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수도로 떠나는 날이 왔다.
키리아는 공작성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제논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물들이 키리아와 제논을 향해 손이나 날개를 흔들었다.
“왕님, 잘 다녀오셈.”
“접수하세요, 1위님, 수도 마물들도.”
“삐루루!”
켈베로스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성은 가울 님과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왕. 그리고 키리아 님.”
“왕,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꼭 소환하십쇼! 꼭입니다? 그리고 풀떼기 너도! 몸조심해. 알겠냐?”
두 사람이 떠날 때가 되자 안절부절못하는 가울의 말이었다.
로하넨이 살짝 웃으며 가울을 옆으로 밀어냈다.
“잘 다녀오세요, 주군. 함께 가고 싶은데 제가 없으면 분명… 성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그렇겠지.”
제논이 동의했다.
“제 몫까지 주군을 잘 부탁합니다, 키리아 양.”
로하넨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앨마가 바구니를 키리아에게 내밀었다.
“가는 길에 입이 심심하면 안 되니까 넉넉하게 담았수. 도련님과 사이좋게 먹어요. 그리고 도련님, 이 늙은이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잘 다녀오세요.”
왠지 감정이 북받친 듯한 앨마였다.
분명 성에서 칩거만 하던 제논의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제논이 키리아 대신 무거운 바구니를 들었다.
키리아가 앨마를 달래듯 웃었다.
“걱정마세요. 무사히 다녀올게요.”
“다녀오시지 말입니다!”
하인들의 우렁찬 인사를 들으며 키리아와 제논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키리아는 창밖으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차 양옆으로 포이즌 리저드들이 라데츠 인근까지 호위했다.
마차가 지나가자 라데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내왔다.
마물과 사람들 모두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키리아의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마물하고 사람 양쪽에서 인사를 받는 마차는 우리뿐일 거예요. 그쵸?”
“그렇겠죠.”
제논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어색하게 긍정했다.
제논은 마물의 팔을 가릴 수 있는 한쪽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를 벨트로 고정한 청색의 벨벳 망토가 매끄럽게 감싸고 있어 겉으로 봐선 마물병이 드러나지 않았다.
마족의 특징인 붉은 눈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호위기사일 때는 후드를 푹 눌러썼던 제논이지만….
라데츠에서 멀어지자 후드를 젖혔다.
수도에 들어갈 때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키리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제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선 눈을 가리는 게 더 역효과일 겁니다. 게다가… 응원도 받았고.”
“응원이요? 누구한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귓바퀴가 붉어진 제논이 시치미를 뗐지만 키리아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야 내가 숲지기한테 메데이아의 사인을 답장으로 보내줬는걸?’
‘응원할게요!’라는 인사와 함께 말이다.
그때부터 제논의 기분은 줄곧 좋아보였다.
그렇게 좋을까?
팬이 이렇게 기뻐해주니 메데이아로서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냥대회도 마침 푸른달이 뜨는 날을 피해서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키리아.”
“네?”
“아까부터 가방 안에서 움직이는 그건 뭡니까?”
“아. 이거요?”
키리아는 가방을 열어 꿈틀거리는 것을 꺼냈다.
그건 알비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신비한 독초였다.
화분의 흙이 쏟아지거나 꽃이 눌리지 않게 길쭉한 돔 형태의 유리덮개를 씌워놓았다.
그런데도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격렬히 움직이고 있어서 가방까지 들썩인 거였다.
키리아는 화분을 두 손으로 들어보였다.
“제 새로운 환자예요. 이름은… 음… 꽃님이. 무슨 품종인지 몰라서요.”
“…….”
숨통이 트이도록 덮개를 열어주자 독초가 이파리를 쭉 뻗었다. 그러더니 폴짝 뛰어올랐다.
찰싹.
꽃님이가 두 줄기 뿌리를 쭉 뻗고 달라붙은 곳은 제논의 안면이었다.
“윽.”
제논이 질색하며 꽃님이를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그런데도 꽃님이는 제논이 좋아서 안달인 모양새였다.
“끼에엥엥.”
봉오리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누가 보면 가족 상봉이라도 한 줄 알겠네.
키리아가 슬쩍 질투의 시선을 보냈다.
“신기하네요. 공작님 혹시 꽃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이것… 마물이 아니라 독초입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북부의 특이한 공기나 토양 때문에 변형된 거 같아요.”
“있을 법하군요. 아무튼 귀찮으니 가져가십시오.”
제논의 냉정한 태도에 키리아는 시무룩해진 꽃님이를 화분에 다시 심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내며 제논이 말했다.
“만약 그게 위험한 독초라면 내게 알려주십시오. 영지 전체에 공문을 내려야 하니까.”
“공문이요?”
“북부에는 위험한 독초도 많기 때문에, 해당 독초의 서식지를 파악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거나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제논이 공작으로서 기수 가문들과 교류하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물론 교류라기엔 일방적인 공문일 뿐이었지만.
“제거한다고요? 에엑, 아깝게! 저한테 보내주세요!”
키리아는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제논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안 그래도 희귀한 독초는 채집하여 보내라고 지시해두었습니다.”
“그, 그래요?”
왜 갑자기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거야…?
키리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예전 같았다면 수도에서도 그대가 좋아할 만한 식물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군요.”
“수도에 희귀한 식물이 있었나요?”
“네. 선조께서 지금의 펠리온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이기도 하죠.”
“그 정도로 대단한 식물이었어요?”
“물론입니다. 신목이니까요.”
제논의 눈동자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
“펠리온에는 신성력을 품은 신성한 나무인 신목 숲이 있었습니다.”
“신목…?”
예상치 못한 단어에 키리아는 재빨리 기억을 뒤져봤다.
남부에서는 딱히 들은 바가 없었고, 원작에서도 기억이 맞다면 언급이 없던 것 같다.
“신목이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됐죠.”
“이유가 뭔가요?”
“나 때문입니다.”
“……?”
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숲에 불이라도 내셨나요? 아니면 벌목?”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요. 공작님이 신목처럼 신성한 존재에게 해를 입힐 분이 아닌데 공작님 때문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입안이 껄끄러운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제논은, 이내 망설일 게 뭐가 있냐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신목이 사라진 건 내가 황실기사단이 아닌 성기사단에 입단하면서부터니까요.”
제논이 성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키리아였다.
그래서 신목과 성기사가 무슨 인과관계가 있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제논의 시선이 과거를 되짚듯 깊어졌다.
“란페르세 공작가는 황제에게 깊은 충심을 가진 가문이라는 걸, 그대도 알고 있을 겁니다.”
“네. 물론 알고 있어요.”
가문의 세력이나 재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공작가 정도가 되면 황실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공작가문이 왕실과 동등한 위치에 오른 나라도 있었다.
그런데 란페르세 공작가는 조금 특이했다.
공작가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실의 기사로서 서약을 했다.
황실 기사는 제국을 대표하는 황제의 친위대이기도 하지만, 충성과 복종의 상징이기도 했다.
공작으로서 황제의 명령을 받는 것과, 황실 기사로서 황제의 명령을 받는 것은 의무의 무게가 달랐다.
황실 기사가 명령에 불복종할 시 황제는 재판 없이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귀족들은 공작가가 왜 굳이 대를 이어서 황실 기사가 되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가문에게 이득이라는 건 자명했으니까.
“전부 충성 계약 때문입니다. 제 선조와 선대 황제 사이에서 마법으로 추인된 계약이죠.”
“그럼 란페르세 공작가의 가주들이 전통적으로 황실 기사였던 이유가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요?”
“네.”
“하지만… 공작님은 성기사잖아요? 설마.”
키리아는 방금 제논이 한 말을 떠올렸다.
“공작님이 성기사가 되어서 계약을 지키지 않은 바람에… 그 대가로 신목이 사라진 건가요?”
마법으로 맺어진 계약은 그 대가를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계약 마법이 신목과 란페르세 가문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일이었는데, 신목이 희생된 겁니다.”
제논이 씁쓸하게 말했다.
제논은 어릴 때부터 황제와 자신의 기문의 관계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북부 최남단에는 아주 가난한 마을이 여럿 있었다.
제논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맥을 발견했다.
마을을 일으킬 소중한 자원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황실로부터 서신이 오더니.
광맥은 황실에 헐값에 팔렸다.
황실은 공작가에서 후원해 키운 일류 대장장이와 세공사도 데려갔다.
황제가 벌인 국경 야만인들과의 소모전에 공작가의 병사들도 무상으로 차출됐다.
그 모든 게 황실 기사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복종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 제논은 그렇게 얌전히 북부의 재산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황실 기사 대신 성기사를 선택했다.
신전은 황실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독립적인 세력이었으니까.
하지만 대가는 너무 컸다.
“신목이 사라진 후, 뒤늦게나마 성기사의 신분으로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했지만… 신목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황제와의 충성 계약은 제논과 그의 가문을 옭아매고 있었다.
키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 하나뿐인 팬을 황제가 괴롭히고 있었다니! 이런 마물병 같은 자식.
“그런 계약 따위 확 파기해버려요! 계약서를 몰래 없애버린다든가!”
“계약이 적힌 스크롤을 파괴해도 다시 재생될 겁니다. 황제가 직접 파괴하지 않는 이상은 의미가 없죠.”
“…….”
그냥 파괴해도 되는 거라면 어떤 수단이든 써서 훔치면 됐을 텐데.
물론 그것도 쉬운 얘기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생명석 출처를 알아보는 건 정말 비밀스럽게 진행해야겠네요. 황제가 알면 분명 빼앗아갈 테니까요.”
키리아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제논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키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훅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놀란 키리아가 얼른 몸을 뒤로 뺐다.
“왜, 왜 그러세요?”
“그대를 우울하게 하려고 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공작님 얼굴을 왜…?”
“잘생긴 사람을 보면 기운이 난다고 했잖습니까.”
“우와…. 진지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재수 없으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