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헉, 괜찮아? 죽지 마! 아직 널 연구하지 못했다고! 조앤, 어서 작은 화분을 가져와!”
“아앗, 네!”
키리아는 조앤이 가져온 화분에 시들시들한 꽃을 심었다.
꽃은 여전히 축 처져 있었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뜨거운 물까지 뒤집어썼는데… 생명력이 강하네요.”
“그게 바로 독초지.”
키리아는 싱글벙글 웃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독초를 손에 넣었다는 기쁨이었다.
“회복할 때까지 얘는 내 환자야. 겸사겸사 정체도 알아봐야지.”
“먀, 먀아….”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알비가 키리아를 가냘프게 불렀다.
그제야 키리아는 알비의 몸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살폈다.
“알비. 다친 곳은 없지?”
“먀먀.”
“그럼 이제 집에 가.”
“먀!?”
“난 환자를 돌봐야 해. 같이 태어났으니까 어떻게 보면 네 동생이기도 하겠네?”
쿠궁.
충격 받은 알비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나는 키리아.
조앤이 그 뒤를 따르며 알비를 향해 승리의 웃음을 날렸다.
남겨진 알비는 작고 앙증맞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조앤의 뒤통수를 이글이글 노려봤다.
얼른 어른이 될 고야.
얼른 어른이 되어서 저 건방진 인간을 쫓아내고 마마 옆에서 잔뜩 꾀병 부릴 고야.
동생 가튼 것도 피료 업써!
마마 옆에는 내가 이쓸 고라구!
“먀아아!”
홀로 분노의 포효를 하는 알비였다.
º º º
한편, 독초 화분을 방에 내려놓은 키리아는 오랜만에 조앤의 활동 소식을 물어봤다.
“조앤, 요즘 글은 잘 되어가?”
“네! 점점 글쓰기가 재밌는 거 있죠? 얼른 이야기를 많이 소개해주고 싶어서 한 번 보낼 때 원고를 엄청 써서 보내게 돼요.”
키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난 조앤이 조잘댔다.
“출판사에서도 얼마 전부터 잡지를 주간으로 바꿨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더 자주 풀 수 있게 되어서 신나요. 조만간 편집장님과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고요. 에헤헤.”
“오, 그래? 언젠데?”
“이 주일 뒤에 점심 식사를… 앗.”
조앤이 퍼뜩 놀라더니 이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됐다.
“어쩌죠? 아가씨가 수도로 가시는 날하고 겹쳐요! 죄송해요. 식사 약속을 미뤄야겠어요.”
“응?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키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하인들을 차출해서 데려가기로 했거든. 게다가 네가 수도까지 오면 피곤해서 글 못 쓸걸?”
“그래도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하녀가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아니. 일단 난 평민이니까 시중 하녀가 있는 게 더 이상한데.”
키리아 본인이 클로버필드 백작가의 장녀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상태니까 말이다.
대외적으로도 공작님의 평민 주치의로 있을 셈이었다.
“게다가 수도에는 예정보다 오래 머무를 수도 있고.”
사냥대회도 폐막 연회까지 하면 일주일은 할 테고, 대회가 끝나면 생명석의 출처도 알아봐야 한다.
그만큼 성을 오래 비우게 되는 셈이다.
조앤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치만 아쉬워요. 저도 아가씨의 활약에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적어도 수도에 가실 때를 위해 드레스라도 선물하고 싶었어요.”
“드레스가 얼마나 비싼데? 나 그런 거 안 바라, 조앤. 게다가 드레스는 이미 많이 받았어.”
키리아는 제논과 함께 수도에 가기로 결정되자마자 로하넨으로부터 드레스와 구두를 옷장 채로 선물 받았다.
모두 공작님이 보낸 것이라 했다.
가난하다는 소문이 있어도 역시 공작가는 공작가구나, 싶었다.
그러니 조앤이 드레스를 선물해주었다 한들, 소박한 드레스는 수도에서 입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키리아는 까치발을 해 조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그런 물건은 정말 괜찮아. 짐만 된다구.”
“그럼… 짐이 안 되는 편이 더 좋으시단 거죠?”
시무룩하던 조앤이 별안간 활짝 웃었다.
“응?”
조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얇고 하얀 봉투였다.
“사실 저는 드레스나 장신구를 보는 안목이 좀 없거든요. 그래서 이걸 준비해 봤어요. 아까 드리려고 했는데 하얀 도마뱀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자, 어서 받으세요!”
“뭔데 이게?”
“아이, 받아보시면 알아요.”
조앤의 얼굴엔 수줍음과 기대감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키리아는 어리둥절해하며 봉투를 열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통장 아니야?”
통장을 열어본 키리아는 통장명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통장명은 조앤의 소설 제목인 ‘마법학교의 아리키’였다.
“뭐야 이게? 설마 인세 나눠준 거 아니지?”
“에헤헤.”
“나한테 나눠줄 필요 없다니까. 너 쓰기에도 부족할 텐….”
키리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통장에 찍힌 여러 번의 입금 내역과 총액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
눈을 깜박이고, 다시 천천히 뒤에서부터 0을 잘 세어보았다. 일, 십, 백, 천….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입금된 금액은….
“처, 천만 골드!?”
무려 천만 골드.
대강 평범한 4인 가족이 반년 정도를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조앤을 보자, 조앤이 기다렸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아가씨 몫의 인세를 따로 저축해놨거든요. 제법 쌓인 거 같아서 드리고 싶었어요.”
“조앤… 이건….”
“받아주세요, 아가씨!”
키리아가 사양하려 한다고 착각한 조앤이 강하게 부탁했다.
“아가씨가 아니면 애초에 쓰지도 못할 글이었어요. 지금도 아가씨의 활약이 제 글의 스토리인걸요? 당연히 받아주셔야 해요. 그 통장에는 앞으로도 계속 수익이 입금될 거예요. 그리고 봉투를 다시 보세요.”
“어?”
이제 보니 봉투 안에 통장이 또 하나가 있었다.
‘이, 이건 또 뭐지?’
꿀꺽. 왠지 긴장이 되어서 열어보니 이 통장의 이름은 ‘조공’이었다.
그리고 찍혀 있는 금액들.
최근 내역으로 갈수록 금액이 커졌다. 합하니 오백만 골드쯤 됐다.
“마물들이 바치는 조공을 골드로 바꿔서 전부 아가씨의 통장에 넣고 있어요. 이제는 포이즌 리저드들도 조공을 바쳐서 점점 금액이 늘어날 거예요.”
“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마물들이 주워오는 것들이 몇 푼이나 되겠어, 라고 생각했던 키리아였다.
하지만 조공을 바치는 마물들의 수가 많으니 무시 못 할 금액이 됐다.
게다가 마물들도 서열 1위님이 좋아할 조공을 점점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조공의 질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잃어버린 귀금속도 있었지만, 마물들의 신체나 사체에서 떨어진 핵을 가져오는 일이 늘었어요. 그것들은 비싸니까 돈이 되잖아요.”
“마물들한테 매번 잔소리하던 게 그 내용이었구나?”
“헤헤… 용병으로 일할 때 마물의 부속품으로 부수입을 짭짤하게 올렸었거든요. 어때요, 아가씨?”
조앤이 키리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제 선물 마음에 드세요…?”
“장난해? 조앤, 너 신고할 거야.”
“네엣?!”
키리아는 조앤을 꼬옥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나와의 혼인신고.”
“아앗…. 그, 그런 신고라면 저 기꺼이….”
하지만 이미 키리아는 조앤과의 포옹을 풀고 통장만 쓰다듬고 있었다.
“농담이셨군요….”
왠지 허탈해하는 조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키리아는 흐뭇함을 느꼈다.
‘바지사장 최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돈이 입금된다니! 앞으로 점점 불어날 거라니!
북부에서의 할 일만 다 마무리되면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크, 부유한 백수 최고.’
통장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키리아는 문득 방금 조앤이 한 말을 떠올렸다.
“조앤. 마물의 부속품이 돈이 된다고 했지?”
“네, 맞아요. 싸구려에서부터 값비싼 것까지 가격 차이가 아주 커요.”
“그것들은 주로 누가, 왜 사는 거야?”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 길드도 주 거래처지만 아무래도 마법사들이 구매를 많이 해요. 의뢰도 하고요. 연구를 해야 하니까요.”
키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마법사들은 온갖 마법이나 아티팩트 등을 연구하는데 마물의 부속품을 필요로 했다.
“그럼 주로 북부에서 자원을 얻겠지?”
“그렇죠. 마물은 북부에 있으니까요.”
“마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 마법재료로 쓰려면 손이 가겠네?”
“어? 맞아요. 성수로 마기를 어느 정도 제거하는데 완전히는 못해요. 성수가 마물의 부속품이 가진 마법적 성질을 훼손시키거든요. 그래서 재료의 일부분만 활용하는 정도죠.”
마탑에서 오래 살았던 조앤의 정보이기에 확실했다.
“그렇단 말이지.”
키리아가 히쭉 웃었다.
“조앤. 아무래도 편집장과 식사 자리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
바짝 긴장한 조앤을 맞은편에 앉히고, 키리아는 조곤조곤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주면 돼. 할 수 있겠지?”
“해, 해낼게요 아가씨!”
조앤이 불끈 주먹을 쥐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리고 날짜가 계속 바뀌어, 수도로 향하는 출발일이 다가왔다.
º º º
<월간 마법>… 아니, 이젠 <주간 마법>의 편집장이 된 마르셀은 기분이 좋았다.
‘마법학교의 아리키’ 덕분에 잡지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본래 <월간 마법>의 주요 구매층은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월간 마법>을 들고 있으면 똑똑해 보이는 척 멋을 부릴 수도 있었다.
물론 평민층에서도 판매량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귀족층과는 차이가 났다.
그랬던 것이, 소설이 실린 후로 엇비슷하게 바뀌고 있다.
<주간 마법>으로 바뀌고 잡지가 더욱 저렴하게 발행되면서 점점 평민층 판매량이 귀족층을 추월할 기세로 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마르셀은 요즘 출판탑 뿐만 아니라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부러움과 칭찬을 받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조앤이라는 복덩어리 신인작가 덕분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아이고 예뻐라.”
마르셀은 이번 호 표지로 실린 ‘아리키’의 일러스트에 연신 뽀뽀를 해댔다.
음쪽음쪽.
조만간 북부에서 아리키의 이름을 모를 사람이 없겠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마기 해독수가 실제라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아무래도 욕심일 것이다.
“작가님께 뭘 대접해 드릴까나.”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오늘 있을 식사 약속의 메뉴를 고민할 때였다.
“마르셀. 오늘 그 작가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지?”
“아, 예!”
마르셀은 뜻밖의 방문객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문객은 마탑에서도 자존심 세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노인이다.
꼬투리를 잡히면 한 달 내내 피곤해진다.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기별을 하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차를 한 잔 드릴까요?”
“자네가 마시는 싸구려 차는 입맛에 안 맞아. 내가 한 입만 마시면 내 수염에 탈모가 올걸.”
“그, 그 정도입니까….”
“그러니까 담부턴 이걸로 내오게.”
노인이 편집장에게 차 상자를 툭 던졌다.
상자를 본 마르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건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 난 최고급 중에서도 최고급 찻잎이었다.
“이, 이걸 제가 받아도 됩니까? 제 연봉하고 맞먹을 것 같은데….”
“안 받으면? 내 수염에 기어코 탈모를 일으키겠다는 겐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식사 자리에 내 의자도 하나 놓게.”
“예에? 마탑주께서 함께하신다고요?”
노인은 대답 대신 멋들어진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바로 마탑의 1원로, 혹은 백의의 현자라고도 불리는 마탑의 주인이었다.
“내 그 작가에게 직접 물어볼 것이 있어. 마기 해독수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