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철퍼덕!
마지막까지 버티던 마물의 목이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제논이 검을 회수했다.
대형 마물 십여 마리를 혼자 상대했는데도 제논의 호흡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역시… 공작님이시군.”
함께 싸우던 귀족들은 새삼 그의 실력에 감탄했다.
마물로 타락했다느니 저주를 받았다느니 해도 공작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게 됐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베른울프 백작이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그 물음에 담긴 또 다른 염려를 읽은 제논이 여상한 얼굴을 들어보였다.
“보다시피.”
부상은 입지 않았고 발작도 일어나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됐어. 그보다 서둘러 후방으로 간다.”
마물이 나타나자마자 일부 전투인원을 후방으로 보냈던 제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후방에는 키리아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이들이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마물들을 쓸어버렸던 것이다.
제논은 귀족들을 이끌고 수행원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 남은 마물들을 처리했다.
선두에 있던 병사들을 후방으로 일찍 보낸 덕분에 피해가 생각보다 적었다.
모두가 한시름 놓을 때였다.
말에서 내려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확인하던 제논이 먼저 와 있던 다른 귀족에게 물었다.
“키리아는? 내 주치의는 어디에 있지?”
“그게… 저도 아까부터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만 보이질 않습니다. 다른 곳에 몸을 숨기신 게 아닌지….”
“뭐…?”
침착하기만 했던 제논의 표정에 금이 갔다.
“전투가 가능한 자들만 앞으로 나와라. 당장 키리아를 수색하겠다.”
그렇게 명령하며 제논이 급히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놀브 후작이 반대하고 나섰다.
“방금 전까지 위험한 마물들이 떼로 나타난 곳입니다. 이런 곳을 평민 약제사 한 명 때문에 귀족 분들과 함께 수색하시겠다니요?”
제논의 눈썹이 지그시 구겨졌다.
“그대가 신경 써야 할 건 그녀의 신분이 아니라 그녀가 내 주치의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병력을 보내시고 공작님께선 캠프로 돌아가심이 어떻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렇게 말씀드리긴 송구하지만.”
놀브 후작이 은근한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고블린들이 캠프에 몰려왔던 것도, 지금처럼 마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요. 하필 공작님께서 복귀하시려 할 때 발생했다는 게…. 혹시 주치의도 그래서 행방불명 된 건 아닙니까?”
“……!”
제논의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검을 빼 들어 후작의 목을 겨누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것이 있었다.
“컥!”
그동안 억눌려 있던 제논의 검은 팔이었다.
긴 소매와 망토로 감춰져 있던 그의 드래곤을 닮은 검은 팔이 후작의 목을 틀어쥐었다.
버둥버둥, 후작의 두 다리가 공중에서 발버둥쳤다.
“허억…!”
드러난 마물의 신체에 귀족들도 크게 숨을 삼켰다. 그들의 눈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고, 공작님…! 커헉.”
놀브 후작이 목이 졸린 채 힘겹게 말했다.
제논은 자신의 팔이 멋대로 튀어나간 것에 잠시 당황했지만, 팔을 거두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후작을 옥죄듯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천천히 더했다.
“컥, 커컥!”
후작은 정말 죽을 것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귀족들의 눈에도 공포가 깃들었다.
이때였다.
“각하!”
베른울프 백작이 절뚝이며 다가와 간청했다.
“부디 후작은 나중에 벌하시고, 지금은 주치의를 먼저 찾으십시오.”
“…….”
그 말이 옳았다. 지금은 키리아를 찾아나서는 게 시급했다.
대답 없이 후작만 노려보던 제논은 그를 팽개치듯 놓아주었다.
“콜록콜록!”
“사냥대회는 끝이다. 백작은 수도관리자의 책임을 지고 대형 마물이 출몰한 원인을 조사해라.”
단호한 지시를 남긴 제논은 곧장 혼자 사라졌다.
베른울프 백작은 굳은 얼굴로 제논의 명령을 이행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니 전통적으로 했던 폐막 연회도 취소하겠소. 수색에 도움을 주실 분들은 내게 와주시오.”
귀족들은 혼란스럽게 웅성거리며 백작과 이야기를 나눴다.
수행원들과 함께 캠프로 돌아가면서 놀브 후작은 얼얼한 목을 문질렀다.
‘빌어먹을 공작. 정말 나를 죽이려 했나?’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귀족들 앞에서 고위 귀족인 자신을 죽인다면 복귀를 영영 포기하는 일이 될 테니까.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후작은 음험하게 웃었다.
‘뭐 됐어. 어차피 승리는 내 것이 될 테니까.’
란페르세 공작의 마물 팔.
‘기대 이상으로 확실한 마물의 형체였다. 게다가 공포스러운 모습까지 보였으니 완벽해!’
이미 기사에 쓸 내용을 빠르게 적고 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선발대의 후방에 합류해 있던 것이다.
‘치부가 훤히 드러난 데다 주치의까지 없으니, 나의 승리나 다름없군. 흐흐흐.’
하지만 조금 전 목을 조른 답례는 해야겠지.
‘다시는 재기를 꿈꾸지 못할 정도로 추락시켜주마.’
후작은 주머니에서 작은 향로를 만지작거렸다.
고블린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마물 유인 아티팩트였다.
º º º
제논은 키리아의 흔적을 정신없이 찾아다녔다.
그의 눈은 냉철하게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런 한편, 머릿속으로는 또 다른 생각이 끊임없이 엉겨 붙었다.
‘내 탓이다.’
내가 키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야 했는데.
손을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전부 내 탓이야.’
끊임없이 자책감이 들었다.
키리아가 일반 수행원들과 함께 후방에 있던 건 그의 탓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논은 전부 자신의 책임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후회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고픈 말을 미루지 말 것을.
자신이 손을 뿌리쳤을 때 보았던 키리아의 충격 받은 표정이 떠올라, 제논은 입술을 씹었다.
그때 바로 사과하고 다시 손을 잡았어야 했다.
정색할 게 아니라 조금 더 웃어 보일 걸 그랬다.
“…아냐.”
제논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녀를 정말로 다시는 못 볼 것만 같다.
“무사하기만 해 주십시오, 키리아. …제발.”
감정에 반응한 제논의 오른팔이 혼자서 손톱에 날을 세웠다.
누구라도 공격할 듯 숨 막히는 마기를 뿜었다.
제논은 날뛰려는 마물의 팔을 억누르면서 키리아의 흔적을 쫓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헤맸을까.
제논은 마침내 단서를 발견했다.
“이건…!”
계곡의 바위틈에서 부서진 브로치를 발견했다.
일전에 키리아가 외래 진료비로 받은 것이라며 자랑하듯 보여준 아티팩트였다.
“망가졌군….”
주변에 키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곡이 있긴 해도 사람이 떠내려갈 만큼 깊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키리아는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위기를 벗어났음이 틀림없다.
다리에 힘이 풀린 제논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긴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그가 신에게 감사를 올린 건 마물병에 걸린 이후 처음이었다.
마른세수를 한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안도감에 젖었던 얼굴이 다시 굳어 있었다.
키리아가 지금도 안전할지는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초조했지만, 캠프로 돌아가 수색 인원을 데리고 오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그렇게 결정한 제논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키르륵!”
대여섯 마리의 대형 마물들이 제논을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전부 상급 마물들이다.
“키륵,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군….”
“귀찮은 것들.”
제논은 검을 들었다. 마물을 상대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단칼에 쓰러뜨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검기를 날리기 직전, 생각을 바꿨다.
키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
그녀의 독특한 방법을 나도 실천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을 배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따르도록 만드는 일 말이다.
그는 억누르고 있던 마물 팔의 고삐를 풀었다.
º º º
키리아가 놀브 후작에게 벼랑으로 떠밀린 직후.
“이 개자식아아아!”
키리아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바람에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키리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대로 죽긴 싫은데!
“아! 아티팩트!”
번쩍하고 자신이 챙겨온 물건을 기억해냈다.
루이스에게서 받은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주머니에 있었다!
비록 랜덤으로 이동되는 하급 아티팩트지만, 지금은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키리아는 주머니에서 아티팩트 브로치를 꺼냈다.
“어, 어떻게 작동시키더라? 두드리던가?”
그런데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진 나머지, 브로치가 손바닥에서 쇽 빠져나가고 말았다.
“악! 안 돼! 제발요, 선생님!”
키리아는 손을 쭉 뻗어 떨어지는 아티팩트를 간신히 탁 두드렸다.
그 순간.
번쩍!
강한 빛과 함께 추락하던 키리아의 몸이 사라졌다.
아티팩트는 그대로 바위 위로 떨어져 부서졌다.
“으?”
어깨를 움츠린 키리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엉덩이는 다행히 바닥에 안착해 있었다.
“…살았다!”
키리아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을 요리조리 살폈다.
다친 곳도 없었다.
기쁨의 안도도 잠시.
“그런데 여긴 어디지?”
땅에는 높게 자란 풀들이 가득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다.
“저기요―!”
혹시 수색대에게 들릴까 싶어 목소리를 높여 봤지만, 빽빽한 수목이 목소리를 흡수하는 듯했다.
“추락 지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테니 여전히 루쿠스 산이거나 아니면 숲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마물이 언제든 출몰하는 곳이고, 나는 차려진 밥상이라는 뜻?
“서열 1위 체면이 말이 아니다, 증말.”
투덜거린 후, 키리아가 막막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끼이.”
웬 꽃 한 송이가 키리아의 앞에 나타났다.
인삼 같은 뿌리로 잘도 걷는 이족보행 꽃.
“어, 꽃님아?”
꽃님이였다.
키리아가 부르자, 꽃님이는 따라오라는 듯 성큼성큼 뿌리를 옮겼다.
“어디 가? 기다려!”
키리아는 꽃님이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로 나오게 됐다.
조금 전까지 인적없는 산속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 공터는 상당히 인위적이었다.
하지만 키리아가 놀란 건 따로 있었다.
“저 나무들에 붙어 있는 것들… 설마 광석이야?”
키리아는 서둘러 나무 가까이 다가가 나무껍질이며 가지에 주렁주렁 붙어 있는 광석을 살펴봤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나무에 붙은 광석은 전부 생명석이었다.
이곳은 생명석 광산이나 다름없었다!
“…헐. 대박. 설마 나무에서 돌이 열릴 줄은.”
그때였다.
<두디어 이곳에서 만나게 돼꾸나.>
갑자기 아장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