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되자 참가자들이 속속 돌아왔다.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고블린 출몰 사건을 떠들어댔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제논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많아졌지만.
정작 캠프로 돌아온 제논이 가장 먼저 찾는 이는 키리아였다.
“공작님.”
마침 키리아가 제논을 마중 나오고 있었다.
키리아를 발견한 제논의 입가에 저도 모르는 미소가 살짝 맺혔다.
“아티팩트는 처리하셨어요?”
“그런 아티팩트가 있다는 게 여전히 놀랍지만, 네. 물론입니다. 이제 그건 기능하지 않을 겁니다.”
제논은 대회가 시작하기 직전, 아티팩트를 자신에게 맡기던 키리아를 떠올렸다.
마물 유인 아티팩트라며 사정을 간략히 설명한 그녀는 “마물들이 공작님을 노리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했었다.
그에 제논은 아주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었다.
키리아가 자신의 안전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데 아니었다.
‘공작님은 마물들도 물리치고 캠프도 지킬 수 있으실 테니까요. 그렇죠?’
키리아는 그가 모두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었다.
그 생각을 알게 되자 제논은 가슴속에 온기가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도로 오는 마차에서처럼.
“…….”
별안간 그때의 미묘한 스킨십이 떠오르자 제논의 귓바퀴가 붉어졌다.
제논이 말이 없자 키리아가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왜 그러세요?”
“…키리아. 그땐 미안했습니다.”
“네? 언제요?”
“마차에서.”
“…아.”
키리아의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자신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던 손바닥의 감촉이 문득 되살아나는 듯했다.
“괘, 괜찮아요. 실수잖아요?”
“…실수?”
“네. 실수요. 그… 음… 제가 원래 볼에 머리카락을 잘 묻히고 다녀요. 하하….”
키리아는 멋쩍게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검지로 감아 꼬았다.
어쩌면 정말 뭐가 묻어서 손을 댄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제논이 간단히 부정해버렸다.
“실수가 아닙니다. 난 그때 그러고 싶었습니다.”
“……!”
두근. 키리아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왜… 요?”
“왜냐면….”
부정할 땐 단호하던 제논이 이번엔 미간을 점점 찌푸렸다.
그 자신도 답을 잘 모르는 듯했다.
“왜냐면… 그저, 그대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러고 싶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군요.”
“…….”
무, 무슨 의미지?
“그대는 보고 있으면 작은 동물 같아서 자꾸만 만지고 싶고….”
이런 의미였냐.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갑자기 고해성사 톤이다.
키리아는 손을 들어 제논의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제가 동물 같아서 무심코 만졌단 말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허….”
키리아는 허탈함과 안도가 반반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설마 고백이라도 하나 싶어 긴장했는데, 과연 공작님다운 대답이라고나 할까.
‘괜한 걱정이었네.’
원작에 따르면 제논은 공작가 기사단에서 훈련 후 곧바로 신전의 성기사로 훈련을 받았고, 이후 전장에 나섰다.
흡사 남중 남고 군대 테크.
애정전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키리아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차라리 잘 됐어. 아무나 맺어지게 둘 수는 없지.
그럼 그럼. 누구의 소중한 팬인데.
“아, 공작님.”
키리아는 이참에 제논에게 당부해두기로 했다.
“다른 영애의 손수건을 함부로 받으시면 안 돼요.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무슨 오해 말입니까?”
“손수건을 받으면 특별한 사이로 발전할 의사가 있다고 넌지시 표시하는 거거든요. 설마 릴리라는 영애와 특별한 관계가 되실 건 아니죠?”
“내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제논이 단호히 대답했다.
“나한테 특별한 사람은 메데이아뿐이니까.”
“……!”
두근! 키리아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특별… 이요?”
공작님이 메데이아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그러니까, 숲지기가 나를?’
그동안 숲지기가 보낸 편지에서 존경과 감사, 선망과 애정을 느꼈던 키리아였다.
하지만 연애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숨기고 있던 거였나?’
키리아는 애써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크흠! 공작님한텐 메데이아 스승님이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제논이 퍼뜩 되물었다.
“…네?”
“특별한… 여, 여성이요. 메데이아가 공작님한텐 특별한 여성이라는 거잖아요.”
“특별한 여성….”
제논은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했다.
키리아가 그 얼굴을 보더니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스승님껜 비밀로 할 테니까.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죠?”
“아, 네.”
“…에헴!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삐걱대는 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키리아.
남겨진 제논은 왠지 껄끄러운 입 안을 혀로 느릿하게 더듬었다.
단어 하나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메데이아에 대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구원자이자 특별한 사람이었다.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 애정을 독점하고 싶으면서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키리아가 말한 ‘특별한 여성’과는 아귀가 살짝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그 말에 더 어울리는 건….
“……!”
뒤통수라도 맞은 듯 제논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키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논의 입술에서, 그답지 않은 망연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어?”
º º º
한동안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있던 제논은 어느새 사위가 어둑한 것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제논은 성큼 놀브 후작을 찾아가 말했다.
“베른울프 백작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 마십시오, 공작님. 사냥에 몰두해 시간을 잊고 계신 거겠죠. 곧 돌아오실 겁니다.”
놀브 후작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몇십 분이 더 흘러도 백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제논이 먼저 나섰다.
“찾아봐야겠다.”
공작이 그렇게 말하니 다른 귀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곧 사람들이 조를 지어 베른울프 백작 수색에 나섰다.
한편, 키리아는 바깥의 상황에 신경을 끈 채 자신의 천막 안에서 꽃님이의 잎사귀와 꽃잎을 분석해보고 있었다.
북부 주요 귀족들이 모인 자리라고 해도 여전히 사교활동에는 별 관심이 없는 키리아였다.
‘내 할 일이나 해야지.’
메데이아를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게 말이야.
“…에휴.”
키리아는 핀셋을 든 채 어깨를 작게 늘어뜨렸다.
“숲지기가 설마 그런 마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메데이아를 향한 제논의 고백은 기뻤다.
하지만 당장 고백을 받아들일 정도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팬의 마음이 고맙고 애틋할 뿐이다.
게다가 키리아는 ‘숲지기’라는 팬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확신도 없이 숲지기랑 사귀었다가 헤어지면 분명 하나뿐인 팬을 영영 잃어버릴 것이다. 파국이었다.
그리고 또 모르는 일이다.
연애고자 외길인생인 공작님이 팬으로서의 감정과 연애 감정을 헷갈려 하고 있을지도.
응. 가능성 있지.
그런 고로,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메데이아라는 걸 들키지 말자.”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겠다고 판단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였다.
“끼잉…?!”
꾸벅꾸벅 졸고 있던 꽃님이가 봉오리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아티팩트 탐지기로 활약했을 때처럼, 빛을 내며 고개를 좌우로 돌려댔다.
“무슨 일이야?”
“끼이잉.”
방황하던 봉오리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설마 다른 아티팩트라도 찾은 거야?”
조금 긴장한 채 키리아는 케이프 안에 꽃님이를 숨기고 천막을 나왔다.
봉오리가 가리킨 곳으로 가까이 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숲인데?”
“끼잉 낑!”
“들어가자고? 안 돼. 여긴 공작성이 아니라구.”
이쪽의 마물들은 아직 공작님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키리아의 서열하고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안전한 숲이라고 해도 나한텐 위험해. 알지?”
“끼에엥!”
키리아가 단호히 고개를 젓자, 꽃님이가 별안간 화분에서 뛰쳐나왔다.
“앗!?”
연약해 보이는 두 갈래 뿌리로 겅중겅중 빠르게 뛰어가더니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기다려!”
내 표본!
키리아는 꽃님이의 뒤를 쫓아갔지만 숲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디로 간 건지 어차피 보이지도 않았다.
“빨리도 사라졌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보이지도 않는데 무작정 쫓아가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발길을 돌렸다. 기회를 봐서 공작님과 다시 찾아오면 되니까.
낯익은 물건이 시야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어? 이건 내 연고 아니야?”
독초가 그려진 연고통. 틀림없었다.
“이게 왜 여기에….”
가까이 다가가 떨어진 연고를 주워든 키리아는, 근처에 쓰러져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베른울프 백작이었다.
“백작님!”
깜짝 놀라 다가간 키리아는 얼른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연고가 남아 있는 다리 상처와 얼굴.
상처는 말끔히 치료된 모양인데 아무리 부르고 뺨을 두드려봐도 의식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키리아는 문득 백작의 숨소리가 조금 답답하게 들리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몸을 살피다가 유독 다리가 뻣뻣한 것을 발견했다.
백작의 통나무 같은 다리에서 바짓단을 걷은 키리아는 흠칫했다.
“……!”
백작의 발목에 뚜렷한 회색빛 멍이 보였다.
만져보니 차갑고 딱딱했다.
마치 돌처럼.
“메두사 병…!?”
뜻밖의 발견에 키리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안 외의 다른 환자가 나타나다니!
이건 중요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단서였다.
키리아는 다급하게 백작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백작님, 어떻게 된 거죠? 어디서 걸리신 거예요? 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초조해진 키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얼른 숲 바깥을 향해 외쳤다.
“여기,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