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복작복작.
사냥대회 둘째 날인데도 캠프에선 대회를 시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색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고 백작의 다리에도 석화를 일으킨 ‘메두사꽃’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메두사꽃’의 명칭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키리아였다. 이후 다들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키리아는 메모장에 백작에게 들은 정보를 끄적거렸다.
[메두사 병의 원인 → 마물이 아니라 꽃? 검붉은색. 출처는?]
톡톡. 펜 끝으로 종이를 두드렸다.
“위험한 마물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러면 리안이 걸릴 일도 없었겠지.”
리안은 북부에 와 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잠깐. 위화감이 느껴지는데?”
북부에 온 적이 없는 리안이 어쩌다 메두사 병에 걸린 거지?
끙.
“에고, 모르겠다. 일단 메두사꽃을 발견해서 연구해보면 알겠지.”
안 그래도 곧 메두사꽃을 찾기 위해 수색대가 출발할 테니 말이다.
수색 범위는 루쿠스 숲 서쪽으로 이어진, 같은 이름의 루쿠스 산까지였다.
메두사꽃이 산에서 내려온 게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쿠스 산 역시 수도의 관리를 받는 곳이다.
하지만 숲보다는 마물이 자주 출현하기에 대비가 필요했다.
천막 바깥에서 사람들이 분주한 건 이 때문이었다.
탁.
메모장을 소리 나게 덮은 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혹시 모르니 공작님을 위해서 약을 더 챙겨놔야겠다.”
중얼거린 키리아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밖에 진열해놓은 독초 연고를 몇 개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잉? 다 어디 갔어?”
산처럼 쌓여 있던 연고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º º º
넓은 천막 안.
귀족들이 둘러앉아 비밀스러운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성공했어요?”
“물론이죠.”
대답한 사람이 스윽, 품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키리아의 독초 연고였다.
“마지막 딱 하나 있더군요.”
그들 대부분은 키리아와 놀브 후작의 승부에서 키리아 쪽에 승부수를 던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애향심을 자극받은 귀족들도 합류해 있었다.
“그런데 정말 독초로 만든 연고가 효과가 있을까요…?”
“베른울프 백작이 말했잖아요. 상처가 단번에 아물었다고요.”
“해보면 알겠죠.”
한 용감한 귀부인이 자신의 손바닥을 페이퍼 나이프로 샥 그었다.
얕지만 길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히익.”
다른 귀족들이 질색하는 신음을 냈지만 귀부인은 아랑곳없이 독초 연고를 상처에 발랐다.
그러자 시간을 되감기라도 한 듯 상처가 스르르 아물었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회복 속도.
“어머. 어머머.”
“잠깐. 진짜 아문 거요? 정말로? 만져 봐도 되겠소?”
귀족들은 제각기 안경을 고쳐 쓰거나, 부채를 빠르게 파닥이며 귀부인의 멀쩡해진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다들 제 눈을 의심하며 다른 상처로 연고를 시험해봤다.
그러다 마침내 인정했다.
이 독초 연고는 진짜배기라고.
황실 의료원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었다.
크으으.
가장 처음 나섰던 용감한 귀부인이 엄지손가락으로 따봉을 올렸다. 다들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뚜껑에 그려진 독초가 연고에 사용된 재료겠죠? 이것들 흔한 독초 아닌가요?”
“맞아요. 끈끈이풀과 하라핀 열매예요.”
“그런 꼴 보기 싫은 잡초로 이런 훌륭한 걸 만들 수 있다고요? 진짜 말도 안 돼요. 천재가 아닌가요?”
“음… 그런데 그 재료로 약을 만드는 방법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저도.”
“저도 들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들었다고요? 어디서 들은 걸까요?”
기억을 더듬던 한 귀족이 아, 하며 손바닥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주간 마법>인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귀족들이 움찔했다.
마탑에서 나온 그 잡지는 상류 사회에선 필수 교양서의 반열에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은 잡지의 학술적이고 어려운 기사는 잘 읽지 않았다.
잡지 뒤쪽에 있는 유머나 ‘신기방기한 세계의 마법들’ 코너, 그리고 소설만 부지런히 읽었다.
특히 ‘마법학교의 아리키’는 놓치지 않고 읽었다.
하지만 명색이 교양 있는 귀족이 소설만 쏙 골라 읽는다고 밝힐 순 없는 노릇.
다들 겉으로는 소설에 관심도 없는 척했고, 소설을 읽느냐고 묻지 않는 게 암묵적 예의였다.
그런데 그게 방금 깨져버렸다.
“…….”
모두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자작님도 보셨어요?”
“예, 저두.”
“아, 실은 저도….”
야 너두? 야 나두.
슬금슬금 커밍아웃이 번지면서 귀족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법학교의 아리키’로 동지애가 흘러넘쳤다. 단합력의 레벨이 올라갔다.
하지만 꼭 한 명은 초를 치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근데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 않습니까? 소설에 독초 연고가 나왔다고 해서 공작님의 주치의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요?”
이때였다.
모여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연관 있죠! 아리키가 실존 인물이고, 그게 공작님의 주치의라고 생각해보세요!”
“……!”
누가 말한 거지?
귀족들이 좌우를 두리번거렸지만 목소리를 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적 덕분에 귀족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아리키가 공작님의 주치의일 가능성이 있어요. 아리키가 있는 마법학교 묘사를 생각해보세요. 소문으로만 듣던 공작성 아닌가요?”
“그, 그럼 치킨하고 맥주가 실제 있는 음식입니까? 먹어볼 수 있는 건가요?”
“또 아리키의 발명품에는 마기 해독수라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 북부에 꼭 필요한 것 말예요.”
만약 정말로 아리키가 키리아라는 주치의라면.
‘북부의 자랑이 될 거야!’
‘드디어 우리도 상승세를 타나?’
부풀어 오르는 희망과 기대감으로 귀족들의 가슴이 주책맞게 두근거렸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보다 설렜다.
“저도 좀 압시다…. 아리키가 대체 누군데 그래요?”
“교양서도 안 보십니까?”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른 귀족들이 <주간 마법> 잡지를 척 내밀었다.
“일단 읽어보세요.”
그렇게 귀족들은 <주간 마법>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냈던 장본인은….
‘휴.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답니다. 스릴 최고!’
놀브 후작 때문에 키리아의 승리를 마음대로 기뻐하지 못해 답답해하던 릴리였다.
º º º
다음날, 제논이 지휘하는 수색대가 루쿠스 숲으로 들어섰다.
꽃을 목격했던 유일한 사람인 베른울프 백작 역시 선두에서 동행했다.
그는 어제 자신의 보좌관에게 지적을 받았다.
‘백작님. 감정을 참으시면 인상이 좀… 더러워지십니다.’
거울을 보니 정말 그랬다. 너무 더러웠다.
부모님의 원수에게나 보일 법한 얼굴을 공작님께 계속 보여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래서 지금 백작은 되도록 무난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각하. 이제 곧 루쿠스 산으로 들어갑니다.”
“…….”
“최근 조사에서 위험도 높은 마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포이즌 리저드 무리가 있었는데 케이브를 이동한 것인지 보이지 않더군요.”
“…….”
제논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놓고 고개를 돌려 백작을 외면해버렸다.
‘가, 각하…!’
내 실수가 이토록 컸구나!
백작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공정함과 청명함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가장 중요한 충심에 소홀하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만회하면 좋을까!
이때 제논은 생각하고 있었다.
‘키리아, 잘 따라오고 있겠지…?’
그는 백작이 옆에서 말을 거는 건 알았지만 대충 무시하는 중이었다.
수행원들과 함께 후방에 있을 키리아가 자꾸만 신경 쓰였으니까.
손을 거칠게 뿌리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수색이 끝난 후에 제대로 사과하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만 잠시 미루면 된다. 참는 건 익숙하니까.
제논은 그렇게 결심했다.
곧 후회할 결심인 줄은 모른 채였다.
그나저나 키리아, 정말 괜찮은 거겠지?
‘체력이 형편없던데….’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평가는 냉정한 제논이었다.
º º º
“헉, 헉… 제엔장….”
키리아는 체력을 쥐어 짜내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루쿠스 산은 초입부터 가팔랐다.
“아이고, 주치의님. 힘드시다면 부디 오리온 자작가에서 드리는 이 물병을.”
“렌탄스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드릴까요?”
각 귀족가의 수행원들이 연신 키리아에게 물병과 수건을 건네며 가문을 어필했다.
‘갑자기 왜 이래? 귀찮다고!’
키리아는 파리 내쫓듯 손을 휘적거리고는 끙차, 한 걸음 앞서갔다.
공작성 마물들이 그립다.
걔들이 있으면 손가마 타고 편하게 이동할 텐데.
‘뒤졌어, 메두사꽃. 발견되기만 해봐. 철저히 해부하고 연구해줄 거니까! 크앙!’
키리아가 점점 더 독이 오르는 그때였다.
“키에엑!”
갑작스런 이변이 터졌다.
루쿠스 산에 나타날 리가 없는 대형 마물이 나타났다. 자이언트 맨티스였다.
히히힝!
앞서가던 말들이 놀라 앞발을 들어올렸다. 당황한 후방 대열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대형 마물은 어느새 뒤에도 나타나 있었다. 그것도 떼를 지어서.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키르르륵!”
쾅!
“꺄아악!”
“으아아!”
육중한 마물이 대열 한가운데로 뛰어들자, 사람들은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이렇게 되면 각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꾸르륵! 구륵.”
오크 한 마리가 키리아를 발견하고는 먹잇감으로 정했는지 쿵쿵쿵 쫓아오기 시작했다.
“아 정말 재수도 없지!”
키리아는 힘껏 달아났다.
“헉, 헉!”
아, 방금까지 등산해서 힘들어 죽겠어!
키리아의 눈에 가파른 위치에 있는 샛길이 보였다.
발밑으로 보이는 루쿠스 숲과 계곡이 높이를 짐작하게 했다.
‘떨어지면 바위들 때문에 몸이 으스러지겠는데?’
그래도 저 샛길은 키리아가 지나가기엔 충분했다.
오크에겐 너무 좁은 길이라 통과만 하면 안전해질 것이다.
어차피 더 도망칠 체력도 없다.
키리아는 좁은 길을 옆걸음으로 조심조심 건넜다.
“쿠르륵!”
따라오던 오크가 좁은 길 앞에서 멈칫했다.
녀석은 돌이라도 던지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댔다.
“흐익.”
키리아는 더 빨리 움직였고, 다행히 돌덩이가 날아오기 전에 좁은 길을 전부 통과했다.
“휴. 살았….”
퍽!
“다…?”
키리아가 넓은 땅을 디디자마자 누군가가 거세게 키리아를 밀쳤다.
몸이 계곡을 향해 붕 떴다.
크게 뜬 그녀의 눈에 히죽 웃고 있는 놀브 후작이 비쳤다.
“이 개자식아아아!”
숲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키리아.
“폐막 연회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후작이 히죽 웃었다.
대형 마물들의 출현은 후작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눈엣가시를 처리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유언 정도는 들어줄 걸 그랬나? 흐흐흐.”
내려다보던 후작은 자리를 떴다.
º º º
비록 유언은 아니었지만,
“…헐. 대박.”
추락한 키리아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