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 저 알아요. 매년 북부의 수도에서 열리는 대회예요. 귀족들이 경합을 벌인다고 들었어요.”
“그래? 확실히 존재감을 심어주기에 알맞은 곳이네.”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키리아는 눈을 빛냈다.
“루쿠스 숲이 수도에 있었구나!”
루쿠스 숲은 포이즌 리저드 킹이 생명석을 구한 곳이었다.
생명석을 상당량 넘겨받았다지만 역시 중요한 건 생명석의 원래 출처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키리아가 출처를 묻자 포이즌 리저드 킹은 자신들의 이전 케이브가 있던 곳 근처에서 주웠다고 털어놓았다.
그곳이 바로 루쿠스 숲이었다.
“그럼 수도에 가야 한다는 말이지…?”
키리아는 고민스럽게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끄응, 고개를 기울였다.
라데츠에 나온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냈던 공작님인데….
“…수도까지 가려고 하실까?”
º º º
“선물이 지긋지긋해지려고 하네.”
키리아의 이 말을 듣자마자 제논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재빨리 키리아에게 향하던 걸음을 돌렸다.
아주 좋은 선물을 골랐다는 자부심이 순식간에 점잖아졌다.
제논의 선물은 휴대용 고급 만년필이었다.
유명 장인의 세공품인데다 잉크의 빛깔이 검푸른색인 한정판.
예술성과 실용성을 한번에 잡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자세히 보면 눈썹 끝이 미묘하게 아래로 처져 있었다.
로하넨은 그런 주군을 보며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푸른달의 모습을 키리아 양에게 들키고 포이즌 리저드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한 후.
주군이 키리아 양을 남몰래 곁눈질하는 걸 알아챈 로하넨이었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데 해도 될까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로하넨은 슬쩍 주군을 떠봤다.
‘마물들이 키리아 양의 오른팔이 되고 싶어서 선물 공세를 한다는군요. 그런데 키리아 양은 마물들보다 주군의 선물을 더 기뻐하지 않을까요?’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시큰둥하게 흘려넘기는 듯했으나.
그날 저녁, 로하넨은 주군의 베개 아래에 삐져나온 ‘선물용 카탈로그’를 발견했다.
그날부터 9일 동안 제논은 로하넨에게 ‘오늘 우편물이 오지 않았나?’하고 하루에 두 번씩 물었다.
‘확실히 이전과 달라지셨습니다.’
전부 키리아가 이 성에 오고 나서 생긴 변화였다.
그래서 로하넨은 주군이 키리아와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신관으로서의 품위는 잠시 내려두고 얼마든지 주군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하여튼 마계의 존재들은 예의가 없군요. 키리아 양의 오른팔은 주군인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의가 없는 건 네 쪽이다. 오른팔의 순서가 바뀌었잖아.”
“예? 앗, 제가 이런 실수를…!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왜 신에게 죄송한 거냐.”
제논이 로하넨을 흘깃 보며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다는 투였다.
그래도 어딘가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라, 로하넨은 남몰래 감동의 눈물을 찍었다.
‘절 한심해하는 주군의 목소리가 이렇게 따스할 수가 있다니요… 장족의 발전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무시하거나 지극히 무감각한 목소리였을 텐데 말이다.
주군의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는 방증이었다.
‘그렇다면….’
로하넨은 목을 가다듬고 계속 기회만 엿보고 있던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흠흠. 주군. 요즘 주군께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신 것 같아 저는 기쁩니다.”
“징그럽군.”
“…그래서 말입니다만.”
힐끔, 로하넨이 제논의 눈치를 살폈다. 조심스럽게 품에서 얇은 봉투를 꺼냈다.
“이걸 봐주십시오.”
“뭐지?”
“건네드려도 괜찮을지 고민했지만 제 생각엔 바로 지금 보셔야 할 것 같았습니다.”
로하넨의 분위기가 어딘가 비장했다.
그에 덩달아 더욱 진지해진 제논이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펼쳐보니 이런 문구가 화려하게 적혀 있었다.
[공작령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 ‘마약 치킨’, 함께하면 더 맛있다, ‘서리레몬 맥주’ 오픈기념 1+1 놓치지 마세요!]
헉! 로하넨이 ‘치맥 브랜드 런칭 홍보 시안 2’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이, 이게 아닙니다! 하하하….”
“…….”
“흠흠! 제가 드리려던 건 이쪽입니다.”
다시 건네진 봉투는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주군. 이제는… 수도를 살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봉투를 열어본 제논의 표정이 굳어졌다.
붉은 눈이 미동도 없이 봉투 속 편지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북부 사냥대회 초대장이었다.
장소는 수도 펠리온.
란페르세 공작가의 본가가 있는, 제논의 고향.
그리고 제논이 도망쳐 나온 곳.
“…….”
제논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초대장을 봉투에 도로 집어넣었다.
“…왜 갑자기 이런 초대장을 보낸 건지 모르겠군.”
“갑자기가 아닙니다.”
“……?”
로하넨이 송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매해 이맘때쯤 계속 왔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리지 않았던 겁니다. 주군께… 짐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초대장을 내게 계속 보낸 이가 있었단 말인가?”
“네. …베른울프 백작님께서.”
“……!”
초대장을 본 이후 더욱 단단해졌던 제논의 표정이 흔들렸다.
펠리온과 베른울프 백작.
모두 제논에게 그리움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다.
º º º
북부의 수도 펠리온.
란페르세 공작 가문의 본가가 있는 곳이자 제논이 유년시절부터 자라온 고향이었다.
펠리온에서 제논은 가신뿐만 아니라 수도민들에게도 애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검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외모 또한 매우 수려했으니까.
당시 제논은 수도와 가장 가까운 영지를 가진 베른울프 백작과 자주 어울렸다.
베른울프 백작은 기수 가문의 가주이지만 형제자매가 없는 제논에게는 형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소공작님, 오늘도 백작님과 같이 시찰 나오신 겁니까?”
제논과 백작이 함께 수도 거리에 나타나면 이렇게 시민들의 살가운 인사가 들리곤 했다.
그러면 짧은 검은 머리에 덩치가 큰, 흑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백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제논의 어깨를 팔로 두드렸다.
“소공작이라니? 여기 이 소년은 내 아우 제논 베른울프라네.”
“…들을 때마다 무리수인 농담이군, 백작. 그대와 내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어.”
“닮았다니까요?”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그래도 백작처럼 험상궂진 않아. 산적 같지 않단 말이다.”
베른울프 백작의 농담이 시작되면 시민들도 참여해 거들곤 했다.
다들 소공작 제논을 아끼는 한편 아직은 어린 그를 귀여워하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보여드릴까요?”
“정말 똑 닮으셨는데요. 부정하시 마세요, 소공작님.”
“원래 가족이 하는 말보다 다른 사람이 해주는 평가가 더 객관적인 거립니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하자 소년 제논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을 나쁘게 말할 이들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백작을 닮았다고?”
장난에 걸려든 제논을 보고 웃음을 참으면서, 베른울프 백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소공작님은 다른 사람들과 미적 기준이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저와 소공작님은 남들이 보기엔 똑 닮았죠.”
“……!”
말도 안 돼….
소년 제논이 충격에 빠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내가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으하하! 뭘 그리 충격받고 그러십니까!”
진지한 소년의 속도 모르고, 백작은 제논의 등을 퍽퍽 때렸다.
어차피 제논도 잘생긴 외모보다는 잘생긴 검이 좋았다. 그래서 금방 충격에서 벗어나 피식 웃었다.
그런 나날이었다.
제논은 앞으로도 시시한 대화를 지겹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마물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으, 으윽, 아아악…!”
손끝에서부터 위로 온 신경과 혈관이 끔찍하게 타들어가는 격통.
검은 비늘에 잠식되는 팔은 끊임없이 제멋대로 요동쳤고 주변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공작님!”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신관을…!”
가신들은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쳤다.
콰드득!
그러나 마물의 팔에겐 그 정도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논의 몸이 순식간에 바로 앞에 나타나더니, 검은 손톱이 코앞을 할퀴고 지나갔다.
“으악!”
코를 베인 가신 한 명이 코를 움켜잡고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스쳤을 뿐이었지만,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다면 얼굴이 찢겼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사람들이 하얗게 질린 가운데, 가까스로 팔을 붙잡은 제논이 소리쳤다.
“아무도, 아무도 부르지 마! 내게 다가오지도 마라! 백작은 어디 있지?”
“주군! 저 여깄습니다!”
다급히 달려온 베른울프 백작에게 제논이 명령했다.
“날 감금해!”
결국 백작과 공작가 기사들의 손으로 제논은 감금되었다.
손발에 죄수들이나 차는 쇠고랑이 채워졌다.
감금된 방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여차할 때 공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만큼 강한 무력을 가진 백작뿐이었다.
제논이 감금된 동안 백작은 마물병을 없앨 온갖 수단을 찾고 시도했다.
그중 그나마 효과를 보이는 건 신성력이었다.
로하넨으로부터 신성력을 직접 주입받으면 고통스럽긴 해도 발작이 줄어들었다.
조금이나마 안도한 공작가 사람들은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마물병이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제논도 그들과 비슷한 희망을 품었다.
다른 말로는, 방심했단 뜻이었다.
신성력을 받은 후 제논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쏟아지는 잠에 저항하지 못했다.
며칠째 억지로 뜬 눈으로 버틴 탓에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자신과 같이 밤을 새워왔던 베른울프 백작도 피곤이 가득 묻은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논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꺄아악!”
“사람 살려!”
수도 한복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제논의 의식은 분명 깨어 있었다.
하지만 몸은 다른 의지로 움직였다.
마물의 검은 오른팔이 흉폭하게 날을 세우며 가판대와 가로등을 부쉈다.
석조 분수대를 단번에 파괴하고, 제압하러 나선 기사들을 집어던졌다.
“공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모, 모두 조심해라! 공작님께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
멍청한 소리!
제논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이 기사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마구잡이로 살육을 펼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공작님…!”
제논의 눈앞에서.
제논 자신의 손에.
그가 지켜왔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만해!’
“주군!”
그때 베른울프 백작이 나타났다.
몹시 급하게 달려온 듯 가슴을 크게 들썩이는 그는 제논의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제논의 손에서 막 숨을 거둔 기사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마물병에 걸리기 전에, 제논이 자주 지도를 해주곤 했던 막내 기사였다.
새롭게 나타난 사냥감에 흥분한 듯 제논의 검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물을 흘리는 제논의 무표정과 대비되어 괴이했다.
백작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최선을 다해서 주군을 막겠습니다.”
제논과 백작은 시내 한가운데서 격렬하게 맞부딪혔다.
도시민들 모두가 공포에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흐아아악!”
백작의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제논이 수도를 도망치듯 떠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