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정말 대단했습니다, 공작님!”
고블린들이 물러간 후,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제논에게 다가갔다.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적어도 제논의 붉은 눈을 보고 겁먹었을 때보다는 나은 모습.
제논의 주변으로 조금씩이나마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크흡.
키리아는 감격스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아싸였던 내 팬이 인싸가 되어가는 모습이라니!’
“끼히흥.”
꽃님이까지 덩달아 잎사귀로 봉오리를 틀어막고 있었다.
감동의 꽃가루를 잎사귀로 훔치던 꽃님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키리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끼에, 끼잉?”
“뭔 말이야….”
“낑낑끼잉!”
쌓여 있는 연고들과 키리아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는 꽃님이.
키리아는 무슨 말뜻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내 약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좋은 기회를 왜 마다했냐고 묻는 거야?”
끄덕끄덕!
역시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고블린들의 습격으로 누군가가 다치면, 억울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독초 연고를 선보일 기회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키리아는 그런 것에는 미련 없다는 듯 시원하게 대답했다.
“내가 이득 보려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라고? 난 양심 있는 사람이라 그러면 밤에 잠 못 자.”
“…….”
“게다가 그런 짓은 독초 약제사에 대한 편견만 강화하는 거고.”
“끼히흥.”
꽃님이는 또다시 잎사귀로 제 봉오리를 틀어막았다. 상당히 대견해하는 눈치.
그러나 키리아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아도 부상자는 나올 거잖아? 여긴 사냥대회니까.”
키리아가 케케케 웃었다.
“부상자를 잽싸게 낚아채야지. 그 사람들은 내 사냥감이라고.”
“…낑.”
퓨우. 한숨 쉬는 듯한 꽃님이.
그런 꽃님이를 신경 쓰지 않은 채 키리아는 연고 하나를 집었다.
“아, 공작님께도 하나 드려야지… 응?”
연고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빈틈없이 쌓아놨었는데, 옆구리가 비어 있었다.
누군가 한 통 가져간 것이다.
“누가 가져갔지…?”
궁금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용감한 사람이 한 명은 있었네.”
연고를 챙긴 키리아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제논을 발견했다.
“공작….”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부르려던 키리아는 멈칫했다.
지금 공작님 앞에 있는 여자는….
‘설마 릴리?’
쟤도 여기에 와 있었나?
이제야 릴리를 발견한 키리아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데뷔탕트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라 반갑기까지 했다. 뭐, 저쪽은 날 모를 테지만.
“공작님, 방금 전의 활약 정말 멋지셨어요. 괜찮으시다면 이 손수건을 써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릴리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드는 제논이 보였다.
별생각 없던 키리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둘이 함께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면,
“공작님은 릴리한테 가면 서브남이 될 확률이 높잖아?”
원작이 이미 틀어졌다 해도 로맨스는 또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어떻게 키우고 있는 팬인데 고작 서브로 만들 수는 없었다.
“원작 집어쳐.”
원래도 별 신경은 안 썼지만, 키리아는 더욱 원작에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하고 둘 사이를 막기로 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이 커플은 안 돼!’
키리아가 막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을 때.
릴리는 제논이 손수건을 가져가려 할 때 손수건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
제논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조금 가까이하고 빠르게 속삭였다.
“각하. 괜찮으시면 각하의 주치의님과 제가 만남을 좀 갖고 싶습니다.”
“…왜죠?”
“그… 약제사로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요.”
제논은 릴리가 후작이 데려온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심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독초를 다룬다는 걸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알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 그분의 팬 1호가 되고 싶어요.”
“뭐라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편지도 주고받고 싶고요. 주치의님께는 아직 팬이 없으시죠? 제가 첫 번째가 되고 싶어요.”
“…….”
제논이 왠지 모르게 울컥하던 그 순간.
화가 난 표정의 키리아가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연고 통을 불쑥 내밀었다.
“공작님, 연고 챙겨 가셔야죠!”
“키리아? 왜… 화를 내는 겁니까?”
“제가 언제요!”
“지금.”
“아닌데요? 암튼 챙겨가시라고요. 빨리 사냥 가시고요. 왜 미적거리고 계세요?”
“아니, 밀지 마십시오. 갈 겁니다….”
귀족들은 주치의에게 혼나면서 숲으로 말을 끌고 사라지는 공작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릴리는 하아, 황홀한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한테까지 저런 박력이라니, 주치의님 역시 멋져….”
º º º
저벅저벅.
베른울프 백작은 몇십 분째 검 한 번 꺼내지 못했다.
마물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숲의 입구 쪽에서 뭔가 소음이 일 때도 있었는데, 다가가기도 전에 어느새 조용해져서 김이 빠졌다.
“안전관리를 너무 심하게 했나.”
백작이 약간 후회스럽게 투덜거렸다.
공작님께 괜한 소문이 돌지 않게 하려고 동쪽 숲의 위험한 마물을 모조리 잡아버린 그였다.
“아니지.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보다 심심한 게 나아.”
푸르릉.
말이 투레질을 했다.
“하하, 너도 동의하는 거냐? …음?”
백작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 꽃잎은?”
그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불길한 검붉은색의 꽃잎을 내려다봤다.
공작성에서 내려오는 공문과 더불어, 수도 주변의 독초를 통제해온 백작이었다.
그런데 이런 색깔의 꽃잎은 처음이었다.
희한한 건 그 꽃잎이 타다 만 일부라는 것이다.
“심상찮은 빛깔을 보아 독을 가진 꽃이 분명한데, 어쩌다 탄 거지?”
혹시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독초를 제거하고 있는 건가?
“놀브 후작이? 아니, 그 족제비는 제 욕심만 챙길 줄 알았지 그럴 놈이 아닌데.”
중얼거리던 그는 장갑을 꼈다. 꽃잎을 만지기 위해서였다.
그때, 풀숲 일각에서 날카로운 금속이 번뜩였다.
“……!”
심상찮은 공기를 감지한 백작이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챙!
이어 다른 방향에서도 화살이 날아왔고, 백작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히히힝!
빗발치는 화살에 놀란 말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백작을 향해 돌진했다.
“이런!”
다급히 몸을 숙인 덕에, 말은 그를 뛰어넘어 숲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암살자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피융!
“크윽!”
결국 화살 하나가 백작의 허벅지를 맞추고 말았다.
“흐흐. 강하다고 소문났던 베른울프 백작도 애꾸가 되고 나서는 별거 아니군.”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숨을 확실히 취하기 위해 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화살대를 부러뜨리며 일어났다.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동시에 가까이 있는 암살자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크아악!”
“이런!”
다른 암살자가 재빠르게 덤벼들었지만 백작의 실력이 한 수 위였다.
“크윽, 어차피 이미 독을 맞은 몸이다! 오래는 못 버틸걸!”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암살자들이 숲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놈들! 어딜 가느냐!”
백작이 노호성을 지르며 쫓았다.
쿵쿵쿵!
눈앞의 잔가지를 온몸으로 부러뜨리며 추격해오는 기세가 한 마리의 사나운 곰 같았다.
“후작이 보낸 것인가? 아니면 공작님을 몰아내려는 다른 적인가? 너희들의 입으로 들어야겠다!”
“저런 괴물 같으니!”
백작이 암살자들을 잡기 위해 뛰어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으윽!”
눈앞이 핑 돌며 그의 몸이 고꾸라졌다.
암살자들은 멈칫했지만, 그가 다시 번쩍 고개를 들자 화들짝 놀라 멀리 달아나버렸다.
“이런, 망할….”
백작은 털썩 주저앉았다.
“화살에 독이 묻어 있었나?”
이를 악물고 허벅지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그리고 만일을 위해 챙겨온 약초를 발랐다.
하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놀브 후작이 제조한 독약은 작은 상처만 나도 출혈이 멎지 않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과다출혈로 죽게 되는 것이다.
독이 퍼진 탓에, 암살자들을 추격하면서 난 얼굴이나 손의 생채기에서도 피가 멎지 않았다.
“캠프로 돌아가야….”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장 출혈을 멈추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나 의료진도 없이 무슨 수로?
이때, 백작은 자신이 약초 말고 챙겨온 또 다른 약을 떠올렸다.
바로 독초를 쓴다는 주치의의 천막 앞에 비치되어 있던 연고.
그는 주머니에서 연고 통을 꺼냈다.
연고 뚜껑에 성분표시라도 하듯 독초가 그려져 있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안 가져갔지….”
하지만 그 당당함이 백작의 시선을 끌었다.
주군이 왜 그녀를 데려왔는지 알고 싶기도 했고.
‘독초로 만든 상처약이라니, 괜히 독만 더 부추기는 게 아닐까?’
고민이 들었지만, 점점 머릿속이 혼미해지자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은 연고를 듬뿍 퍼서 자신의 허벅지 상처에 펴 발랐다.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캠프로 돌아갈 때까지만 버티게 해줄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런데….
“음?”
생채기에도 연고를 바른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호흡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어지럽던 머리도 명료해졌다.
어리둥절하게 자신이 허벅지 상처를 내려다본 백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상처가 벌써 아물다니?!”
흉하게 찢어져 있던 피부가 말끔한 게 아닌가!
상처가 아물면서 출혈도 멎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효과가 빠른 약은 신전의 포션밖에 없을 텐데….”
이미 흘린 피가 있어 어지러움은 다소 남아 있지만 움직임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백작은 캠프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바꿔 검을 움켜잡았다.
“그것들을 잡아서 공작님께 바쳐야겠다.”
그는 암살자들의 흔적을 쫓았다.
만약 자신의 시신을 처리하려 한다면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백작은 암살자들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것은, 그 암살자들이 이미 죽었다는 점이었다.
“저건, 돌…!?”
암살자들은 자신의 목을 움켜쥐거나 도망치려는 듯한 자세로 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검붉은 꽃 한 송이.
그리고 뿌옇게 공기 중을 떠도는 꽃가루가 보였다.
“조금 전 내가 발견했던 꽃잎과 같은 것인가…? 흡!”
무심코 꽃가루를 흡입한 백작이 돌연 숨 막힌 소리를 냈다.
몸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발끝에서부터 감각이 빠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
그때. 주변의 나무들이 움직이더니 검붉은 꽃에 손을 대듯 가지를 뻗었다.
그러자 꽃은 불타올라 재로 사라졌다.
이어 나무들이 나뭇잎을 흔들며 일으킨 바람에 공기 중의 꽃가루도 흩어졌다.
백작은 숨통이 트였다. 굳었던 팔다리도 조금 괜찮아졌다.
“허억, 헉!”
나무들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평범한 숲이 됐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쪽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설마 저것이 형체를 확인할 수 없다던 신비한 마물?’
사람을 구해주는 마물도 있던가?
그 광경을 끝으로 백작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