단어에 힘을 실어가며 말했다.

신목들이 예전과 변함없다고 보증한 장본인인 셜론으로서는 찜찜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만?”

“그게 다 저의 마기 해독수 덕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마기 해독수가 아니라… 죽어가던 신목도 되살린 엄청난 제품이란 말이죠!”

무려 신목의 정령이 효과를 증명하고 마탑주가 적극 보증하는 제품!

독보적인 두 존재가 함께 효과를 보증한 제품은 마기 해독수가 최초일 것이다.

“그러니 브랜드의 인지적 가치를 더해야 맞지 않겠어요?”

제품을 자세히 알기도 전에 신뢰도와 가격을 높이는 게 바로 브랜드 가치다. 명품이 그렇듯이.

지금 여기선 신목과 마탑주가 그 역할을 해 줄 거란 말이지.

“그런 고로.”

키리아가 손가락 세 개를 빳빳하게 펴며 검지와 엄지로 예쁜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가격의 다섯 배는 주셔야죠.”

찡긋.

“……!”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셜론도, 꽃님이도.

심지어 제논까지.

왜 아니겠는가.

마탑주가 삥 뜯기는 현장인데.

수염을 부들부들 떨던 마탑주가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아가씨, 양아치요…?!”

º º º

쩝….

키리아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섯 배 까지는 받지 못했다.

「세 배로 합시다. 내 부탁하오.」

「네 배요.」

「이, 이 양아치 같으니! 지금 이거 노인 정서 학대요. 학대! 내 연금 박살 내려 그러시오!? 어억, 내 뒷목…!」

「헉! 어르신!」

높은 콧대만큼 자존심도 센 분이 애걸복걸하니, 키리아는 넘어가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편이 더 이득이야.’

세 배로 합의를 보는 대신, 필요한 경우 마탑의 기술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게 됐으니까.

‘게다가 북부 귀족들의 충성도 다시금 받아냈지.’

마탑주와의 협상이 끝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제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맹세하는 자세였다.

수십 명의 귀족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고개를 숙인 그 모습이란.

‘장관이었지.’

내 외톨이 팬, 정말 많이 컸다…!

‘이게 바로 어미 닭의 심정.’

새삼스러운 감동을 느끼며 키리아는 집사가 안내한 방을 휘 둘러보았다.

집사가 공손히 물었다.

“이 방은 연구실로 어떠십니까? 채광도 환기도 잘 됩니다. 관리도 계속 해 오고 있었고요.”

키리아는 지금 북부 수도에 있는 란페르세 가문의 저택에 와 있었다.

집사 역시 저택의 수석 집사였다.

사냥대회에서 있었던 일은 수도는 물론 제논의 저택에도 퍼졌다.

애타게 기다리던 주인의 복귀!

그래서 그들은 공작님이 공작성이 아니라 다시 본가로 돌아오도록 최대한 애쓰는 중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주치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오랜 눈치 스킬로 파악했다.

아니, 사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면.

“괜찮네요. 그래도… 제 연구실은 공작성에 있어서 굳이 또 필요하진 않은데요.”

“무슨 말씀을! 마땅히 본가에 연구실을 가지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공작님?”

제논이 아까부터 키리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으니까.

“음. 수도에 와서 지낼 곳도 마련해두면 편할 겁니다, 키리아.”

“그건 그런데요, 공작님.”

키리아가 옅은 한숨을 쉬며 제논을 돌아봤다.

“…제 소매 좀 놓아주시겠어요?”

“…….”

제논이 고집스럽게 입매를 굳히며 그녀의 소매를 잡은 손에 더 힘을 줬다.

도리.

고개를 젓기까지.

‘아니, 애도 아니고?’

마탑주와의 만남 후 키리아는 사냥대회의 뒷마무리를 빠르게 수습하는 제논에게 감탄했다.

역시 공작은 공작이다.

그런데 수도 관리 업무 인계 때문에 겨울 동안 저택에 머물기로 하자마자 제논은 키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키리아가 어딜 가든 대형견마냥 졸래졸래, 따라왔다.

아무래도 내가 행방불명됐던 일 때문에 불안한 모양인데….

‘귀여운데 좀 귀찮다. 좀 귀찮은데 귀여워.’

키리아는 제논의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싶어 움찔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집사에게 들리지 않게 제논에게 속닥거렸다.

“공작님. 이제 막 복귀하셨는데 가신들에게 이런 모습 보이는 건 안 좋잖아요.”

“상관없습니다.”

“그… 상관이 있지 않을까요?”

키리아는 기껏 쌓아놓은 제논의 멋진 모습을 이렇게 망가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제논의 손에서 제 소매를 휙 빼냈다.

“…….”

대번에 시무룩해지는 제논의 표정.

‘아니, 왜 내가 죄지은 것 같지…!’

잠시 당황한 키리아를 제논이 슬쩍, 시선을 올려 떠 바라봤다.

그 사슴처럼 촉촉한 눈망울을 보자 키리아는 감이 딱 왔다.

“공작님. 지금 미인계 쓰시는 거죠?”

“들켰습니까?”

정말 한결같이 당당하신 분이네.

수법을 간파한 키리아가 엄한 표정을 하자, 제논은 순순히 미인계를 포기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따 밤에 찾아가겠습니다. 마나 진단을 해 주십시오.”

“필요 없다고 손을 빼내셨으면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며 키리아의 한 손을, 무도회장에서 에스코트하듯이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순간 키리아는 그가 자신의 손등에 입술을 맞출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쩌면 아쉽게도 제논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손등을 가까이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젠 그대가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마나 진단에 습관을 들이시는 건 오히려 안 좋은데요.”

제논이 부드럽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키리아.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

키리아는 평소 자신의 호불호를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 불호는, 자신에게 누군가 대놓고 명령하는 것이다.

백작님이 아버지로서 하는 명령도 싫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좀.

‘뭔가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은…?’

뭐야. 나 지금 뭐랬냐?

젠장, 아냐! 아니라고! 이런 건방진 팬 같으니…!

키리아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며 제논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러자 제논은 조금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명령을 철회하긴커녕 슬그머니 키리아의 옷자락을 잡는다.

이런 제논의 모습을 본 집사는 깨닫고 말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 도련님의 애착담요…!”

“…….”

키리아의 두근거림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베른울프 백작이 키리아와 제논에게 다가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아.

키리아는 그를 보자마자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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