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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141)

58화

베른울프 백작은 며칠간 의식이 없었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대신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공작가의 기사단장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내가 혐오스러울 테니 당연하지.’

제논의 목소리에 체념이 배었다.

“그는 예전부터 가신의 도리를 다하는 인물이었지. 의무적인 초대장이다. 무시해.”

“죄송합니다, 주군. 재고해주십시오.”

드물게 로하넨이 고집을 부렸다.

그는 제논에게서 얼른 빼앗았던 치맥 전단지를 꺼냈다.

“키리아 양에게서 마기 해독수와 치킨과 맥주 사업의 전담을 부탁받았다고 보고드린 적이 있지요. 이 사업은 분명 주군의 떨어진 명예를 회복시켜줄 겁니다. 확실합니다.”

“…그게 사냥대회와 무슨 상관이지?”

“수도 펠리온이야말로 주군의 복귀를 알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로하넨이 다시 한 번 초대장을 제논에게 내밀었다.

“승낙해주세요, 주군.”

“…….”

제논은 생각에 잠겨 눈을 감았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려 노력하면서 객관적인 사실을 짚어봤다.

무엇이 더 수도를 위한 길인가?

이윽고 차가울 정도로 침착해진 제논이 대답했다.

“내가 떠난 후 수도는 혼란스러웠지만 새로운 책임자의 관리 하에 다시 안정을 찾았다고 들었다.”

“…네. 하지만 그자는 북부 귀족이 아니라 황제가 데려다 놓은 남부 후작입니다. 그대로 두시는 건….”

“물론 남부 귀족만 있었다면 우려했겠지만, 베른울프 백작도 공동 관리자야. 중요한 결정 권한은 그가 갖고 있고. 이대로 간다면 백작이 수도를 계속 관리하게 되겠지. 그는 북부를 위하는 믿을 수 있는 자다.”

“하지만 주군!”

“무엇보다.”

제논이 로하넨의 말을 잘랐다.

“내가 돌아가면 안정을 찾은 수도가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

로하넨이 안타깝게 입술을 짓씹었다.

제논의 말은 현실적이었다.

복귀를 위해 수도에 가는 건 어디까지나 이쪽에 좋은 얘기다.

수도의 입장에서는 공작이 마물병으로부터 확실히 회복했는지, 그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지, 확신할 만한 근거가 없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수도의 본래 주인이 돌아오면 베른울프 백작도 입장이 곤란해지리라.

울상인 로하넨의 얼굴을 바라보던 제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게 로하넨은 더 속상했다.

“로하넨. 난 영지와 영지민을 위한 결정을 할 것이다. 걱정 마. 내가 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한, 황제가 북부를 마음대로 하지는 못할 테니.”

“주군….”

“결정은 끝났다.”

제논은 냉정히 몸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º º º

제논은 성큼성큼 걸었다.

목적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작정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속이 거북하고 울렁거렸다.

어디든 좋으니 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키리아의 방 앞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의아하게 중얼거린 제논은 닫혀 있는 키리아의 방문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온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기 위해 가볍게 주먹 쥔 손을 들었다.

그때.

벌컥!

“어, 공작님?”

키리아가 먼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놀라서 눈만 깜박이는 제논을 보고 키리아는 방긋 웃었다.

“마침 잘 됐네요! 공작님께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를 말입니까? 왜?”

“라데츠 주민들이 저와 호위 기사님을 만나러 왔대요. 같이 가요.”

“싫습니다. 난 그대를 보러 온 건데요.”

“저를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면 어디 아프세요?”

놀라면서 걱정스러워하는 키리아의 말에 제논의 미간이 살며시 좁혀졌다.

“우리가 꼭 그런 용건이 있어야 하는 사이입니까?”

“…아직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고 하신 건 공작님이시잖아요?”

키리아가 기가 막혀 대꾸했다.

“제가 공작님을 그… 아주 인도적인 차원에서 끌어안으려고 했을 때 이마를 딱 밀어버리신 거 잊으셨어요?”

“그건 당연합니다.”

“예에?”

“여성을 함부로 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상대의 실수라고 해도.”

그러자 깜짝 놀란 다람쥐처럼 키리아가 눈을 홉떴다.

“네… 네? 여성… 맞네요, 나 여성이죠. 응. 남자는 아니니까요.”

키리아의 반응에 어쩐지 제논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왜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고, 당황할 만한 점은 아무것도 없는데.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져서 제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라데츠 주민들은 그대가 알아서 하십시오. 난 안 갑니다.”

“어떻게 그래요? 빨리 오세요!”

“귀찮은데.”

키리아가 제논을 잡아끌기 위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순간, 제논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두근두근.

‘뭐지…? 협심증인가?’

마물병에 심장질환까지 생기면 큰일이다.

내심 심각해진 제논은 얌전히 키리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녀를 화나게 하면 진단해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제논이 키리아와 함께 도착한 곳은 알현실이었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라데츠의 주민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약제사님, 호위 기사님!”

“많이 기다렸어요?”

키리아가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서로 더욱 친숙해진 모습이었다.

반면 제논은 후드를 눌러쓴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 역시 마을 사람들이 전보다는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물병을 드러낼 수 없었으니 거리를 두어야 했다.

마물의 팔이나 붉은 눈이 드러나는 순간 키리아가 만든 이 평화가 깨질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데 호위 기사님께서는 실내에서도 그렇게 후드를 쓰고 계세요?”

주민들이 의아하게 물었다.

제논은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너희는 겁도 없군. 마물들이 나오는 숲을 그대들끼리 지나오다니.”

“저희끼리 온 게 아니에요.”

“마물들이 호위해줬답니다.”

“마물들이…?”

키리아가 제논의 망토 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창밖을 가리켰다.

“저길 보세요.”

“……?”

창밖 아래쪽을 바라본 제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기에는 포이즌 리저드들이 공작성 마물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변종인 알비도 함께였다.

‘저 마물들이 사람들을 여기까지 데려다줬단 말인가? 게다가 저 모습은 설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라데츠 주민들은 놀랄 만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죠? 저희도 아직 어색하고 마물들도 어색해합니다. 그렇지만 일단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믿을 수 있다니?”

“그야, 공작님께서 저희와 마물들 사이에 보증인이 되어주신 거잖습니까.”

“……!”

“맞아요. 저희와 마물들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딱 하나, 공작님을 믿는다는 것만은 같더군요. 저희는 마물들이 아니라 공작님을 믿는 겁니다.”

키리아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제가 아무리 날고뛰었다 해도 공작님이 쌓아온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쯤은 알고 계시죠? 호위기사님?”

그러며 제논을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키리아.

제논이 없었다면 마물들이 왕의 맹세를 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논은 키리아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북부의 공작이라는 사실이,

이들이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동시에 묵직하게 느껴졌으니까.

과묵한 호위기사가 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주민들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공작님과 약제사님, 호위기사님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이거… 받아주세요.”

주민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의 천을 걷었다.

여러 개의 투박한 바구니에 담긴 건 치킨과 서리레몬 맥주였다.

키리아와 앨마가 라데츠 주민들에게 전수한 음식이었다.

“마기 해독수를 만들어주신 덕분에 이것 말고도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도 조만간 가져올게요.”

“한스 씨의 주도로 마을에 치맥 가게를 열기로 했습니다.”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알지만 곧 소문이 멀리 퍼질 거예요. 왜냐면 치맥은 정말, 정말 맛있거든요!”

“마약 같다니까요. 물론 마약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연신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할 테니 공작님께서도 힘내시라고 말씀 전해주세요!”

머뭇거리던 제논이 어렵사리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약속한 겁니다? 하하. 이 음식들도 꼭 전해주시고요.”

주민들이 떠났다.

제논은 창문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내려다봤다.

시간을 때우던 포이즌 리저드들이 어기적거리며 그들과 합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나란히 숲길을 걸어가는 두 종족.

‘…설마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키리아가 포이즌 리저드를 휘하로 끌어들였을 때, 사실 제논은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마물과 대립하는 건 북부의 숙명이라 생각했으니까. 자신의 몸이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그런데 지금, 다른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키리아가 제논의 옆으로 와 같은 곳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신기한 광경이네요. 대박.”

“…그대가 의도한 바가 아닙니까?”

“에엥, 당연하죠! 전 애초에 마물들이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했는걸요? 마을을 지키는 건 마을 외곽에서 하는 걸로요. 그러니까 이건 공작님 효과죠.”

“내 효과?”

“아까 들으셨잖아요. 공작님이 있기에 이런 광경이 가능한 거라고.”

키리아가 고개를 들어 제논과 눈을 맞췄다.

“히히. 공작님이 자랑스럽네요. 역시 저의 하나뿐인 팬! 이 아니라 고용주.”

그러며 찡긋거리며 웃는 두 눈이 마치 윙크하는 것처럼 보인다.

“…….”

제논은 말없이 자신의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두근두근.

또 누군가가 가슴 안쪽에서 시끄럽게 북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 탓에 제논의 입에서 불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자랑스럽습니까? 말로만?”

“에?”

“난 그대를 자주 칭찬하는데, 그대는 왜 나한테 한 번도….”

말하다 아차, 했다.

이건 꼭 쓰다듬어달라고 칭얼대는 것 같지 않은가!

얼굴을 붉힌 제논은 “아니, 아니.”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키리아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도 모르고, 제논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건 그렇고, 키리아. 그대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딘데요?”

“수도 펠리온.”

한 박자 뜸을 들인 제논이 더욱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열리는 사냥대회에 참가할 겁니다.”

오. 키리아는 응원하듯 두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본격 데뷔하시는 건가요? 힘내세요!”

“남 일처럼 얘기하는군요. 내가 왜 그대와 함께 가고 싶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까?”

“잉…?”

제논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사냥대회는 나와 동시에, 약제사로서 그대가 데뷔하는 자리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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