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41)

74화

“꽃님아, 너…?”

아장아장한 목소리의 주인은 꽃님이었다.

꽃님이가 몸에서 빛을 내며 어떤 형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푸른 녹음을 머리카락에 길게 드리운 꼬마 여자아이였다.

반투명한 몸이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키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정령? 그치만 난 정령 친화력이 없어서 한 번도 정령이 보인 적 없는데….’

그때 수도로 오면서 제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펠리온에는 신성력을 품은 신성한 나무인 신목 숲이 있었습니다.」

「신목이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됐죠.」

키리아는 귀여운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꽃님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신목… 이세요?”

<마자. 난 가장 오래된 늘근 신목이자 신목의 정룡이야.>

“정룡이 아니라 정령이죠?”

<죡당히 알아두러.>

꼬마의 모습을 한 정령은 자신의 혀 짧은 발음이 부끄러운 듯 부러 투덜거렸다.

<구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신목이지.>

동시에,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나무가 기지개 켜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오래된 나무껍질 일부가 눈꺼풀처럼 올라갔다. 그 안에서 보석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헉! 나, 나무가 살아 움직여!?”

깜짝 놀란 키리아의 반응에 나무들은 재미있다는 듯 수피를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해괴한 광경이었지만 제법 호의적인 미소라서 키리아는 긴장을 풀었다.

“바, 반가워요. 그렇지만 알비의 정수리에 피어 있던 꽃이 설마 신목이었을 줄이야….”

<너룰 만나려그 씨앗이 되어 잉태 중인 마물에게 먹혀찌. 졍말 색다룬 경험이어써.>

“그래서 그런 귀여운 모습이 된 거군요?”

왠지 어린 리안이 생각나서 키리아는 상대의 나이도 잊고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 기여어? 나부다 어린 인간한테 들을 말은 아니야. 떼끼.>

정령은 키리아를 혼내면서도 발그레 홍조를 띠었다.

“그런데 왜 절 만나려고 했어요?”

<나무들의 소무늘 들었거둔. 네가 띠어난 약제사라그.>

<우리를 치료해 주련.>

신목들이 말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지혜로인 노인처럼 온화하고 깊었다.

“치료라고요?”

키리아는 신목들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그들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생명석들. 하나같이 빛깔이 아주 탁했다.

<이것 때문에 아파 죽겠어.>

“아. 마기에 오염되어서 그렇군요.”

그렇지. 여태까지 입수한 생명석 조각들도 전부 마기 해독수로 정화해서 사용했었다.

신성력의 상징인 신목들에게, 마기로 오염된 물질은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키리아는 반짝 눈을 빛냈다.

“그럼 여러분을 아프게 하는 그걸 제가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치료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가져가렴.>

“좋아요!”

키리아가 방긋 웃었다.

“마침 챙겨온 마기 해독수도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높은 곳은 제 키가… 우왓!”

별안간 키리아의 몸이 불쑥 위로 들렸다.

한 신목이 가지를 손처럼 뻗어 키리아의 엉덩이를 받치고 들어올려 준 것이다.

<이러면 되겠니?>

“추, 충분해요. 에헴. 그럼… 한 분씩 치료를 시작하죠.”

‘근데 여기 있는 생명석들을 일일이 정화하다간 끝이 없을 거 같은데?’

음.

키리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입구가 좁은 마기 해독수 병을 거꾸로 들고 말했다.

“눈 감으세요.”

<음?>

“조금 따끔해요~”

푹!

<……!>

키리아는 마기 해독수를 나무 껍질 틈새에 주사 놓듯 꽂았다.

해독수를 맞은 신목은 체관으로 퍼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탁했던 생명석이 맑은 녹색을 되찾으면서 눈을 번쩍 떴다.

<아이구, 시원해!>

<오오…!>

찹찹찹.

나무들이 나뭇잎 무성한 가지를 부딪히며 박수를 쳤다. 효과 만점이었다.

문제는 가져온 해독수가 금방 동이 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잠깐만요. 해독수를 새로 만들어야 해요. 재료만 있으면 금방 하니까 조금만 기다리실래요?”

<재료가 무엇이니?>

“지금은 파가일 열매와 말꼬리풀만 구하면 돼요.”

<그렇담 잠시 기다리렴.>

“네? 왜요?”

대답 대신 신목들은 우우우우― 잔가지를 잘게 흔들며 바람 부는 소리를 냈다.

신목과 어울리지 않는 그 음산한 소리는 루쿠스 산은 물론 숲까지 바람처럼 퍼졌다.

나무들이 감응해 소리를 전달한 것이다.

그 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있는 키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들고 몸이 으스스 떨렸다.

‘신목 맞아!? 유령나무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키리아를 본 신목의 정령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마기에 오래 오염되어 있으묜서 우리눈 마물의 성질두 가께 되었꺼둔. 구래서….>

정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마물들이 쿵쿵쿵 달려왔다.

하지만 공격은커녕 신목들 앞에 풀과 야생 열매를 잔뜩 던져놓고 부랴부랴 도망가 버렸다.

잉? 이거 왠지 익숙한 광경인데?

<우리가 이 일대룰 접수해써.>

신목의 정령이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º º º

<에구구. 시원해라.>

<아유, 좋다.>

곳곳에서 마기 해독수를 맞은 신목들이 연신 기분 좋은 탄식을 흘렸다.

‘양로원에 봉사 온 기분….’

키리아는 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봉사는 아니지.

생명석을 받아가기로 했으니까 엄청난 수지였다.

<은인.>

신목의 정령이 키리아에게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죵말 고마어, 은인. 우리는 이 은혜룰 대대손손 잊찌 아눌 고야.>

<고맙구나.>

<고마워.>

정령을 따라 신목들도 경건하게 몸을 숙였다.

인간인 키리아를 위해 인간의 방식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공손한 인사를 받기만 할 순 없었다. 키리아도 얼른 허리를 숙였다.

“저도 감사합니다. 신목을 치료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구래서 말인데, 보답을 하구 시퍼.>

“생명석을 받기로 했잖아요.”

<구거랑은 별개로 우리의 성의를 보이구 시퍼.>

“괜찮은….”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에 키리아가 손사래를 치려 할 때였다.

<공작성에서 보니 네가 마물들의 서열 1위던데… 이곳의 1위 자리두 가져가묜 어떠까?>

“감사합니다.”

키리아는 손사래를 치려던 손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모았다.

“수도 지역의 마물 서열 1위라니요. 정말 필요하던 거예요.”

분명 공작님의 복귀를 위한 강력한 카드가 될 거야!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키리아는 서열 1위가 마음에 들었다.

1위는 루쿠스 산에서 길을 잃어도 마물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을 테니까.

<대신 부타기 이써.>

“역시, 그렇겠죠?”

생명석에 이어 수도 서열 1위 자리를 보상으로 받다니, 키리아가 생각하기에도 좀 과했다.

조건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루쿠스 산과 수페 있눈 나무들 대부분이 신목이거둔, 사실은.>

“헉. 엄청 많네요…!”

<마자. 평범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눈 건 우리 몸에 부튼 광석들 때문에 기운을 뺏겨서 구래. 매일매일 께속 자라거둔….>

<그러니까 은인이 믿을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서 우리를 매일 치료해주렴.>

<생명석이라고 부르는 이것도 전부 가져가고.>

“……!”

키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그 귀한 생명석의 원천이 루쿠스 숲과 산 전체인 것도 놀라운데, 매일 와서 가져가라고?

조건이 아니라 업계포상 아니야?

키리아는 냉큼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 조건, 받아들일게요! 무르기 없기예요!”

원작에선 생명석을 그냥 팔았지만, 그건 엔딩 후의 일.

지금은 마정석을 독점 중인 황제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뭐 힘든 길을 선택할 필요 있나?

그냥 파는 게 힘들면 가공해서 팔면 된다.

키리아는 생명석을 독초 연고처럼 약에 넣어 팔 생각이었다.

포션급의 성능을 자랑하니 시장에 출시되면 날개 돋친 듯 팔릴 거다.

내 지갑도 불리고 공작님 금고도 불려주자.

‘나 너무 착한 거 아니냐? 나보다 천사 같은 사람 있음 나와보라 해!’

케케케.

히죽히죽 웃는 키리아를 바라보는 신목의 정령은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욕시 그 아이가 선택한 사람다오. …쪼금 괴짜긴 하지만.>

중얼.

“…….”

키리아는 정령의 뒷말을 못 들은 척 물었다.

“그 아이라면 혹시, 공작님 말이에요?”

<웅. 내가 씨앗으로 변했던 건 그 아이… 제논을 보고 시퍼서기도 해. 우릴 가로막떤 계약의 힘이 야캐져서, 이제 만날 수 이쓸 것 같았꺼든.>

<북부는 우리의 땅이고.>

<제논은 북부의 후예니까.>

<우리의 아이야.>

따뜻한 목소리.

키리아의 가슴 속에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한때 마법 계약으로 인해 제논과의 관계가 가로막혔어도 신목들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 그런데.”

키리아는 퍼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조금 전에 마물들을 불렀잖아요? 그럼 수색대가 산에 왔을 때 마물들이 나타난 것도 신목 정령님의 뜻이에요?”

<후후. 펴나게 꽃님이라그 해두 대.>

“꽃님이의 뜻이야?”

<…말까지 노으라고는 안 했눈데. 뭐 돼써….>

역시 괴짜야, 라고 중얼거린 꽃님이는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묜, 아니야. 구건 우리가 아니라… 마계의 문에서 나온 마물두리야.>

“마계의 문이라면….”

들은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갑자기 마계의 문이 열려 마족과 마물이 쏟아졌고, 제논이 그걸 막았다.

그게 인마전쟁이었다.

“마계의 문은 공작님이 봉인했다고 들었는데요?”

<마자. 이곳 루쿠스 산에서 봉인대써. 인간둘은 그걸루 안심하고 있게찌만, 사실 그 봉인은 불안정한 거시야. 어쩌묜 처음부터….>

“……?!”

<구래서 우리는 마계의 문이 마무를 쏘다내지 못하게 붙잡그 있었서. 우리가 반마물이 될 정도로 마기에 물든 건 구래서야.>

<은인이 생명석이라 부르는 이것도 그때부터 생겼단다.>

한 신목이 말을 보탰다.

“맙소사. 그렇게 된 거였군요.”

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공작님이 이걸 알면….’

무엇 때문에 몸을 그렇게 망쳐가면서, 모두를 잃어가면서 이 지경이 된 건데.

근데 그 봉인이 완전하지 않다니!

‘그나저나 공작님, 괜찮을까? 마나 진단을 안 한 지 꽤 됐는데.’

내가 없는 사이 발작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됐다.

“저 이만 가봐야겠어요. 꽃님이도 같이 가자. 공작님께 이 일을 모두 알려줘야 해.”

<죠아.>

그때였다.

조금 전처럼 우우우, 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일더니 한 신목이 눈을 번쩍 떴다.

<큰일이야!>

“왜 그러세요?”

<마계의 문이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어!>

키리아도 기겁했다.

“붙잡고 있었다면서요!?”

<이, 이롤 리 없눈데. 누군가가 일부러 마물을 부르지 않눈 이상….>

“……!”

키리아는 마계의 문이 이동한 원인을 퍼뜩 깨달았다.

“놀브 후작의 아티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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