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자, 잠깐! 마탑의 후원을 받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시오? 황제도 당신들을 무시하지 못할 텐데!”
“아뇨, 우리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건 후원이 아니라서요.”
“그럼 더욱 이렇게 나와선 안 되지. 어서 다시 앉으시오!”
과거 조앤이었다면 잽싸게 대답하며 앉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키리아를 등에 업고 있는 조앤은 호가호위의 표본 같은 존재였다.
두려울 게 없는 그녀는 의자를 가리키는 셜론을 무시하고 발랄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만약 원로님이나 마탑주님이 자리에 나오시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후읍. 조앤은 숨을 들이켜고 키리아처럼 생긋 웃었다.
“아쉬운 쪽이 직접 오세요. 저는 좀 바쁜 몸이라.”
“……!”
“…라고요.”
할 일을 마친 조앤은 꾸벅 인사를 한 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º º º
조앤이 떠난 후 셜론은 자신의 턱수염을 움켜쥐었다.
“고얀…!”
“아이구, 그러다 수염 탈모 오십니다!”
“으으으!”
“좋게 생각해보세요. 직접 오라고 했다면 거래 의사가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행스러워하는 마르셀의 얼굴에 셜론이 냅킨을 집어던졌다.
“거래는 무슨 거래!”
“그,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헉, 설마 제조법을 훔치시려는…!?”
딱! 마르셀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예끼! 내가 마법을 배웠지 도둑질을 배운 줄 알아?”
“악! 죄송합니다…. 저쪽이 워낙 뻔뻔하게 나와서 노하셨을 줄 알고.”
“흥. 그래. 나에게 그리 방자하게 구는 사람은 오랜만이었지.”
“작가님이요?”
“주치의 말이다!”
셜론이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그런데 이상한 얼굴이었다. 기분 나쁘다는 말투와 다르게 흥미로움을 띤 유쾌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자한 만큼 물정을 모르는 젊은이가 분명하구나.”
실제로 셜론은 마탑이 마법만 곁들인 수도원 아니냐며 그 위세를 잘 모르고 떠드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봐 왔다.
마탑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니 생기는 일이었다.
“내가 직접 공작성에 가봐야겠다.”
“거래는 안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쪽에서 하자고 할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지. 척하면 척 알아듣거라. 쯧쯔.”
마르셀이 억울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예. 그럼… 주치의 쪽에서 매달리게 하려고 가시는 거군요?”
“그렇지. 아무리 방자하더라도 평범한 사람인 이상 공작성의 마물들에게 안전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터.”
셜론은 의기양양하게 코를 들었다.
“바로 그런 때에 내가 직접 공작성의 마물들을 제압해 보이면 아무리 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지 않겠느냐? 마탑의 후원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오, 그렇겠군요! 그렇게 주치의를 구해주면 분명 그쪽에서 먼저 거래를 제안할 테고요.”
“바로 그렇지.”
벌써부터 주치의에게 받을 감탄의 눈빛을 상상하는 셜론이었다.
사실 그는 마기 해독수를 개발한 주치의의 재능에 호기심과 감탄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인지 직접 보고 싶었다.
“내가 마물로 변신해 공작성에 잠입해 있다가 나타나면 더욱 극적이겠지.”
º º º
그리고 마물로 변해 공작성에 들어온 셜론은,
딱!
“너. 신입인가? 그럼 얼른 1위님께 조공을 안 바치고 뭘 하지?”
들어오자마자 켈베로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유난히 높고 도도한 코를 지닌 임프는 켈베로스의 앞발에 맞은 뒤통수를 짚고 입을 쩍 벌렸다.
“내… 내가 누군 줄 알고 때리는 것임!”
망할. 임프로 변신한 탓인지 말투가 이상하게 나오는 셜론이었다.
임프의 항변에 켈베로스는 날카로운 이빨과 잇몸을 드러냈다.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지? 감히 서열에 반하는 건가?”
“크윽…! 이런 고얀 놈! 이거나 먹으셈!”
셜론은 켈베로스의 눈앞에서 강력한 플래시 마법을 시전했다.
번쩍!
일순간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깨갱깽!”
켈베로스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셜론은 그 틈에 잽싸게 빠져나왔다.
“에구구, 허리야. 역시 공작성은 마물 소굴임. 저런 위험도 높은 상급 마물이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더욱 극적인 활약을 보여주기 위해 하찮은 임프로 변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강한 마물로 변할 걸 그랬다.
“그나저나 조공이라니, 쯧쯔. 이미 이곳은 마물들이 생태계를 형성했구먼.”
“여기서 뭐함? 한참 찾았잖음.”
“요 녀석은 또 무엇인고.”
처음 보는 임프가 아는 체를 하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내 조공 같이 옮겨주겠다더니 왜 도망침? 빨리 오셈.”
“왜 아는 척이냐? 너 나 아느냐?”
기가 막혀 물으니 오히려 임프가 더 어이없어했다.
“친구 얼굴도 모르고, 너 치매임?”
치매는 네 쪽이겠지…! 친구 얼굴도 헷갈려서 못 알아보는 주제에!
하지만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곤란했기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임프가 말한 조공이란 게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마물에게 바치는 음식일 줄 알았는데….
“이건 하피의 깃털? 또 이건 와이번의 비늘? 게다가 하급 마물의 핵까지….”
마물이 이런 걸 받을 리 없다. 이건 분명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대체 누구에게 바치는 것이냐?”
“…에휴. 큰일임. 나이도 몇 개 안 먹은 게 벌써 노망이 들었음.”
“떽! 얼른 말하셈!”
그러며 셜론이 뒤통수를 딱 때리자 얻어맞은 임프가 발끈했다.
하지만 어쩐지 느껴지는 기운이 무서웠다.
아주 잠깐이지만 가울 님보다도 더 강하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임프는 꿍얼거리면서도 공손히 말했다.
“1위 님이심. 우리가 조공을 바치는 분은 그분밖에 없잖음.”
“그러니까 그 1위가 누군데?”
“왕님의 주치의님이심. 이름은 키리아라고 하심. 이제 됐음?”
“……!”
충격을 받은 셜론은, 조공을 들고 목적지까지 따라 가봤다.
과연 조공이 쌓인 곳은 약제사의 방이었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성의 사정을 좀 더 알아본 셜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작성의 마물들은 셜론의 예상과 달리 흉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키리아라는 주치의에게 기쁜 듯이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주치의가 마물들의 서열 1위라니? 마물들이 그걸 인정한다고?”
마탑주 인생에서 처음 듣는 소리다.
게다가 놀라운 건 또 있었다.
셜론은 마을 주민이 위험한 포이즌 리저드에게 포위되어 성으로 오는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
“예끼! 얼른 풀어주지 못해?”
그래서 마법을 준비하며 달려갔는데….
“어휴, 걸리적거리니까 저리 비켜.”
오히려 마을 주민이 발로 셜론을 걷어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포이즌 리저드. 약속했던 치킨이야.”
“케륵. 감사.”
놀랍게도 마물이 인간을 호위해줬던 모양이다.
심지어 주방에서는 마물들이 주방장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마물과 인간이 한 공간에 있는데 이렇게 평화롭다니?
기감을 펼쳐봐도 마물들을 복종시키는 마법의 기운 같은 건 없었다.
이 평화는 이들이 스스로 원한 것이란 뜻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여긴… 수 년 전 내가 알던 곳이 아니군.”
성을 한 바퀴 둘러본 셜론이 정원의 바위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는 몇 년 전에도 공작성에 방문했었다.
셜론은 신목의 정령과 둘도 없는 친우였다. 사실 정령은 셜론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들은 마계의 입구가 함부로 열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동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목 전체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마탑주인 자신이 탐지 마법을 펼쳐도 소용이 없었다.
신목의 행방을 알아낼 남은 방법은 수도를 떠난 공작에게 캐묻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공작성을 찾아갔었는데….
“당시는 그야말로 마왕성이 따로 없었지.”
마물들은 사나운 데다 질서가 잡히지 않아 흉포했고, 몇 명 없는 인간들은 모두 움츠러들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건 공작이었다.
고통과 분노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떤 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공작이 위험한 마물로 변할 수도 있겠구나.
셜론은 그렇게 판단해 공작성을 뒤로 했다.
그때 이미 공작은 회생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을 내렸었다.
주치의가 안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온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그랬던 곳이… 이렇게 바뀌었을 줄이야.”
혹시 키리아라는 주치의 때문일까?
“당장 확인해봐야겠구먼.”
듣기로는 수도에 갔다지?
“가만 있자. 수도 좌표가 뭐였더라. 하도 안 간지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
그때였다.
“아이고, 이런 똥개 같은 녀석. 심부름을 시킨 게 언젠데 여기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었네!”
앨마가 나타나 셜론의 귀를 잡아당겼다.
“끄헉! 무, 무슨 짓이냐!”
“또 농땡이 치면 치킨은 한 조각도 안 줄 줄 알아!”
“치킨이라니, 관심 없…. 어허, 내가 누군지 알고! 셋 셀 동안 놔라! 하나! 둘! 둘 반! 둘 반에 반….”
공작성 주방장에게 귀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마탑주.
길고 긴 노동의 시작이었다.
º º º
수도 펠리온 인근에 위치한 루쿠스 숲.
숲의 초입과 이어지는 평지에는 북부 각지에서 온 귀족들의 천막이 색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수도에서 열리는 사냥대회는 수도의 큰 연례행사.
본래는 귀족들이 공작에게 얼굴을 비추어 충성을 다지고, 귀족들끼리는 사냥으로 서로의 우열을 은근히 과시하는 곳이기도 했다.
인마전쟁이 있은 후부터는 그 의미가 약해졌지만, 여전히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올해는 공작님께서 참가하실까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제가 듣기로는 라데츠가 전에 없이 활기를 띤다고 하던데요. 공작성 인근의 작은 마을 말입니다.”
북부 귀족들 역시 공작의 복귀에 대한 남부의 신문을 접했다.
그런데 정작 북부에 있는 자신들은 아는 바가 없으니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는 바가 있나요, 베른울프 백작님?”
한 귀족이 물었다.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끼고 있는 베른울프 백작은 풍채가 곰 같았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검은 콧수염 끝만 만지고 있자 말을 걸었던 귀족은 머쓱하게 사라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
그런 객관적인 평을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사실 베른울프 백작의 기분은 정반대였다.
바로 며칠 전에 공작성으로부터 초대에 응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던 것이다.
‘이 하해와 같은 기쁨!’
그는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감추기 위해 인상을 와짝 구기고 있었고, 긴장으로 나는 식은땀을 감추기 위해 냄비 뚜껑 같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기쁨으로 씰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