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잃은 베른울프 백작의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대체 무슨 마물의 짓일까요?”
키리아는 말없이 연신 입술을 짓씹었다.
‘메두사 병의 표본. 반드시 내가 데려가야 해.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힘들 것 같은데….’
잠시 뒤, 숲을 수색하던 사람들도 캠프로 돌아왔다.
캠프에 있던 수행원들이 그들에게 베른울프 백작의 놀라운 상태를 얼른 알려주려 했다.
그런데 먼저 놀란 건 오히려 수행원들이었다.
“마, 맙소사!”
“저 석상은 뭐죠?”
수색하던 사람들이 가져온 괴이한 자세의 석상들 때문이었다.
“보면 모르느냐. 석상이지.”
유난히 똥 씹은 표정의 놀브 후작이 대답했다.
너무나 생동감 있는 자세의 석상 두 개와 다리가 돌로 변하고 있는 베른울프 백작.
귀족들은 둘 사이의 연관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베른울프 백작….”
제논 역시 낮게 신음했다.
백작을 이대로 두면 저 석상처럼 변할 게 분명했다.
당황하던 귀족들 중 몇몇이 놀브 후작에게 분노를 향했다.
“놀브 후작,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예?”
“안전하게 관리했다더니, 사람을 돌로 만드는 위험한 마물이 있잖아요! 설마 전혀 파악도 못 하고 있었습니까?”
“크흠!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결국 남부 귀족의 한계지!”
“그대는 황실 수석치료사가 아닙니까. 책임지고 백작을 치료하세요!”
놀브 후작은 진땀을 흘렸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백작을 죽일 수 없어.’
자신이 백작을 맡게 될 텐데, 백작이 죽으면 모든 혐의와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테니 말이다.
‘백작을 죽여 방해물도 제거하고 공작도 궁지에 몰 작정이었건만.’
내키진 않지만 백작을 정말 치료해야 했다.
‘가만. 오히려 이게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백작을 살려내야 이번 일이 완전히 사고였음을 입증해줄 것이다.
게다가 백작에게 빚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든 북부 귀족들이 자신을 베른울프 백작을 살린 은인으로 알게 될 테니까.
결심한 놀브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제 명예를 걸고 백작님의 정신이 돌아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논이 바로 물었다.
“방법이 있는 건가?”
백작의 상태를 천천히 진단해 본 놀브 후작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마비 치료제로 쓰이는 레솔루티오 뿌리와 정신을 일깨우는 야명초를 처방할까 합니다. 레솔루티오 뿌리는 전신마비 환자에게 탁월한 효과를 보인 사례도 있지요.”
귀족들은 그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백작을 맡아주어서 안도했다.
놀브 후작은 황실 수석치료사니까.
그 외에는 백작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라고, 귀족들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후작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명,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거 아닌데요.”
바로 키리아였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 보겠소? 아가씨.”
별다른 존칭 없이 아가씨라고 부른 건 귀족과 평민의 신분을 잊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생이 귀족인 키리아는 그 경고를 즈려밟고 흔쾌히 다시 말해줬다.
“방금 말씀하신 그 처방, 틀렸다고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면 후작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지금 황실 수석치료사의 처방을 부정한 거요?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전 란페르세 공작님의 주치의죠. 그 정도 의견은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 그럼 주치의 아가씨는 백작님께 어떤 처방을 해야 한다고 보시오? 어디 그 고견 좀 들어봅시다.”
“얼마든지요.”
‘메두사 병에 관해서라면 제가 그쪽보다 한참 선배거든요?’
아직 메두사 병의 치료법은 키리아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약이 아니었으면 리안은 진즉 석상이 됐을 거란 말이지.’
의식을 돌아오게 하고 증세를 늦추는 방법.
바로 그게 키리아가 리안에게 해왔던 처방이다.
키리아는 팔짱을 낀 채 막힘없이 말했다.
“석화의 진행을 늦추려면 레솔루티오 뿌리가 아니라, 오히려 신경을 마비시키는 소포르 뿌리를 써야 해요.”
독초에 어느 정도 익숙한 북부 귀족들은 소포르 뿌리가 위험한 독초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키리아의 말에 기겁했다.
“말도 안 돼!”
“누구 전신마비 환자로 만들 일 있어?”
귀족들의 항의에 키리아가 보충 설명을 했다.
“야명초를 써야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야명초와 레솔루티오 뿌리를 이 환자에게 같이 쓰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거예요.”
웅성웅성.
야명초는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보편적인 약초다. 레솔루티오 뿌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다만 메두사 병 환자와는 상극일 뿐.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키리아 외에는 없었고, 그래서 귀족들은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놀브 후작 역시 염소수염을 씰룩이며 웃었다.
‘역시 권위자한테 밀리려나?’
키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메두사 병의 단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몰래 접근해 백작을 빼돌릴 각오까지 했다.
‘저 환자는 내 거라고.’
“키리아.”
갑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논이었다.
깜짝 놀란 키리아는 그를 돌아봤다.
“네?”
“그대가 말한 부작용이라는 것, 위험한 겁니까?”
“…음, 곧장 치료하면 위험하지 않아요. 온몸에 붉은 반점들이 마구 생기고 고열을 일으키거든요. 당연히 병에는 전혀 차도가 없고요.”
“그대가 바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부작용 자체를 바로잡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럼 됐습니다.”
“뭐가요?”
제논은 대답 대신 웅성대는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처방이 옳았는지 따져 보면 되겠군.”
사람들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따져 본다 하심은…?”
“놀브 후작. 그대가 백작에게 약을 처방하도록 해.”
“역시! 감사합니다, 공작님.”
“하지만.”
제논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대의 처방에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확인되는 즉시 내 주치의가 백작을 맡는다. 동의하는가?”
“…이해할 수 없군요. 아무리 공작님의 주치의라지만 독초를 약으로 쓴다는, 저 괴짜 약제사를 더 신뢰하시는 겁니까?”
후작이 도발하듯 물었다.
“이 자리에 계신 귀족분들이 저를 선택했는데도요?”
“그래.”
제논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난 내 주치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대들과 같은 선택을 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
제논의 말에 놀란 건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키리아도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저렇게 말한 이상, 키리아의 실패는 제논 본인의 실패와 직결된다.
‘내 입지만이 아니라 공작님 본인의 입지까지 전부 올인해 버리다니!’
게다가 베른울프 백작은 공작님이 아끼는 사람인데, 망설임 없이 나에게 전부 맡겼다.
날 믿고 있는 거야.
새삼 공작님이 날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 건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어.’
초조함으로 흐렸던 키리아의 눈동자가 반짝임을 되찾았다.
백작은 분명 놓칠 수 없는 메두사 병 환자이지만….
‘그 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야.’
내가 반드시 회복시켜주겠어.
“전 자신 있어요.”
키리아가 제안을 승낙하자 놀브 후작도 발을 뺄 수 없게 되었다.
그 역시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렇소. 내일 오후 3시까지 약을 완성하도록 하지. 모두의 앞에서 처방할 거요.”
“좋아요. 저도 준비하죠.”
“흥. 주치의 아가씨에게 기회가 돌아갈 일은 없을 거요.”
“두고 보면 알겠죠.”
잠시 후작과 눈싸움을 한 키리아는 코웃음을 치듯 홱 몸을 돌렸다.
후작 역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º º º
일이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흥미를 감추기 어려웠다.
황립 의료원의 수장과 독초를 쓴다는 괴짜 주치의의 대결.
그래선지 몰래 내기를 하며 돈을 거는 풍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놀브 후작은 황제가 인정한 수석치료사요. 역시 그의 처방이 옳지 않겠소?”
“하지만 공작님께서 올인하실 정도라면 주치의도 만만치 않을 거예요.”
“남부의 최고 치료사를 북부의 주치의가 이긴다면….”
“…짜릿하긴 하겠네요.”
“남부 녀석들 잘난 체와 횡포가 지긋지긋하긴 하죠.”
서로 눈치를 보는 귀족들 사이에서 한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전 놀브 후작에 100골드 걸죠.”
“그렇다면 저도….”
이때였다.
“1000골드. 주치의님께 올인입니다.”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금화 주머니를 호쾌하게 밀었다.
“눈앞의 돈이 아니라 마음을 따르라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거든요.”
귀족들이 놀라 쳐다보는 사이, 여인은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남겨진 귀족들은 멍하니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부끄러웠다.
얼굴 모를 한 여인의 올인이 잠들어 있던 그들의 애향심을 일깨워주었다.
우리가 건강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남부 편을 들어야겠어? 그쪽에 당한 게 얼만데?
골드가 문제냐? 이건 북부 귀족의 자존심을 증명하는 문제다!
“공작님 주치의에게 1500골드!”
“난 1700골드!”
“놀브 후작에게 걸었던 돈 취소!”
모두의 오기로 천막 안이 후끈해졌다.
너나 할 거 없이 다들 금화 주머니를 턱턱 내놓았다.
º º º
북부 귀족들에게 파문을 일으키고 홀로 빠져나온 여인은 모자를 들었다.
“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흥분으로 얼굴이 발간 릴리였다.
처음으로 도박판에 끼었다!
그것도 모두가 불량하다고 여기는 쪽에 걸었어! 짜릿해!
“내가 1000골드를 걸었으니 주치의님 체면도 살았을 거야. 어쩌면 큰돈을 건 나를 알아보시고 감동해주실지도 몰라.”
팬으로서의 활동, 성공적이야!
릴리는 키리아가 내기 내용을 알 리 없고 앞으로도 알 일 없단 걸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