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사냥대회가 완전히 취소되고 공작도 혼자 사라져버리자 귀족들의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하지만 그들은 혼란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각자 데려왔던 호위 인력들을 정비해, 키리아를 찾아 나설 준비를 했다.
놀브 후작은 당황했다.
‘아니, 이게 뭐야? 다들 미쳤나? 공작의 그 꼴을 보고도 도우려 한다고?’
하지만 후작의 생각은 반만 맞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공작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북부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반드시 구해야 해!’
‘그녀를 구해야 공작님은 물론 우리 북부가 살 수 있을 것.’
이런 진심 어린 염려와 희망과 더불어,
‘내가 먼저 구해서 점수를 많이 따야지! 영지에 가장 먼저 초빙할 테다!’
‘치맥 진짜 먹어보고 싶어. 잘 보여서 내가 제일 먼저 먹어봐야지!’
사심으로 인한 승부욕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주치의 아리키를 꼭 찾아내자!’
인마전쟁 이래 가장 높은 단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 모르는 후작은 예상 밖의 상황에 결심을 굳혔다.
‘역시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어!’
그는 서두르려는 귀족들에게 식사를 권유했다.
“자자, 여러분. 벌써 정오가 한참 지났습니다. 굶은 채로 수색에 나설 생각입니까?”
“공작님의 주치의가 행방불명 됐는데 느긋하게 식사라니요?”
“하지만 수색을 금방 끝낼 것도 아니잖습니까? 병사들도 먹어야 힘을 내지요.”
“…….”
그것도 그랬다.
수색이 저녁 늦게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니 배를 채워둬야 했다.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수색에 나설 이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 후작은 마물 유인 아티팩트를 발동시켜 캠프장 한구석에 숨겼다.
그러고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여태까지 본 것, 그리고 앞으로 볼 것 모두 빠짐없이 기록해서 남부와 북부 곳곳에 기사를 내라.”
“물론입니다, 후작님.”
“저희야 1면 기사를 따내기만 하면 감사하죠.”
“좋아. 흐흐.”
마물을 막을 병력은 몰래 대기시켜두었다.
이제 공작을 불길한 존재로 낙인찍고 나는 북부의 귀족들을 구한 영웅이 되는 거야.
후작은 군침이 돈다는 듯 자신의 염소수염을 손가락으로 싹싹 비볐다.
º º º
릴리는 수색대를 위해 음식을 나르는 수행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쉬고 있자니 또 온갖 걱정 어린 상념이 밀려들었다.
릴리는 잡지에 곱게 끼워둔 키리아의 사인을 펼쳐보며 폭 한숨을 쉬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키리아 님. …응?”
휘갈겨진 사인에서 ‘키리아’라는 글자를 살펴보던 릴리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 이름, 키리아라는 글자가 맞나?”
사인지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돌려보며 글자를 읽어봤다.
“메… 메데… 이아…? 메데이아?”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한데?
다른 잡지에서 찾아봐야겠다 싶어, 릴리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를 걷었다.
그런데….
“어머?”
천막 안에서 이상하게 일렁거리는 저 불길한 보라색 구멍은 뭐지?
꾸르르륵.
구멍 안에서 짐승이 그르렁대는 듯한 소리까지 났다.
릴리가 어깨를 흠칫했을 때.
“쿠아아악!”
한 무리의 마물들이 구멍 밖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º º º
“쿠르륵, 쿠륵!”
“키에에엑!”
온갖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캠프장을 휘저었다.
화려한 천막들이 짓밟히고 깃발이 꺾였다. 수행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달아났다.
“대체 어디서 마물이 나타난 거지?!”
“사람 살려!”
이때 놀브 후작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이런, 결국 공작님의 마물병이 이런 사태까지 불러왔군!”
그러고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 안전을 대비해 제가 병력을 준비해두었으니! 자, 다들 공격!”
후작의 명령에 따라 대기 중이던 후작의 병사들이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물들은 후작의 예상보다 강한 놈들이었다.
“캬아아악!”
와이번 열댓 마리가 한 번에 나타나면서 후작의 병사들을 주둥이와 발로 낚아챘다.
지상의 마물들도 후작의 병사들을 단번에 와해시켰다.
“으아아악!”
병력이 순식간에 분해됐다.
“이, 이런, 이럴 수가! 이럴 리가 없는데…!?”
허둥거리는 후작에게 와이번이 달려들었다.
“끼이이익!”
“허헉! 날 살려라!”
후작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다른 병사의 뒤로 숨었다.
그 모습에 전투에 나선 북부 귀족들은 혀를 찼다.
베른울프 백작이 고함치며 곰처럼 돌진했다.
“놈들이 캠프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라! 수도로 가게 두지 마! 우오오오!”
그의 기세에 다른 이들도 기운을 받고 마물들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마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그 수가 많아졌다.
아무리 베고 찔러도 줄지를 않았다.
“으아악!”
“백작님!”
“나, 난 괜찮아. 방어선을 뚫려선 안 된다!”
다리가 불편한 백작이 가장 먼저 쓰러지자 결국 전세가 확연히 기울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비상용으로 구비해 두었던 포션도 어느새 동나서 부상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은 귀족이 다급히 말했다.
“베른울프 백작님,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몸을 피하시죠.”
“난 수도를 책임지고 있소. 내가 피할 수는 없지. 자작이나 피하시오.”
“다들 목숨을 걸고 버티는데 나 혼자서요?”
그랬다. 놀랍게도 북부의 귀족들은 불리한 상황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은 인마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마물에게 등을 보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북부는 인마전쟁 전에도 마물에 맞서던 곳이었다.
자연히 북부 귀족들에겐 대대로 마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것이 의무로 내려왔다.
그들은 함께 싸우며 북부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공유했다.
공작의 칩거 후 차가워졌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듯했다.
아직 북부에는 희망이 있다.
물러서지 않는 서로를 보며 그런 믿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으아악!”
“서쪽이 뚫렸습니다!”
“안 돼! 그쪽은 수도야. 못 가게 막아야 한다!”
마물의 수가 너무 많았다.
백작과 귀족들은 수도로 몰려가는 마물들을 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이때였다.
“키르르륵!”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사마귀가 수도 방향으로 달려 나가던 마물 서너 마리의 목을 단번에 벴다.
“쿠오오오!”
거대한 덩치의 오크 킹은 나무를 뽑아 날아다니는 와이번을 격추시켰다.
“저, 저 마물들은 뭐지?”
귀족들은 절망스러웠다.
지금도 버거운데 저런 상급 마물까지 나타나다니!
그런데 이상했다.
오크 킹이 겁에 질린 사람들을 덥석 들더니 안전한 곳에 내려놓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다른 마물들을 몽둥이로 하늘 높이 날려버리기까지.
다른 상급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 마물이 사람을 보호하고 있어?”
“대체 어떻게? 왜?”
그 답을 알려주듯, 상급 마물들 사이로 검은 망토를 두른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잘 버텼다.”
“공작님?!”
“이제부턴 내가 하지.”
펄럭, 망토를 젖힌 제논은 오른팔을 가리고 있던 소매를 쭉 찢었다.
검은 비늘로 번득이는 마물의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물들을 피해 숨어 있던 놀브 후작이 이를 보고 비웃었다.
“흐흐흐, 멍청하긴! 숨겨도 모자를 판에 그 흉측한 팔을 아예 내보여?”
제논이 붉은 눈을 빛내며 상대편 마물들을 검은 팔로 가리켰다.
“왕으로서 명령한다. 사람들을 지켜라.”
“우오오오!”
그러자 상급 마물들이 명령에 감응하듯 울부짖었고, 그들을 따르는 부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 난전에 가세했다.
귀족들은 입을 떡 벌렸다.
“마, 말도 안 돼…. 마물을 다루고 계신다….”
“인간을 지키라는 명령을 마물들이 듣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곧 마물이 아닌 다른 이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바로 제논이었다.
왼손으로는 신성해 보이는 금빛 오러가 맺힌 검을 휘두르면서, 칠흑 같은 오른손으로는 마물들을 가차 없이 찢어발겼다.
마치 상위 마족의 전투 같았다.
하지만 인마전쟁을 겪어본 귀족들은 한눈에 차이점을 알아봤다.
제논의 움직임은 마족과 달랐다.
힘을 과시하고 상대를 찍어 누르는 폭력성이 아니라….
지극히 냉정하고 절제된 움직임.
공포가 아닌 수호를 위한 전투였다.
“…….”
그건 북부가 알고 있는, 그리워하는 영웅의 모습이었다.
베른울프 백작은 북받치는 감정으로 뻐근해진 가슴을 움켜잡았다.
‘주군은… 그때보다 더 강해지셨어.’
전쟁터에서 제논을 움직인 것이 의무와 책임이었다면, 지금의 제논에게선 확고한 신념이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헤매던 문제의 답을 찾은 것처럼.
그 움츠러들지 않는 당당한 태도가 북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도 돕겠습니다!”
귀족들이 검을 움켜쥐었다.
제논과 제논이 이끄는 마물들, 그리고 귀족들의 합세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승기를 잡았다.
º º º
“제 천막에… 불길한 보랏빛 구멍이 나타나 있었고 거기서 마물들이 나왔어요. 전 정신을 잃었고요….”
부상을 당한 릴리가 제논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이들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물이 나오다니, 설마… 마계의 문 아닙니까?”
“하지만 분명 봉인됐을 터인데….”
제논의 표정도 심각했다.
릴리가 발견한 마계의 문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래서 쏟아지던 마물들은 수가 더 늘어나지 않았고, 전투가 종료된 것이었다.
베른울프 백작이 제논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각하께서 오신 덕분에 수도는 물론 우리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논은 그들의 감사를 예상치 못한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키리아에 대한 후회로 그는 이제 자신을 감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팔을 드러낸 건 그 다짐의 일환일 뿐이라, 이런 긍정적인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요!”
발악하는 듯한 거친 대꾸. 놀브 후작이었다.
“마계의 문이라니! 그게 왜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이상합니다. 고블린 떼에, 산에서 갑작스런 마물들의 출현에, 이제는 마계의 문까지? 전부 공작님이 나타나고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
“게다가 이 꼴을 좀 보십시오!”
후작이 팔을 반 바퀴 휘저으며 신음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캠프에 가득한 부상자들이었다.
“으으, 으….”
상태가 위중한 자들도 상당했다.
금방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환자들도 있어,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후작이 비죽 입술을 올렸다.
“이 모든 일이 공작님 책임이라고 생각되는 건 제 착각입니까? 공작님께선 불길한 존재가 아니라고 증명하실 수 있느냔 말입니다.”
“…….”
제논은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증명해 보십시오! 그럼 이 놀브, 공작님의 발이라도 핥겠습니다! 아니, 아예 재산도 다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그때.
“증명해 보라면 증명해 보는 게 인지상정!”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나무 위에 앉은 키리아가 한 무리의 움직이는 나무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약속 지키세요. 안 그럼 뒤지게 팰 거니까요. 나 말고 이 나무님들이.”
<디지게 팰 고시다.>
키리아의 옆에 앉은 꼬마 여자아이가 볼록한 배를 내밀며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