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나, 나무들이….”
“움직인다…?”
사람들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다들 스스로 움직이는 나무들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행방불명 됐던 주치의까지 함께라니!
“…키리아.”
넋이 나간 듯 제논이 중얼거렸다.
“아, 공작님.”
키리아가 그쪽을 쳐다보자 나무가 가지를 뻗어 그녀를 바닥에 소중히 내려주었다.
톡, 가볍게 뛰어내린 키리아가 제논의 앞으로 오도도 뛰어왔다.
“저 없는 동안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으신 거죠? 아니, 여기 소매는 왜 찢으셨어요?”
키리아는 깜짝 놀랐다. 제논의 마물 팔을 가려주고 있어야 할 긴 소매가 찢어져 있었으니까.
제논은 할 말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하지만 자신의 회포를 먼저 꺼내는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으며 그가 말했다.
“…키리아. 마물의 습격으로 부상이 심각한 이들이 많습니다.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키리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캠프를 한 바퀴 둘러봤다.
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천막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음. 나 혼자 돌아다니다간 그사이에 누구 하나 가버릴 거 같은데?’
그렇다고 숨만 붙어 있는 환자에게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키리아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에는 제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그에게 왕의 맹세를 한 상급 마물들과 그 수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제논의 눈치를 보느라 아주 조신한 모습이다.
‘설마 공작님이 쟤네를 굴복시킨 거야?’
키리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마물이라면 ‘벤다’와 ‘죽인다’는 선택지밖에 떠올리지 못하던 공작님이 마물을 스스로 거두다니.
‘생명석보다 이게 더 대박인데?’
키리아의 입술이 둥그렇게 올라갔다.
“공작님, 쟤네 좀 빌릴게요.”
“네.”
의아해하면서도 키리아의 말이니 일단 끄덕이고 보는 제논.
키리아는 조그마한 몸집의 마물들에게 까딱까딱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야, 너희 이리 와 봐.”
“키륵? 인간 주제에 감히!”
<모라고?>
마물들이 발끈하자 더 발끈하며 나서는 꽃님이와 신목들!
<감히 서열 1위에게 대드는 게냐?>
<아주 혼꾸멍을 내야 쓰겠구나!>
<수명이 단축되는 놀라움을 보여주랴?>
“케… 케륵…?!”
우람한 형님들… 아니, 신목들이 꽃님이를 따라 두꺼운 가지와 줄기를 뚜둑뚜둑 좌우로 돌렸다.
<우린 서열 1위에서 은퇴했다. 이제부터 루쿠스 숲과 산의 마물 서열 1위는 여기 있는 키리아야.>
<처신 잘해라.>
전직 서열 1위 마물의 선언에, 아래 서열의 마물들은 기가 팍 죽었다.
하지만 마물들은 서열에 따른 태세 전환이 빠른 종족.
즉시 키리아의 앞으로 와 부복했다.
“케륵, 부르셨습니까 1위님.”
“부르셨습니까!”
크. 이게 바로 서열의 맛.
‘고마워요!’
키리아는 신목들과 윙크를 짧게 주고받은 후 마물들에게 지시했다.
“독초 연고를 조금씩 덜어줄 테니, 이걸 다친 사람들에게 나눠줘.”
독초 연고만으로 치료가 충분한 환자도 있을 테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물들은 키리아가 나눠준 소량의 독초 연고를 다친 사람들에게 나눠주러 다녔다.
“히익!”
사람들은 마물이 달려오자 소스라쳤다.
하지만 마물들은 오직 명령 이행을 위해 약만 툭 던지고 가버렸다.
그래서 경악은 금방 잦아들었다.
빨리 약을 갖다달라며 마물을 재촉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 사이 키리아는 자신의 천막에서 치료 도구를 더 챙겨왔다.
“릴리. 날 좀 도와줄 수 있어?”
“저, 저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감격 중이던 릴리가 화들짝 반응했다.
“응. 일손이 필요해서. 하지만 다친 거라면 그냥 쉬어.”
“아뇨! 저 별로 안 다쳤어요. 그냥 조금 긁힌 거예요. 돕게 해주세요!”
릴리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냥대회의 의료진들도 합세했다.
“저, 저희도 돕겠습니다. 저희가 봐둔 환자들부터 보시면 더 빠르실 겁니다.”
“좋아요. 안내해주세요.”
키리아는 릴리를 비롯한 의료진들을 이끌고 환자들을 차례대로 치료했다.
“이 환자에게는 푸른독미나리 뿌리와 브론테 약초를 7:3 비율로 혼합한 약을 처방하세요.”
“네, 주치의님.”
“그리고 이 환자의 경우는….”
빠른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키리아.
그리고 지시를 받아적으며 즉시 수행하는 릴리와 의료진들.
한쪽으로는 사람들에게 약을 가져다 나르는 마물들까지.
“허, 허어. 이런 광경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건데….”
키리아의 등장 이후 베른울프 백작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흠흠. 백작님, 그러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백작의 보좌관이 말했다.
“자네 입엔 이미 벌레가 들어가 있네만.”
“헙. 퉤퉤!”
보좌관이 입을 푸르르 털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무도 그를 놀리지 않았다.
왜냐면 다른 귀족들도 아직까지 입을 벌리고 있었으니까.
<다들 파리지옥 같구나.>
인간들의 신기한 행태를 본 꽃님이의 감상이었다.
º º º
환자들의 치료가 일단락되자 비로소 캠프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키리아도 이제야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까, 이 움직이는 나무들이 전부 사라졌던 신목이라고 소개할 여유 말이다.
“신목들은 마계의 문을 붙잡아 수도를 보호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죠.”
<그 말대로야. 하지만 우리도 마기에 점점 물들기 시작해서 큰일 날 뻔했눈데… 여기 은인이 도와준 고지.>
꽃님이가 흐뭇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사정을 알게 된 귀족들은 저마다 감정이 북받쳤다.
북부를 수호하는 신목이 사라졌을 때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신목은 북부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수호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꽃님이가 애정이 충만한 얼굴로 제논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우리의 아이를 계속 돌봐주고 시퍼서 얼른 도라와써. 이상한 말을 하는 인간드리 이쓸 테니까.>
그러며 놀브 후작을 흘겨보았다.
놀브 후작은 윽, 입속으로 신음할 뿐 함부로 반박하지 못했다.
북부의 모든 귀족들이 숭배와 경탄의 눈길로 신목과 신목의 정령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제논 역시 같은 얼굴이었지만 대상이 달랐다.
“그랬던 거군요.”
달라붙는 꽃님이의 머리통을 밀어낸 그는 경탄에 젖은 얼굴을 키리아에게 향했다.
“그대가 신목들을 되찾아준 거군요.”
“음,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키리아는 뺨을 긁적였다.
‘다 제 덕분이죠! 라고 하기에는 나도 받아먹은 게 많아서 말이지.’
머쓱해진 키리아는 그냥 귀엽게 웃었다.
“히힛.”
그녀의 웃음이 제논의 입술에도 엷게 스며들었다.
“정말이지, 그대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상한 그대 덕분에….”
제논의 부드러운 눈길이 신목들을 향했다가 놀브 후작에게로 미끄러지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차례가 돌아왔군요.”
어느새 냉랭해진 목소리였다.
“신목이 돌아왔는데 아직도 내가 불길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놀브 후작?”
“으윽…!”
“저 똑똑히 들었다구요. 불길한 존재가 아니라고 증명한다면 뭐라고 하셨더라아?”
팔짱을 끼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린 키리아의 말을 다른 귀족들이 받았다.
“발도 핥고!”
“재산도 바친다고 했지요!”
“으으윽…!”
키리아는 문서 한 장을 척 내밀었다.
놀브 후작의 재산을 전부 제논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환자를 돌본 후 키리아가 얼른 만든 것이었다.
“자. 공약 이행하시죠?”
“허, 허 참! 다들 그런 호언장담 한 번씩 안 해보셨습니까?”
놀브 후작은 바짝 정신을 차린 듯 큰소리를 쳤다.
“그래요. 제가 공작님께 주제넘은 언사를 한 것은 사죄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 때문에 재산을 넘기라니요?”
허! 그가 기가 막힌 소리를 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립니까? 설마 여러분들, 제가 남부 귀족이라고 이렇게 괴롭히시는 겝니까?”
“으음…….”
귀족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놀브 후작이 괘씸하긴 해도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귀족의 재산을 누군가에게 양도한다는 건, 홧김에 뱉은 말 한마디가 아닌 복잡한 이유와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게 상식이니까.
하지만.
<미안한데.>
꽃님이가 볼록한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우리눈 인간이 아니야. 신목이그든? 너는 신목 앞에서 맹세를 했구.>
신목 앞에서 하는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법보다도 우선하는 이 세계의 규칙이었다.
꽃님이는 케케, 하고 누군가를 닮은 웃음을 흘렸다.
<구로니까 맹세를 이행하지 않으묜 인간, 너는 삼대가 멸족할 거시다.>
대박.
놀브 후작을 곯려주려 했을 뿐인데 진짜로 가능하다고? 키리아는 감동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놀브 후작의 반응이 이상했다.
“하!”
어라, 코웃음을 쳐?
거지가 됐다는 충격에 드디어 미쳤나?
키리아는 그런 의심이 들었다.
“신목의 맹세. 물론 나도 알고 있소. 지켜야지. 물론,”
후작이 꽃님이를 가리켰다.
“그쪽이 진짜 성스러운 신목이라면 말이오.”
<우린 신목이 맞다니까!>
“하지만 조금 전에 분명 마기에 물들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 그건….>
“게다가 지금 살아 움직이는 그 모습은 신목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것 같은데. 아까 듣자 하니 마물 서열에도 든 모양이고? 그럼 그냥 마물 아니오?”
<……!>
<헉.>
콤플렉스를 공격당하자 신목들은 상처받았다.
다른 귀족들도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마물들이 신목을 따라 서열을 바꾸다니.
그들이 아는 신목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놀브 후작은 이제 기가 살아나서 외쳤다.
“하하하! 그쪽이 마물이 아니라 신목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시겠소!”
증명 되게 좋아하네!
키리아는 으르릉 이를 갈았다.
제논도 난감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마기에 물든 신목이 과연 과거의 신목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누가 증명해줄 수 있을까?
그때였다.
“내가 보증하겠소.”
응?
모두의 고개가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게 돌아갔다.
키리아도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키리아를 보며 뾰족한 콧대 아래 드리워진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이제야 만나는군. 반갑소. 난 하늘섬의 마탑주, 셜론이오.”
이어 셜론이 놀브 후작을 쳐다봤다. 그냥 보는 건데도 상대를 깔아보는 듯 오만한 위엄이 있었다.
“마탑주인 내가 이분들이 신목이라는 걸 보증하지. 여기 신목의 정령하고는 수십 년 동안 교류한 친우이기도 하니 말이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면 어디, 마탑을 상대로 공방 한 번 해보시겠소?”
“으… 으윽.”
놀브 후작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와 역시.
키리아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공신력 있는 빽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