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자신의 천막으로 향하는 동안 릴리는 들뜬 마음을 만끽했다.
돈을 걸 때 떨리던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렸다.
이것이 일탈의 맛?
‘새로워. 짜릿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릴리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비어 있어야 할 천막에 누군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꺅! 아, 후, 후작님?”
“어딜 쏘다니는 게냐? 북부에선 내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는데.”
놀브 후작이 릴리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그가 못마땅히 혀를 찼다.
“네가 내 옆에 서 있어야 북부 귀족들의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 수 있을 거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릴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흥…. 뭐 됐다. 내가 여기에 온 용건은 따로 있으니까.”
“무엇인가요?”
후작이 수염 끝을 비비며 거만하게 말했다.
“공작의 주치의가 만드는 약을 네가 망쳐줘야겠다.”
“네?”
믿을 수 없다는 듯 릴리가 되물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죄송하지만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후작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 지시는 후작으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굴지 말거라. 그 주치의가 만드는 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더 설명해줘야 하느냐?”
“죄,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릴리는 간청하듯 말했다.
“후작님은 황실의 수석치료사시잖아요.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분명 실력으로 뒤지지 않으실 텐데요.”
“뒤지지 않는다고? 천만에! 내가 한 수 위다. 그렇고말고!”
“그렇담 왜….”
탕! 후작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려치자 릴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는 후작이 책상을 내려친 자세 그대로 굳은 채 꾹 다문 입술을 씰룩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혹시 손바닥이 아프신….”
“시, 시끄럽다!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냐? 내 조수다. 내 한 마디면 넌 황실의료원에서 내일이라도 당장 제명당할 수 있어. 그럼 너의 한미한 가문은 어떻게 될까. 응?”
“……!”
릴리의 초록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약제사는 릴리가 가진 유일한 장래 희망이자 목표였다.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후작에게 밉보인다면 인생의 꿈은 영영 멀어지리라.
동시에 남작에 불과한 자신의 가문 역시 큰 타격을 입겠지.
자신이 사교계 유명인사가 되고 황립 의료원까지 들어가자 아버지는 매일 행복해했다.
그런데 다시 힘들었던 때로 돌아간다면….
“…….”
“내 말만 잘 들어라. 그럼 넌 언젠가 내 뒤를 이을 테니까. 가문의 영광이 될 거다.”
“…….”
릴리가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후작은 흡족해했다.
역시 릴리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공작의 주치의는 망신을 당하겠지.
‘근본도 모르는 계집이 날 이긴다고? 절대 그리 둘 수는 없지.’
사실 후작은 제논의 제안을 승낙한 후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와 바로 약 제조에 착수했다.
그런데 주치의 계집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내 처방이 부작용을 일으킬 거라고?’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전문 서적을 펼쳤다.
안 그래도 처방 대상이 평범한 환자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니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야명초와 레솔루티오 뿌리의 조합이 일부 특수 환자들에게 부작용을 일으킨 선례가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라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리가 돌로 변하기 시작한 백작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 중에서도 유독 특수한 경우다.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이 후작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자신의 처방이 백작에게 부작용을 일으키고, 공작과 계집이 승기를 가져가는 모습.
그리고 황실 수석치료사의 자존심이 북부 놈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공작은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잃으리라.
‘절대 그렇게 두진 않겠다. 절대…!’
고개 숙인 릴리의 앞에서 후작은 벌떡 일어났다.
“내 말 잘 알아들었겠지? 너라면 그 계집에게도 의심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게다. 넌 남부의 천사니까.”
“…네.”
후작이 나간 후 릴리는 탈진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을 모아 얼굴 앞에 갖다 댔다.
“어쩜 좋지…?”
릴리는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던 <주간 마법>을 꺼냈다.
페이지를 펼쳐 ‘아리키’의 일러스트에 대고 간절히 물었다.
“아리키라면 어떻게 할까? 도와줘, 아리키….”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릴리는 망설임과 결의가 뒤섞인 얼굴로 키리아를 찾아갔다.
숲의 초입에서 무언가를 하는 듯 쪼그려 앉아있는 키리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가 만든 약으로 보이는 통이 하나.
꿀꺽.
릴리는 천천히 키리아의 뒤로 접근했다.
º º º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키리아는 제논의 천막 앞으로 갔다.
때마침 제논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 공작님. 마침 딱 만났네요.”
“…키리아.”
키리아를 본 제논은 어깨를 작게 흠칫했다.
하지만 키리아는 그것을 모른 채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젯밤에 바쁜 일이 있으셨어요? 마나 진단을 하러 갔더니 들여보내 주시지도 않고 돌아가라 하시고.”
“아니오. 그런 건….”
“에이, 됐어요. 바쁘실 수도 있죠. 아무튼 손 이리 주세요.”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 있는 만큼 키리아는 제논의 마물 팔이 발작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분명 제논도 동의한 것이었고.
어젯밤에 마나 진단을 못 했으니 오늘 아침 일찍 다시 찾아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 아니! 됐습니다.”
키리아의 손끝이 닿자마자 제논이 못 만질 것에라도 닿은 것처럼 손을 화들짝 빼는 게 아닌가.
매몰차게 느껴지는 반응에 키리아는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제논도 실수를 깨달은 듯 당황한 눈치였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그러고는 성큼성큼, 키리아를 남겨두고 가버렸다.
남겨진 키리아는 황당했지만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의 제자한테 마음을 말해버렸으니 창피할 수도 있겠지.”
공작님은 이불킥이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 타입이구나.
키리아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º º º
제논은 깊은 한숨을 토하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하….”
그녀와 맞닿은 손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통제가 안 됐다. 마물 팔만큼 골치가 아팠다.
그녀를 옆에 붙잡아두겠다는 욕심은 전부터 있었다. 점점 독점욕이 생기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메데이아의 제자로서, 유능한 인재로서, 자신을 지탱해줄 든든한 아군으로서의 욕심인 줄 알았다.
그녀가 해주는 마나 진단이 점점 기꺼워지는 것도, 때로는 자신이 먼저 손을 잡고 싶은 이유도 그래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야 알았다.
자신은 그녀에게 더 닿고 싶었다.
머리카락, 뺨, 손… 그 이상까지.
릴리라는 여자가 했던 말에 왠지 짜증이 났던 이유도 알았다.
1호 팬이라는 특별한 자리를 감히 넘보려 했으니까.
그건 내 것이다.
키리아와의 모든 특별한 관계는 자신이 독차지하고 싶었다.
…이런 게 정상인가?
하지만 신전에서 배운 사랑하고는 너무 거리가 먼데?
흑심이란 걸 처음 품어보는 전직 성기사단장 제논은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순수하게 자신의 건강을 위해주는 사람에게 흑심을 품다니.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추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대해주는 키리아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키리아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하지?”
로하넨이나 앨마에게 상담해볼까?
“…왠지 싫군.”
허물없이 가까운 가족 같은 사람이라 더욱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메데이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제자에 대한 감정을 상담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였다.
마땅한 답이나 도움을 받을 사람을 찾지 못한 채 제논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º º º
제논의 마나 진단을 허탕친 후, 키리아는 꽃님이가 사라졌던 장소로 왔다.
“꽃님아!”
혹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키리아는 숲을 향해 외쳤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진짜 영영 가버린 걸까?
“치. 매정한 녀석. 이럴 줄 알았으면 꽃잎이랑 줄기 좀 더 뜯어낼 걸.”
어쩔 수 없다. 혼자 달려 가버린 꽃을 이 넓은 숲에서 찾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할 일이나 하자.
어차피 여기에 온 건 꽃님이를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니까.
“어디 보자. 백작님이 쓰러져 있던 곳이 여기쯤이었지?”
기억을 더듬어 베른울프 백작을 발견한 곳을 찾아낸 키리아는 주변을 탐색했다.
메두사 병에 대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앗, 이게 아직도 여기에.”
독초 연고가 여전히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키리아 자신도 경황이 없어 깜박 잊고 있었다.
연고통을 챙긴 키리아는 한동안 주변을 샅샅이 탐색했다.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숲 초입에 심상찮은 무언가가 있다면 진즉 발견됐을 것이다.
“잠깐, 그럼 왜 수색대가 여기 있는 백작님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던 거지? 백작님이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나?”
그리고 여기까지 혼자 이동한 거고?
…그 다리로?
갸웃거리던 키리아는 조금 더 안쪽을 살펴보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응? 이건 뭐지?”
키리아의 시야에 무언가 유리 조각 같은 게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초록색의 수정 광석이었다.
안쪽에 희미한 금빛이 맴도는 특이한 광석.
“이거… 생명석이잖아?”
‘포이즌 리저드 킹의 말이 맞았어!’
키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생명석의 출처는 바로 이곳 루쿠스 숲이라는 것이 이로써 확실해졌다.
키리아는 연고통을 옆에 내려두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생명석 조각들을 손바닥에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로 누군가의 인영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