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41)

56화

키리아는 책상 앞에 바른 자세로 착석했다.

둥글게 틀어올린 머리는 이미 연구에 집중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라데츠에서 한바탕 일을 치른 후 몇 주간 키리아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야 온전히 연구할 시간을 낸 참이었다.

아차, 집중하기 전에.

“조앤.”

“네, 아가씨.”

“마기 해독수는 어떻게 됐어?”

조앤이 뿌듯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로하넨 신관님과 한스 씨가 의욕을 불태우고 있어요. 밤마다 만나서 회의를 하시는 모양이에요.”

º º º

포이즌 리저드의 독액으로 마침내 마기 해독수를 완성한 키리아였다.

키리아는 완성한 마기 해독수를 라데츠 사람들에게 우선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마기에 오염된 식재료를 정화하면서 성수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약제사님이라지만… 성수보다 뛰어나다니요?”

그런데 일단 써 보고 나니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 마기가 진짜 빠지다니? 너무 깨끗하잖아?”

“깨끗하기만 할까요? 한번 드셔보세요.”

“네? 아, 네, 네에.”

한스와 자경단원들이 먼저 마기 해독수로 정화한 당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아드득.

신선한 당근이 씹히는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한스와 자경단원들의 눈이 커졌다.

“마, 맛있어.”

“진짜 당근 맛이 나. 이게 바로 당근 맛이라고!”

“정말이에요?”

“어디 저도 먹어볼래요!”

라데츠 사람들은 앞다투어 해독수로 정화한 음식을 입 안에 넣었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성수로 정화한 거랑은 달라… 완전 달라. 맛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당근이 이렇게 맛있었다니…….”

어떤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마치 잃어버렸던 미각이 돌아온 듯한 감격이었고, 실제로도 비슷했다.

희석 성수로 식재료를 정화하면 요리를 해도 별맛이 안 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리하는 의미조차 잃어버려서, 아예 채소며 과일 등을 요리하지 않고 그냥 먹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마기 해독수가 그들이 잃어버렸던 기쁨을 되찾아준 것이다.

먹는 기쁨 말이다.

키리아는 마음이 뭉클했지만 아직 감동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한 가지 소개할 게 더 있었다.

“앞으로는 마기 해독수로 건강하게 챙겨 드세요. 먹는 게 보약이니까. 그리고 이것도 별미로 즐겨주시고요.”

키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임프 네 마리가 커다란 쟁반을 들어올렸다.

쟁반 위 천을 걷자 치킨과 서리레몬 맥주가 찬란한 자태로 드러났다.

처음 맡는 먹음직스럽고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콧구멍이 커졌다.

“공작성 표 치맥. 가맹점 모집합니다. 여러분과 마물들의 원만한 관계를 도와주는 음식이기도 하고요.”

쟁반 위 닭다리로 몰래 손을 뻗는 임프의 손등을 탁 쳐내며 키리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마기 해독수와 치맥은 라데츠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시작이지.’

물론 키리아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기 해독수와 치맥은 북부 전체로 퍼져야 했다.

하지만 키리아는 자신의 몸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로하넨과 한스를 한 자리에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키리아의 제안을 들은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키리아 양이 개발한 마기 해독수 판매를… 저희와 나누시겠다고요?”

마기 해독수를 전담해달라는 키리아의 말에 로하넨이 한 말이었다.

“정말입니까? 이건 키리아 양이 전적으로 혼자 개발한 것이니 굳이 이러시지 않아도….”

“이걸 공작님의 이름으로 풀면 명예가 회복되지 않겠어요?”

“……!”

“북부가 오염된 건 공작님의 잘못이 아닌데 지금의 오명은 불공평하잖아요.”

그렇게 말하자 로하넨은 안경이 한쪽으로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멍한 표정을 했다.

“치킨과 맥주도 같은 이유예요.”

이번엔 한스에게 말하는 키리아.

“치킨과 맥주를 모두가 즐겼으면 좋겠어요. 북부의 대표 음식이 되면 북부를 무시하는 남부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도 있고요. 그 시작점을 라데츠로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어때요?”

“야, 약제사님… 그런 뜻이 있었을 줄은…. 어찌 이리 이타적이신지….”

로하넨과 한스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키리아는 그들 앞에서 생긋생긋 웃으며 생각했다.

‘사실 이타적이기 이전에, 두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나한텐 최고로 이득이라서요.’

그도 그럴게, 마기 해독수와 치맥 사업은 북부에서 실패할 수가 없다.

특히 마기 해독수는 늦든 빠르든 북부 필수품이 된다.

키리아는 아버지인 백작에게 4억 골드의 빚이 있다. 그걸 갚으려면 마기 해독수의 성공을 앞당겨야 한다.

‘그런데 난 마물병 연구도 해야 하고, 노다지인 생명석의 출처도 아직 확보하지 못했잖아?’

한 마디로 사업에 매진할 시간이 없었다.

사업이나 경영보단 연구를 더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까 키리아 자신보다 더 적임인 사람들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수익을 분배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이득이니까.

겸사겸사 이타적이 되면 더 좋고 말이다.

이런 키리아의 속내를 모르는 채 로하넨과 한스는 뜨거운 열정을 내보이며 외쳤다.

“키리아 양! 신께 맹세하건대 제가 반드시 마기 해독수를 북부 전역에서 사용하게 만들겠습니다! 공작님의 명예는 물론 키리아 양의 명성도 함께 높이고요!”

“저 역시 전직 정보길드 정예였던 몸! 온갖 인맥을 활용해서 치맥을 북부 대표 음식으로 만들 겁니다!”

“아주 좋아요. 파이팅! 저의… 아니, 공작성의 부를 위해서!”

키리아가 아자 주먹을 쥐었다.

º º º

조앤으로부터 두 사람이 열심히 일한다는 대답을 들은 키리아는 흡족했다.

“이게 바로 사장님의 기분인가?”

가만히 앉아서 돈만 쓸어 담는 훌륭한 바지사장이 되어야지.

“수익이 들어오면 조앤도 월급 올려줄게. 보너스도 두둑하게.”

“멋져요 아가씨! 아가씨의 시녀라서 행복해요! 충성충성.”

조앤이 키리아에게 귀여움을 부렸다.

요즘 점점 키리아를 등에 업고 마물들에게 위엄을 잡는 재미에 맛이 들린 조앤이었다.

“히힛.”

봤냐, 독초라면 이 악물고 까던 악플러들아? 내가 이 정도다 이 말이야!

키리아는 기분이 좋아서 회전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 조앤이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아가씨. 공작성 마물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어요.”

“무슨 소문?”

“헤헤. 아가씨께서 그 무서운 포이즌 리저드들을 발아래 꿇렸다는 소식이요!”

“응…?”

키리아는 잊고 있었지만, 포이즌 리저드는 공작을 따르지 않는 이 일대의 마물들 중 가장 강력한 무리였다.

이를테면 검은 숲 서열 1위 마물.

그런 놈들을 키리아가 결투에서 이겼다는 소문이 공작성 마물들 사이에서 돈 것이다.

키리아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결투 같은 게 아닌데. 하여튼 자기들 입맛대로 각색 잘한다니까… 으헉.”

쾅!

갑자기 문이 세게 열리는 바람에 놀란 키리아는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이마에 혈관이 돋은 키리아가 휙,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야!?”

“1위님!”

“1위님아!”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쏟아지듯 들이닥친 건 공작성의 마물들이었다.

마물들은 소중히 준비한 조공을 앞다퉈 키리아에게 내밀었다.

어찌나 기세가 대단한지, 선물들이 키리아의 볼을 양쪽에서 꾹꾹 눌러댈 정도였다.

“이거 받아주셈!”

“더 좋다, 제 조공이!”

“삐루루!”

“자, 잠깐….”

키리아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조공 공세에 뒤로 넘어갔다. 기어코 조공 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꺅, 아가씨! 이 못된 마물들! 이 귀금속들 다 치우지 못해? 마정석도 치우라구!”

귀금속? 마정석?

아니, 왜 이렇게 조공이 업그레이드 된 건데?

키리아가 값비싼 조공에 깔려 헉헉댈 때였다.

“크르렁!”

우렁찬 울부짖음이 극성부리던 마물들을 단숨에 얌전히 만들었다. 켈베로스였다.

“뭐 하냐?”

함께 나타난 가울이 키리아의 팔목을 잡고 훌쩍 일으켜 세웠다.

키리아는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어휴, 살았다. 역시 너희가 그나마 제정신이구나.”

“저 똥싸개들이랑 같은 취급하지 마.”

“동감입니다.”

그래그래.

키리아는 가울과 켈베로스의 진지한 항변을 대충 넘기고 모두를 내보내려 했다.

그러다 가울과 켈베로스의 발치에 있는 커다란 포대자루를 발견했다.

“근데 이게 뭐야…?”

심지어 안에서 뭔가가 격렬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이거?”

가울이 쑥스럽게 웃었다.

“큼큼, 그… 원래 가까운 사이에서는 좋은 일 생기면 선물을 줘야 한다고 켈베로스가 그러기에. 아주 어쩔 수 없이 준비했지.”

“우리 가울 님과 모쪼록 앞으로도 가깝게 지내주십시오.”

켈베로스가 깍듯하게 말하며 포대자루를 코로 앞으로 밀었다.

조앤이 포대를 열어보니….

“우읍읍!”

빼어난 외모의 젊은 남자와 여자였다.

“……?”

물음표를 띠운 키리아와 조앤의 앞에서 가울과 켈베로스가 이거 영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네가 미인을 보면 눈이 맑아지고 기운이 난다며? 그래서 잡아왔지.”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시는지 몰라 일단 암컷 수컷 둘 다 준비를 해봤습니다.”

이런 미친.

키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참았던 성질을 폭발시켰다.

“…너희들 당장 나가악!”

1위님의 분노에 기겁한 마물들이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준비한 조공은 1위님이 잘 보시도록 예쁘게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나 더 미인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가울과 켈베로스도 쫓겨났다.

“어휴.”

급격히 피곤해진 키리아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선물이 지긋지긋해지려고 하네.”

그렇게 말했을 때 키리아는 문가에서 기웃거리던 그림자가 쑥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엥? 누구 있어요?”

문밖으로 고개를 빼서 좌우를 둘러봤으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못 봤나.”

“그러고 보니 아가씨, 말씀하셨던 남부 신문을 가져왔는데요.”

“아, 고마워 조앤.”

키리아는 조앤이 건넨 신문을 받아들었다.

특별히 남부에서 발행된 신문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신문의 1면을 본 키리아가 피식 웃었다.

“루이스가 생각보다 일을 잘 해줬는걸?”

1면에는 북부 <마물 공작의 복귀?> 라는 헤드라인으로 큼직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복귀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곧 있을 북부의 큼직한 행사인 사냥대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추측도 함께였다.

“사냥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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