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하지만 베른울프 백작은 자신의 기쁨을 드러낼 수 없었다.
공작님이 정말 오실지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동안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지 않았던가.
게다가 자신은 수도의 관리자다.
공작님을 대놓고 반긴다면 귀족들은 자신이 수도를 넘길 거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을 납득시키기 전에 이미 결정됐다는 인상을 주는 건, 오히려 공작님께 독이 된다.
백작 자신도 주군의 변화를 납득하기 전에는 수도를 돌려드릴 생각이 없었고.
‘과거의 그 참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게 지난날, 주군을 지켜보지 못해 결국 참사가 벌어지게 만든 자신이 질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었다.
‘분명 날 미워하고 원망하시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주군을 뵐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뻤다. 그럴수록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란페르세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대회장의 문지기가 나팔을 부르며 알려왔다.
백작이 그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먼저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이런, 그러다 공작님을 잡아드시겠습니다. 눈빛이 너무 무섭군요.”
놀브 후작이었다.
베른울프 백작은 흥, 콧바람만 세게 내쉴 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
족제비 같은 놈.
후작의 시선 역시 일순 샐그러졌다.
미련한 곰 같으니.
속내와 달리 후작이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 함께 공작님을 뵈러 가시지요.”
º º º
‘사람이 많아…!’
키리아는 제논의 팔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냥대회라기에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과연 연례행사답게 규모가 상당했다.
“남부에서도 안 가 본 사냥대회를 여기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제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를 의아하게 올려다본 키리아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공작을 만나기 위해 몰려든 모든 귀족들이, 저마다 경악스러운 얼굴로 제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붉은 눈이야….”
“맙소사. 공작님께선 정말 마족이 되어버리신 건가요?”
“이대로 복귀하시면 북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웅성웅성.
키리아는 제논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걸 알았다.
‘긴장 풀어요.’
꾹. 제논의 팔뚝을 힘주어 잡고 마나 진단을 했다.
손을 잡는 것보단 못하지만 약간의 진정 효과는 있었다.
제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심하라는 듯 살짝 턱을 끄덕였다.
그때 귀족들 사이로 각각 듬직하고 빼빼마른 귀족 두 사람이 다가왔다.
“베른울프의 영광을 주군께. 북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유서 깊은 란페르세 공작가의 주인을 뵙습니다. 남부 놀브 가문의 만프레드 놀브입니다.”
베른울프 백작과 놀브 후작이었다.
백작을 본 키리아는 내심 흠칫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역시 공작님을 엄청 싫어하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머리를 밟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정을 점점 험악하게 찌그러뜨릴 리 없지 않은가.
그래도 예의는 잊지 않았는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대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수고가 많군.”
백작의 표정에 제논도 싸늘하게 굳었다.
답만 하고 놀브 후작에게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예의상의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은 놀브 후작이 키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옆에 계신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내 주치의다.”
키리아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키리아라고 합니다.”
“파트너로 주치의를 동반하셨단 말씀입니까? 게다가 성이 없다면… 평민이군요?”
키리아는 일순 그의 얇실한 입꼬리가 위로 씰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 각하의 마물병 때문인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평민을 주치의로 기용할 정도셨는지….”
“후작. 무례하오.”
베른울프 백작이 지적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모든 귀족들이 대답을 기다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마물병 때문에 여기까지 주치의를 대동했냐고?
그렇다고 하면 마물병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뜻이 될 테고, 부정하거나 회피하면 불신만 받을 테다.
후작을 향한 제논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질 때.
키리아는 촉이 왔다.
‘남부 귀족이라 했지? 그럼 저 사람이 루이스가 말한 그분이라는 새끼구나?’
벌써부터 나를 걸고넘어지다니.
그럼 나도 걸고 넘어져줘야지.
“후작님은 공작님의 마물병이 흥밋거리밖에 안 되는 건가요? 아니면 마물병을 떠벌리려는 건가요?”
“뭐요?”
발끈한 후작은 이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지 애써 점잖게 대꾸했다.
“그럴 리 있겠소? 나 역시 공작님의 빠른 쾌유를 빌고 있는데.”
“그러면 왜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건가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저 사람들 말이에요.”
키리아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기자들을 정확히 가리켰다.
차림새는 귀족 같았지만 조용히 주변을 살피는 태도나 이따금 무언가를 빠르게 써 갈기는 모습을 보고 알아챈 것이다.
‘메데이아의 정체를 캐내려는 기자들한테 시달린 경험이 있거든.’
그들을 피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히 구별할 수 있는 눈썰미도 갖추게 됐다.
“기자라고?”
“난 전혀 모르는 일인데.”
귀족들이 기자들을 쳐다보며 언짢은 티를 냈다.
귀족의 명예는 신문기사 한 줄에 올랐다 내려가기 마련이라 귀족들은 기자들을 싫어했다.
“놀브 후작, 어째서 기자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 그것이.”
놀브 후작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곧 능청스럽게 웃으며 이렇게 둘러댔다.
“이번 사냥대회는 이곳 루쿠스 숲에서 열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 숲을 사냥터로 추천한 이유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마물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 아니오? 이 대회도 마물을 사냥하는 것이고.”
“그게 보통 마물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베른울프 백작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하지만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작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후작이 말을 이었다.
“최근 몇 달 사이 숲을 관리하는 사냥꾼들이 형체가 없는 신비한 마물이 있다고 보고를 올렸습니다. 기자들은 ‘신비한 마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공작이 복귀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설명이었다.
“이들의 출입을 거절하면 공작님의 마물병이 괜한 구설수에 오를까봐 우려했던 것인데… 제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귀족들에게 허리를 약간 숙여보인 후작이 제논에게 몸을 돌렸다.
“원하신다면, 저들을 물릴까요?”
저 염소수염이?
‘기자들을 무르라고 하면 이쪽이 켕기는 꼴이 되잖아!’
난처한 상황.
키리아는 제논을 힐끗 바라봤다.
그런데 제논은 예상한 바라는 듯 평온한 게 아닌가.
“내 수고를 덜어줬군. 안 그래도 기자들을 초대하려 했는데.”
“…예?”
뜻밖의 대답에 자신만만하던 후작의 얼굴에 약간 금이 갔다.
“상관 없으시단 말씀입니까?”
“그래. 모두가 알다시피, 난 나의 회복과 복귀를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제논이 모여 있는 귀족들의 면면을 천천히 훑었다.
“물론 마물병이 완치되지는 않았지. 그러나 내가 칩거를 깨고 여기 나타난 것도 분명한 사실.”
한 점의 망설임이나 혼란이 없는 목소리가 마치 연설처럼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내가 마물병에 굴복한 인간인지 아닌지는 그대들의 눈으로 판단하라. 나는 어디에도 숨지 않을 테니.”
“……!”
귀족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붉은 눈은 마족의 증거.
움츠러들고 숨거나 변명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제논은 그것을 당당히 시험대에 올렸다.
그야말로 북부의 공작에게 어울리는 대담함이었다.
누군가 작게 박수를 치자, 다른 이도 뒤따르더니 이내 모두의 박수가 쏟아졌다.
짝짝짝!
놀브 후작도 애써 웃음을 띠며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
한층 험상궂게 표정을 찡그린 베른울프 백작이 박수를 멈추고 물었다.
“각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마물병에 대체 어떤 처방법을 택하고 있는지 여기 주치의에게 묻고 싶군요.”
올 게 왔군.
키리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당당하게 말했다.
“독초입니다.”
“…뭐?”
“저는 독초 전문가고, 공작님의 마물병을 치료하는 열쇠는 독초라고 확신합니다.”
“…….”
사람들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키리아는 더 짜게 식은 눈빛을 되돌려주었다.
뭐요. 어쩌라고요?
그러다 발견했다.
‘어? 저 사람은?’
금발에 초록 눈. 가련한 청순미인.
몇 년 전에 한 번 봤지만 여전히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릴리 아니야?’
릴리 역시 다른 귀족들처럼 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조금….
‘1위님 강하시다!’하고 외쳐대는 공작성 마물들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º º º
키리아는 사냥 참가자를 위해 무료로 비치해 놓은 상처 연고의 재고를 확인했다.
평소 사용하는 독초 레시피에 남은 생명석을 더해 만든, 이른바 포션급 연고다.
일단 사용하기만 하면 그 효과가 몇 초 안에 나타난다.
문제는 독초에 편견을 가진 귀족들이 연고를 가져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개수가 하나도 줄지 않았다.
“독초의 아름다움을 모르다니 불쌍해.”
“끼에엥.”
케이프 안쪽에서 꽃님이가 위로하듯 울었다.
키리아가 꽃님이의 봉오리를 간질였다.
“괜찮아. 나중엔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야. 아, 공작님한테 하나 드리고 올까?”
제논은 본격적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참가자들과 모여 있을 터였다.
천막에는 키리아처럼 참가자를 따라온 영애들과 수행원들이 있었다.
그를 찾기 위해 키리아가 이리저리 천막 사이를 헤매던 때였다.
큰 천막 뒤쪽에서 누군가가 은밀히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숨겨 놓았겠지?”
“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뭐지?
수상한 기분이 들어서 키리아는 숨을 죽이고 조금 가까이 갔다.
“사냥이 시작되면 마물 소환진을 발동하실 거야. 그 전에 빨리 피해. 너무 멀리 가면 의심 사니까 조심하라고.”
“그래도 아티팩트를 숨겨 놓은 곳에서는 떨어져야지. 그게 마물들을 끌어들일 텐데.”
뭐라고?
‘지금 마물들을 캠프 쪽으로 부르겠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