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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41)

62화

경악한 키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제논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래도 안 잘생겼습니까? 라고 묻는 듯이.

“…….”

키리아는 설득돼 버렸다.

그래. 저 정도면 재수 없어도 돼.

‘다크써클도 많이 옅어져서 건강해 보이네.’

다만 미소를 인위적으로 유지하고 있어서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꼭 주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부러 애교를 부리는 대형견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 누가 보면 마네킹인 줄 알겠어요! 아하하.”

결국 키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제논이 미소를 풀고 덤덤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제 보기 좋군요. 이게 그대의 기분을 더 좋게 해줬으면 하는데.”

제논이 품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꺼냈다.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 드레스랑 구두로도 충분한데요.”

“그저…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작은 성의 표시입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사양하는 말과 달리 키리아는 선물을 바로 받아들었다.

왠지 여러 번 손으로 만지작댄 듯 포장이며 리본이 조금 꼬깃했지만 개의치 않고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작은 보석이 박힌 황금빛 케이스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검푸른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만년필이 있었다.

“엄청 예뻐요! 밤하늘 같아!”

늘 갖고 다니는 메모장에 시험 삼아 써보니 비단처럼 매끄러운 필기감이 느껴졌다.

“대박. 엄청 부드러워…. 번지지도 않아…. 잉크색도 자세히 보니 푸른빛이 도네요. 이런 거 흔치 않은데. 정말 제가 받아도 돼요?”

입은 그렇게 물었지만 손은 이미 돌려주지 않겠다는 듯 만년필을 꾹 쥐고 있는 키리아.

그걸 본 제논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웃음이 맺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키리아의 몽글거리는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가 아니면 의미 없습니다.”

“…….”

읏. 왠지 알 수 없는 간질간질한 감각에 키리아는 입술을 오므렸다.

‘아니, 내가 동물인 줄 알아?’

건방진 팬 같으니라구.

속으로 쫑알거리면서 제논을 향해 눈동자를 귀엽게 치뜨는 키리아.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감촉에 홀려 있던 제논이 문득 키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별 뜻 없이 쓰다듬던 손이 조금 당혹한 듯 서서히 멎었다.

“…….”

키리아와 제논, 두 사람 다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동시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시선을 돌릴 생각을 못 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제논의 손이 천천히 떨어지더니.

따뜻하고, 긴장한 듯한 그의 손끝이 옆머리와 귓바퀴를 지나 키리아의 뺨을 살며시 감쌌다.

“……!”

그 아주 가벼운 감각이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크게 뒤흔들었다.

긴장한 제논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무언가 말이 나오려던 찰나.

“사, 사인!”

“…네?”

키리아가 팽팽히 긴장된 분위기를 깨며 만년필을 씩씩하게 들어올렸다.

“보답으로 사인해드릴게요! 갖고 싶으시죠!?”

“…아, 네, 갖고… 갖고 싶군요.”

키리아의 뺨을 감쌌던 손을 화들짝 거두며 제논이 중얼거렸다.

키리아는 메모장에 자신의 이름을 대충 흘려 쓴 걸 사인이라 우기며 제논에게 쥐여 주었다.

“어때요? 몇 년만 지나면 유명해질 메데이아의 제자의 사인입니다!”

“아주 멋집니다.”

제논은 보지도 않고 칭찬했다.

“그쵸? …하하.”

“…….”

“…….”

흠흠! 일부러 목을 가다듬은 키리아가 창밖을 어색하게 가리켰다.

“그럼 전… 피곤해서 창문 좀 볼게요. 풍경이 아주 끝내줘서요.”

“정말 그렇군요.”

키리아와 제논은 각각 다른 방향의 창문 밖 풍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비가 올 듯이 꾸물꾸물한 날씨였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만이 겨우 어색함을 무마해주는 분위기 속에서.

키리아는 안도했고 제논은 혼란스러워했다.

‘으와, 위험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지…?’

º º º

키리아를 배웅한 후, 조앤은 스크롤을 이용해 마탑으로 이동했다.

“어유, 어서 오세요 작가님!”

조앤이 식당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르셀이 성대하게 환영했다.

“어어… 네에.”

조앤은 그때까지도 얼떨떨했다.

그도 그럴 게, 편집장이 마련한 장소는 평범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무려 마탑 본성의 귀빈 식당!’

만년 낙제생일 땐 꿈도 못 꾸는 곳이었다.

게다가 하얀 식탁보가 덮인 만찬용 테이블에는 온갖 진미들이 가득했다.

‘접시 옆에 포크랑 나이프가 왜 저렇게 많아? 나 순서 모르는데! 접시 앞에 있는 저 작은 물그릇은 뭐야? 마시는 거 맞지?’

서민 조앤은 그런 걱정부터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접해주니 내심 어깨가 아주 으쓱했다.

이 영광을 아가씨께.

‘수도에서 돌아오시면 꼭 뭐 먹었는지 말씀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식욕이 돋아 꽃잎을 띠운 핑거볼부터 벌컥 비웠다.

그런데 곧 식욕을 뚝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 보는 노인이 조앤의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시오. 조앤 양.”

“…헉.”

비록 초면이지만 조앤은 노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마법 진급 시험을 무수히 응시하고 떨어질 때마다 이 사람의 초상화에 대고 행운을 빌었으니까.

조앤은 입을 틀어막았다.

“마, 마, 맙소사. 마탑주님 아니세요?”

“알고 있었군.”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 노인은 심드렁했다.

“제가 다른 한 분도 함께 식사하실 거라고 안내드렸죠? 그분이 바로 마탑주님이십니다. 하하.”

마르셀이 넉살 좋게 웃었다.

조앤은 ‘그런 중요한 건 진즉 말해줬어야죠!’ 하며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자리는 아가씨께서 부탁한 아주 중요한 자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식사가 시작되고 시답잖은 대화가 오가더니 편집장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남부보다 북부의 반응이 폭발적이에요. 독초를 다루는 이야기니 당연하긴 하지만요.”

“헤헤. 다들 아리키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겁니다. 제 생각엔….”

말끝을 살짝 늘리며 편집장이 눈치를 살피듯 말했다.

“아리키의 독초 마법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아리키는 정말 우리 잡지의 간판스타가 될 거예요. 마기 해독수 말이죠.”

“…….”

올 게 왔다.

조앤은 꿀꺽, 입안에 든 음식을 삼키고 준비했던 대답을 했다.

“그건 허구예요. 그저 이런 것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넣어본 거예요.”

조앤은 키리아의 흉내를 내며 새침하게 부정했다.

왜냐면 이건 본격적인 협상 전에 판을 까는 자리였으니까.

「그쪽도 마기 해독수의 존재를 눈치챘을 거야. 분명 거래하려 들겠지.」

수도로 떠나기 전, 키리아는 조앤에게 다시 한번 할 일을 되짚어 주었다.

「마법사들의 연구에는 마법 재료가 엄청나게 소모되잖아? 그런데 북부에서 나는 마물의 부속품은 마기에 오염되어 있어서 백 프로 활용을 못하고.」

「아… 맞아요! 다른 재료들도 오염된 게 많아서 골치였어요.」

비단 마물의 부속품만이 아니라 북부에서만 구할 수 있는 화초나 기타 재료들도 있었다.

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법사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마탑은 재료 부족에 따른 타격이 크겠지.」

맞물려 굴러가던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가 고장 난 것과 마찬가지. 전체에 타격이 갈 것이다.

마법사들은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마법을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는 이들이니까.

「어쩌면 북부 사람들보다 더 마기 해독수가 필요할 거란 말씀.」

케케. 키리아는 사악하게 웃었다.

마탑처럼 공신력 있고 강한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언제든 보험으로 쓸 수 있겠지.

「그러니 부탁해. 결론은 내가 내면 되니까.」

거래의 물꼬.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 조앤의 임무였다.

“허구라고요? 그렇지만… 분명 모티브로 삼은 모델이 있겠죠?”

역시나 편집장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려는 모습이었다.

‘아가씨의 예상대로야.’

편집장의 속내를 알았지만 조앤은 여전히 그런 건 모른다고 부정했다.

마탑은 마법사들이 모인 곳인 만큼 자존심이 세다.

그들은 거래라고 해도 상대방을 낮춰 보며 자신들이 베풀어준다고 여길 터였다.

‘그렇게 되면 거래를 맺는 의미가 없어. 최대한 우위를 넘겨주면 안 돼.’

조앤은 키리아의 당부를 떠올렸다.

알겠어요, 아가씨.

조앤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모티브라고 하시면… 사실 제공해주신 분이 계세요.”

“역시!”

“하지만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제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분이니까요.”

“어, 어쨌든 있다는 거죠? 부디 연락처 좀 주세요. 작품에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글쎄요. 그분은 워낙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셔서요.”

“아니 제발 좀 부탁합니다. 이건 마탑에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마르셀이 더욱 절박한 표정이 되고 조앤은 점점 더 새침해지는 그때였다.

“모티브라는 사람과 연락까지 할 정도로 멀리 있진 않을 텐데 말이오, 조앤 양.”

묵묵히 있던 마탑주 셜론의 말이었다.

평이한 어조였는데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조앤은 조금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얼른 다시 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마탑의 마법사들은 하늘섬에 있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늦지. 하지만 알고자 하는 건 결코 놓치지 않는다오.”

셜론의 높은 콧대가 조금 더 높아졌다.

“마기 해독수가 라데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당신이 공작성의 사용인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오.”

“……으.”

“작품 속 주인공인 아리키도 사실, 당신이 모시는 공작의 주치의가 아니오?”

“…….”

조앤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자 셜론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나타났다.

셜론이 손가락을 휘젓자 공중에서 양피지 한 장이 나타났다.

마기 해독수의 거래 내용이 적힌 계약서였는데, 물건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주치의의 서명을 받아오시오.”

“…….”

“우리와 거래를 맺으면 당신과 주치의를 후원해주겠소. 아예 마탑에 연구실과 작업실을 둬도 좋고.”

마법사도 아닌 개인이 마탑의 후원을 받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후원이란 건 위아래가 분명히 정해진 관계.

게다가 개인을 후원하는 건, 특정 귀족의 세력이 되어주는 일보다 훨씬 거저먹는 일이었다.

조앤은 묵묵히 계약서를 잡았다.

편집장과 마탑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죄송한데 저 그냥 갈게요.”

“…으잉?”

방글 웃은 조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진짜 가려고 했다.

당황한 셜론이 벌떡 일어났다.

다급한 나머지 테이블에 엎어지다시피 해 조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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