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41)

70화

“이만하면 됐지?”

혼자 말하며 키리아는 끙차 몸을 일으켰다.

그러며 몸을 돌렸다가 뒤에서 살금살금 접근하던 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엥?”

“꺄악!?”

소스라치게 놀란 릴리는 뒤로 물러나려다 중심을 잃었다.

꽈당!

“악!”

“으. 아프겠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던 키리아는 넘어진 릴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으으, 네에… 아!”

몸을 일으키려던 릴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드레스 무릎 부근에 피가 점점 번지고 있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어디 봐봐요.”

“앗.”

키리아는 릴리의 드레스를 살짝 걷어 무릎을 살펴봤다. 운 나쁘게도 돌멩이에 찧었는지 무릎이 제대로 깨져 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확인한 릴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피가…. 우욱.”

익숙하지 않은지 헛구역질까지 했다.

그에 상처를 들여다보던 키리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에 그러면 어떡해요?”

“네?”

“릴리 양. 치료사 아니에요?”

귀족들 사이에선 릴리가 유명 인물인지, 북부 귀족들까지 릴리에 대해 심심찮게 입에 올리곤 했다.

그래서 키리아는 릴리에 대해서 자연히 알게 됐다.

“그것도 황립 의료원의 치료사라면서요.”

이런 상처를 자주 볼 일이 없는 평범한 영애라면 상관없지만 치료사는 그래선 안 된다.

수많은 환자를 보는 게 그들의 의무다.

개중에는 심한 부상을 입고 오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테고.

이 정도 상처에 헛구역질을 하면 치료사로서 곤란하다는 얘기다.

‘아차. 나도 모르게 혼내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네.’

같은 직업인이라 나서고 말았다.

“제가 너무 나섰네요. 그쪽 사정도 모르는데. 아무튼 이 상처는….”

어차피 릴리는 후작이 데려온 사람이 아닌가. 내게 적대적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처음이에요.”

“엥?”

“처음이에요! 절 이렇게 솔직하게 혼내주신 분은!”

릴리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기분 나빠할 거라 생각했는데, 초록빛 눈망울을 사슴마냥 빛내면서 키리아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다들 저를 사교계의 연약한 영애로만 보거든요. 의료원에서도요. 그래서 중증 환자를 돌보는 실습에서도 빠지게 되고….”

“그, 그랬어요?”

그건 기분 나쁠 만한데?

키리아는 릴리에게 약간 동정이 갔다.

‘그래도 이 손은 좀 빼주면 안 될까…?’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양손을 붙잡히니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을 꼼질거렸는데 오히려 릴리는 더욱 꽉 손을 밀착해왔다.

“제 잘못을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 선배님?”

“앞으로도 마음껏 지적해주세요. 부디!”

“저기… 싫은데요.”

“헉.”

설마 거절당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릴리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키리아는 힘을 줘서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빼냈다.

“당신은 놀브 후작 밑에 있는 거죠? 놀브 후작이 공작님을 싫어하는 건 알고요?”

“네…. 죄송합니다.”

“아뇨. 그쪽이 죄송할 문제는 아닌데 이거는 알고 싶네요.”

키리아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아까 왜 내 뒤로 접근했어요?”

“……!”

창백하게 질리는 릴리의 안색.

사실 키리아는 릴리를 끝까지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후작의 명령이었을 테고, 그럼 목적은 뻔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릴리가 빠르게 실토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 주치의님의 약을 몰래 가져가려고 했어요. 내일 백작님께 처방할 약을….”

“약?”

난 아직 약 안 만들었는디.

어리둥절해하던 키리아는 연고 통을 들어보였다.

“설마 이거 말예요?”

“네.”

“이건 백작님께 소용이 없어요. 왜냐면.”

키리아는 연고를 손가락에 퍼서 릴리의 다친 무릎에 펴 발랐다.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단순한 상처약이니까요.”

“어? 어어?”

릴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녀는 연고통과 자신의 상처를 번갈아 보며 믿을 수 없어했다.

“이, 이거 포션 아니죠? 정말 약이에요?”

“당연하죠.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연고라고요.”

“믿을 수가 없어요…. 후작님의 상처약도 이 정도로 효과가 빠르진 않아요. 대체 뭘 쓰신 거예요?”

키리아는 연고 뚜껑의 그림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독초요.”

“독초로 만들었다고요? 그건 정말 말도 안 돼요! 게다가 이 그림!”

잔뜩 흥분한 릴리가 연고 뚜껑을 가져가 자세히 살펴봤다.

뚜껑에 그려진 그림은 릴리도 아는 흔한 독초였다.

“이건 끈끈이풀과 하라핀 열매인데… 이걸로 약을 만드는 게 실제로 가능한 거였다고요?”

“물론 다른 재료도 들어갔고, 배합 비율도 중요하죠. 아무튼 주재료는 그 두 가지가 맞아요.”

그러자 뚜껑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릴리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볼이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약간의 광기마저 느껴졌다.

‘여주인공, 왜 이래?!’

당황한 키리아에게 릴리가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이건 아리키가 만든, 아리키만 아는 상처약 공식이라고요!”

“에에엥?”

황당해하던 키리아는 퍼뜩 떠올렸다.

‘조앤의 소설!’

키리아는 조앤에게 당부했었다.

자신의 활동을 소설에 차용하는 건 괜찮은데, 약의 자세한 제조법은 소개하지 말라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앤은 키리아의 당부를 지켰다.

‘다만 독초 연고의 주재료는 언급했던 거구나.’

그 정도로는 독초 연고를 따라할 수 없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아리키와 연결될 줄이야.

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릴리는 혼자 두 손을 휘저으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맙소사, 선배님이 아리키의 모델 맞죠? 그렇죠? 바보! 난 정말 바보야! 아, 이렇게 뵙게 되다니 너무 좋아. 숨이 쉬어지지 않아요…. 허억.”

릴리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될 일이야!?

“심호흡! 심호흡하세요! 자, 천천히!”

“후우… 하아… 후우….”

숨을 힘겹게 고르느라 릴리의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서, 선배님… 저….”

“네! 저 여기 있어요. 어디가 더 이상해요?”

“사인해 주세요….”

아무래도 여주인공이 이상하다.

키리아는 마음을 비웠다.

멍하니 생각도 비운 채 휴대용 만년필로 휘리릭, 익숙한 사인을 했다.

“정말 죄송한데 한 장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아버지도 아리키 팬이셔서….”

“…….”

군말 없이 한 장 더 해주고 악수까지 해줬다.

‘분명 난 그냥 아리키의 모티브일 뿐이었는데, 왠지 아리키가 두 번째 부캐가 된 것 같은 이 기분.’

현타 같은 게 왔지만 무척 행복해하는 릴리를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키리아에게도 이점이 두 가지나 있었다.

“그럼 잘 부탁할게, 릴리.”

“걱정마세요, 선배님!”

“아니 그냥 키리아라고 해줘.”

“네, 키리아 님!”

릴리가 후작의 지시 대신 키리아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점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릴리. 정말 괜찮겠어? 황립 의료원을 그만둬도.”

“호호. 그럼요. 키리아 님께 이것도 받았잖아요.”

릴리가 키리아의 독초 연고를 들어보이며 방긋 웃었다.

릴리는 남부에서 자신이 독점으로 독초 연고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직접 홍보하고 판매까지 한다는 얘기였다.

“저는 약제사로서는 아직 별 볼 일 없지만, 사교계와 홍보 시장에서는 영향력이 꽤 크답니다. ‘천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천사라도 독초 연고를 판다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게다가 네가 스스로 의료원을 그만두기 전에 후작에게 들키면 최악의 상황이잖아.”

“하지만 키리아 님이 승리하실 거잖아요?”

릴리는 천사처럼 웃었다.

그건 물정을 모르는 말이 아니라, 신뢰와 자신감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키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나, 너랑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네엣? 그, 그게 정말인가요! 아앗… 또 호흡곤란이….”

“적당히 좀 해.”

키리아가 릴리의 등짝을 때렸다.

º º º

후작과 대결을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다.

키리아는 제논과 일찌감치 와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의 일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던 키리아가 제논을 향해 살짝 몸을 기울이고 속닥였다.

“공작님. 좀 괜찮으세요?”

“…뭘 말입니까.”

“괜찮아요. 저한테까지 숨길 필요 없어요. 공작님 마음 제가 다 아는데요.”

“…….”

“다리는 못 놓아드리지만 마음만은 응원할게요, 화이팅!”

“응원하지 마십시오….”

제논이 제 이마를 감싸며 긴 한숨을 쉬었다.

얼마 안 있어 캠프 중앙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귀족들 대부분은 밤샘이라도 한 듯 피곤해 보였는데, 이상하게 눈동자만큼은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키리아는 별 생각 없이 그들을 봤다가 한 귀족과 눈이 마주쳤다.

그 귀족은 ‘믿고 있다구.’라고 말하는 듯이 고개를 굳게 끄덕이며 지나갔다.

“……?”

뭐야? 언제부터 나랑 아는 사이야?

그런데 뒤이어 다른 귀족들도 같은 행동을 했다.

한 귀족 부인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심리로 이러는 걸까?

‘…이래서 사람 사귀는 게 힘들다니까.’

키리아의 사교성이 한 단계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수행원들이 백작을 그늘진 곳에 마련된 자리에 뉘였다.

백작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발목의 석화는 이제 종아리로 향하고 있었다.

석화가 번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럼 지금부터 베른울프 백작님의 치료를 시작해주십시오. 먼저, 황립 의료원의 수석 치료사이신 놀브 후작님.”

“으흠.”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온 후작은 키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약은 준비 되었겠지.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체면은 차리게 해드리겠소.”

“어머, 천만에요. 전 자신 있어요.”

키리아는 생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자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제안했다.

“그래? 그렇게 자신 있다면 한번 먼저 해보시겠소? 그쪽이 이기면 군말 없이 승복하지.”

“…좋아요.”

키리아는 앞으로 나섰다.

짧은 순간 아무도 몰래 릴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키리아는 준비했던 약을 백작의 환부에 얇게 펴 발랐다.

귀족들의 눈에 핏발이 서고, 후작의 표정이 더욱 여유만만해지는 가운데.

키리아의 약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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