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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59/141)

59화

키리아는 숲지기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이렇듯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라 그동안 피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게 최선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최선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대면하기로 했습니다.

제게 있어 드물게도, 결과가 예측되지 않는 일입니다.

메데이아 님께서 작은 행운을 빌어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군요.]

키리아는 얕은 탄식을 뱉으며 편지를 접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원작에선 나오지 않아서 몰랐어.”

그런데 누구와 안 좋은 기억이 있다는 걸까?

“조앤. 수도에 공작님과 오래 알고 지낸 귀족이 누군지 혹시 알아?”

“네? 어어, 글쎄요. 제가 귀족들은 잘…. 그래도 베른울프 백작은 알아요.”

“백작?”

조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작님이 자리를 비운 수도를 베른울프 백작이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남부의 다른 귀족하고 같이요. 제가 아는 건 그게 다예요.”

“흠….”

키리아는 다리를 엇걸고 발가락을 까딱였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수도.

그곳을 되찾으려면 북부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

공작님은 처음에 비해 확실해 변했지만, 그 변화가 드러난 건 아직까지는 공작성 인근에 국한됐다.

수도는 물론 북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작님이 달라졌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얘기.

한마디로, 공작님의 평판은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다.

‘사냥대회가 공작님의 훌륭한 복귀 무대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어제 제논에게서 사냥대회에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들은 후, 키리아는 자신이 잊고 있던 부분을 깨달았다.

‘공작님이 수도가 내 데뷔 무대라고 했던 것도 이해가 돼.’

º º º

“제가 데뷔하다니요? 수도의 사냥대회가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제, 키리아는 제논에게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귀족들은 궁금해할 겁니다. 내가 마물병에서 회복이 되어서 수도로 돌아온 건지.”

“네에, 당연히 그렇겠죠.”

“그럼 또 궁금해하겠죠. 온갖 약초, 마법, 신성력도 소용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건지. 누가 치료하는 건지.”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제논의 진지한 눈동자에 당혹스러워하는 키리아의 얼굴이 담겼다.

“키리아. 귀족들은 평민들보다 보수적입니다. 그들은 그대가 독초를 다룬다는 걸 알면 그대를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전 딱히 북부 귀족들에게 인정받을 생각은….”

“독초를 다루는 약제사가 마물병을 치료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겠죠. 독초는 마물과 함께 북부가 오염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니 말입니다.”

“……!”

예상치 못한 깨달음으로 키리아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제논의 말이 맞았다.

라데츠의 주민들이 독초를 반겼던 건 그들의 실생활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아니다.

그들은 희석된 성수를 쓸 필요도 없고, 값비싼 남부의 음식과 약초를 마음대로 살 수 있다.

게다가 루이스를 끄나풀로 부렸던 ‘그분’이라는 작자.

작은 빌미로도 얼마든지 공작님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겠지.

그럴 경우 키리아 자신이 제논의 복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다.

독초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

“…그대에게 부담을 주려는 말은 아니었는데.”

키리아의 표정이 복잡해지자 제논은 자책하듯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허리를 조금 숙여 키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의 시야에 오직 자신만이 들어오게 했다.

“키리아. 난 그대가 내 주치의라는 걸 자랑하고 싶습니다.”

“에? 자랑이요?”

“네. 평소처럼만 하십시오. 그럼 귀족들도 그대와 그대를 선택한 내 안목을 인정할 테니까. 아니면….”

제논이 조금 서운하다는 투로 물었다.

“나보다 다른 귀족들의 안목이 더 높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죠?”

제논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처졌다.

일부러 꾸며낸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은근히 칭얼거리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키리아의 뺨이 붉어졌다.

대체 언제부터 끼를 부리시게 된 거야?

장난기에 이어 또 다른 끼를 발휘하는 그의 모습이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웠다.

근데 또 기분은 좋았다.

“에, 엣헴. 하긴, 제가 좀 유능하긴 하죠…?”

제논이 피식 웃었다.

“누구의 주치의인데요.”

키리아의 밝아진 표정을 확인한 제논이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하죠.”

“뭐를요?”

“그대에게 위협을 가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제하겠다고.”

언제 칭얼거렸냐는 듯 서늘한 목소리였다.

º º º

‘…자랑, 이라고 했다.’

이히힛.

조앤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을 모른 채 키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그래, 독초를 쓴다고 덮어놓고 불신하는 사람들이 처음도 아닌데 뭐. 난 내 할 일만 하면 돼!

‘그래도 뭔가 보험을 만들어두고 싶은데.’

만일을 대비해 자신과 공작님에게 힘을 실어줄 만한 보험 말이다.

“조앤. 공작님의 신뢰도를 높여줄 분명한 세력이 필요하겠어.”

바로 세력이었다.

“세력이요?”

“응. 어중간하지 않고, 크고 확실하고 공신력이 있어야 해.”

키리아의 말에 조앤이 음, 고민하다 밝게 말했다.

“아! 그러면 베른울프 백작은 어떨까요? 그 사람은 저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해요. 수도를 맡을 만큼 인망도 높고요.”

“현재 수도를 맡은 귀족이 공작님을 인정해주면 좋은 그림이 나오긴 하겠네. 하지만 안 돼.”

“네? 왜요?”

“그야….”

휴. 키리아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속을 가장 모르겠으니까.’

짐작대로라면 숲지기가 편지에서 말한 ‘안 좋은 기억을 가진 누군가’는 베른울프 백작일 것이다.

‘안 좋은 일이라는 건 분명 마물병일 테고.’

마물병에 제대로 데인 사람이라면 분명 공작님의 귀환을 반기지만은 못하겠지.

오히려 공작님의 변화를 더욱 확실하게 증명해야만 세력이 되어줄 것이다.

공작가의 다른 기수 가문들도 그와 비슷하다고 봐야 했다.

“골치 아프네. 으으.”

키리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별안간 맞은편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먀먀!”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알비였다. 꼬리를 탁탁 두드리며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알비는 성장 후에 돌아올 것처럼 키리아와 헤어져 놓고, 이렇게 자신이 내킬 때마다 찾아와 키리아에게 간식을 얻어먹었다.

그런데 티타임 중에 키리아가 편지를 읽고 딴생각만 하자 심통이 난 것이다.

“먀우우….”

“아, 미안 미안. 나도 차 마실게. 자 봐. 아이 맛있다.”

“먀먕.”

키리아가 홀짝이며 차를 마시자 그제야 알비가 만족스럽게 헤실거렸다.

“먀?”

키리아를 따라 같이 차를 마시려고 했던 알비는 자신의 잔이 어느새 비어 있는 것을 봤다.

알비는 빈 잔을 끙차 두 손으로 잡고 조앤에게 들어보였다.

“먀먀.”

그러며 오만한 눈짓으로 까딱였다. 모해? 한 잔 따라.

“…….”

조앤이 알비를 얄밉게 흘겨봤다.

허여멀건 마물 주제에. 소리 없이 꿍얼거렸지만 별수 없이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던 조앤은, 문득 알비의 머리에 돋은 꽃을 발견하고는 어? 놀란 소리를 냈다.

“아가씨, 저 꽃이 좀 변한 것 같은….”

“먀먓!”

뜨거운 찻물이 잔 밖으로 넘쳐흘렀다.

화들짝 놀란 알비가 화를 내며 비늘을 추켜세웠다.

그러곤 손가락 굵기의 꼬리로 조앤의 뺨을 찰싹 갈겼다.

“꺄흑! 이, 이 쪼그만 도마뱀이!”

“먀아악!”

키가 큰 조앤과 짜리몽땅한 알비가 고양이와 생쥐마냥 서로 덤벼들었다.

둘의 몸싸움은 곁에 있던 키리아를 퍽 치게 되었고….

“앗?!”

그 바람에 키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김이 나는 뜨거운 찻물이 키리아의 목과 가슴 쪽으로 쏟아졌다.

“……!”

키리아와 조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찰나의 순간.

알비의 정수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촤악!

“…으?”

키리아는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쓸 거라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아무렇지 않아서 눈을 떠보니.

파들파들.

웬 꽃 한 송이가 꽃잎을 해바라기처럼 활짝 펼친 채 찻물을 대신 뒤집어쓴 게 아닌가.

부르르 떨리는 꽃잎이 물기를 털어내고는 꽃잎을 오므렸다.

오므린 봉우리가 마치 머리라도 되는 양, 키리아를 올려다본다.

갸웃.

마치 괜찮아? 하고 묻는 모양새였다.

“…아, 아, 아가씨. 제가 요즘 시력이 안 좋아졌나봐요. 꽃이 혼자 움직이는 헛것이 보이는데….”

“괜찮아…. 헛것 아냐. 나도 그렇게 보여.”

멍하니 대답한 키리아는 테이블에서 이족보행을 하고 있는 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꽃은 꼭 인삼처럼 생긴 뿌리로 서 있었다.

몸에 좋을 것처럼 생긴 뿌리와 달리 꽃은 검정색과 금색, 녹색이 화려하게 뒤섞인 전형적인 독초였다.

혼자 걸어 다니는 독초라니!

키리아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부, 북부에 오길 진짜 잘했어…. 이렇게 똑똑하고 아름다운 독초가 있었다니!”

으아, 당장 꽃잎부터 뿌리까지 연구해보고 싶어!

탐구심과 욕망으로 키리아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넌 정체가 뭐니?”

당연하지만, 꽃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알비의 정수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키리아는 충격으로 돌처럼 굳어 있는 알비의 정수리를 살펴봤다.

본래 꽃이 돋아 있던 알비의 정수리가 말끔해져 있었다.

“진짜 알비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거구나? 본래 한 몸은 아니었던 거야?”

“서로 다른 둘이 붙어 있었나 봐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음…. 그러고 보니 포이즌 리저드들은 독초를 수시로 먹는다고 들었는데.”

암컷 포이즌 리저드가 알을 낳기 전에 어떤 특별한 독초를 먹었던 걸까?

그래서 알비가 머리에 꽃을 단 채로 부화한 거고.

키리아의 예측을 들은 조앤이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여긴 북부라구. 그런 이상한 독초가 없다고 단정지을 순 없으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독초인지는 미스터리였다.

키리아와 조앤이 독초의 기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풀썩.

“끼에엑.”

바들바들 떨던 꽃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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