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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41)

55화

루이스는 심호흡을 하고 눈앞의 호화로운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약초 표본과 실험기구들이 사치스러운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방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중년의 남성, 놀브 후작이 있었다.

‘또 보석을 세고 계시는군.’

이번엔 또 누구의 성의 표시일까.

루이스는 책상 앞에서 보석을 세는 후작을 바라보며 인사를 올렸다.

“보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북부에서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네 꼴을 보아하니 딱 북부에 다녀온 티가 나는구나. 북부놈들처럼 무식하고 가난한 티가 나.”

“죄, 죄송합니다. 소식을 기다리실 것 같아 급히 오느라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됐으니 말해봐라. 공작의 약점은 잡았느냐?”

“그게… 송구하지만….”

말끝을 흐리자 놀브 후작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 어려운 임무를 맡긴 것도 아닌데. 네놈이 그렇게까지 무능하진 않겠지?”

“그, 그건 예상과 달랐습니다. 공작성과 가까운 마을인 라데츠에서 공작에 대한 수상한 소문이나 험담을 수집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수가 없었다니?”

“다들 마물 공작을 감싸고돌았단 말입니다.”

후작의 콧구멍이 확 넓어졌다.

“그럴 리가 있나! 신에게 천벌을 받은 공작을 누가 감싸준단 말이야!”

“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쪽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공작을 여전히 전쟁 영웅으로 생각해 존경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말도 안 돼!”

쾅! 후작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울컥해서 힘껏 내려친 탓에 그의 주먹에 찌르르 충격이 전해졌다.

“큭.”

입술을 질끈 깨문 후작이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공작은 우리 놀브 가문이 대대로 역임해 온 성기사단장의 자리를 빼앗았단 말이다.”

그것은 놀브 가문이 신성력을 타고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성력은 혈통이 대를 이어갈수록 옅어져 지금은 그 흔적 정도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놀브 후작가는 성기사단장직을 관습처럼 세습했고, 그 명예를 사유재산처럼 휘둘렀다.

교단이 눈감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롭게 취임한 대신녀는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검도, 신성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후작은 해임되고 그 자리를 당시 소공작이었던 제논이 맡게 되었다.

당사자인 놀브 후작에게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형국으로 보였다.

후작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미 공작이란 지위를 가졌으면서 놀브 가문의 신성한 역할을 빼앗았으니 마물병은 자업자득이지. 난 반드시 우리 가문의 것을 돌려받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 공작의 푸른달에 대한 정보를 드린 것도 그래서고.”

“…….”

“그러니까 네놈이 쓸 만한 정보를 가져왔어야 한단 말이야!”

촤라락!

“윽!”

후작이 던진 보석들이 루이스의 얼굴을 때렸다.

“후, 좋아. 푸른달에 대한 건 소득이 없다 해도… 다른 유용한 건 건져왔겠지? 공작의 약점이 될 만한 건더기 말이다.”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후작이 낮게 말했다.

루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도 소득이 없다고 고하면 후작이 자신의 목을 칠지도 몰랐다.

그때, 루이스는 공작의 주치의이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키리아를 떠올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그녀가 전해준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제가 정보를 줄게요.」

후작에게 당할 근심 걱정으로 끙끙대는 루이스에게 키리아가 한 말이었다.

「뭐라도 수확이 있어야 당신 목숨을 건질 테니까…. 공작님이 마물을 부려서 사람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하세요. 복귀를 준비한다고요.」

「예?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분께서 직접 손을 쓰려고 하실 텐데요.」

공작이 얌전히 굴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와 복귀를 준비할 때의 대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의 물음에 키리아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보고 내용을 밖으로 퍼뜨려 주세요.」

「몰래… 소문을 흘리란 말입니까?」

「맞아요. 한번 새면 그다음부터는 호사가들이 알아서 실어 나르겠죠.」

「그, 그렇겠죠. 남부에선 공작 각하에 대한 소문은 다 한심한 것들뿐이니까요…. 공작님이 마물을 이용해 사람들을 보호하고 복귀를 준비한다고 하면, 다들 놀라서 떠들어댈 겁니다.」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이목이 집중되면 이번처럼 얕은수를 쓰기보다는 신중히 움직이려 하겠죠? 직접 말예요.」

「아….」

루이스는 키리아의 의도를 이해했다.

소문을 흘리는 건 오히려 공작의 적을 전면에 드러나게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공작님에 대한 소문은 곧 알려질 테니 조금이라도 유리할 때 이용해야죠.」

키리아가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기껏 살려낸 환자를 위해서라도 말예요.」

「아가씨…. 저, 그동안의 일은 죄송했습니다.」

「처신 똑바로 하고 사세요. 줄은 똑바로 잘 서시고요. 저처럼.」

「…네.」

그녀의 훈수에 루이스는 화가 나기는커녕 고마움마저 들었다.

이걸로 키리아에게 목숨을 두 번이나 빚지게 된 셈이었으니까.

키리아가 전해준 말을 되새기면서, 루이스는 놀브 후작에게 공작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예상대로 놀브 후작은 루이스를 질책하던 것도 잊고 깜짝 놀랐다.

“뭐? 공작이 마물을 부려서 사람들을 보호해? 그걸로 복귀를 준비한다고?”

“예. 틀림없습니다.”

“무슨 망상을 지껄이는 게냐?”

“지, 진짭니다!”

루이스는 살기 위해 진심을 다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포이즌 리저드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고블린을 내쫓는 광경을요.”

후작의 표정이 차츰 진지해졌다.

허언이라기엔 루이스의 태도가 너무나 필사적이었다.

후작의 얼굴에 초조함이 번졌다.

‘언젠가 공작이 다시 꿈틀댈 거라는 걸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는 언젠가 자신이 공작이 될 때를 대비해 물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북부 수도를 공략하는 거였다.

수도는 마물 공작의 본가가 있는 곳이자 북부의 중심인 만큼, 기수 가문들이 은근히 신경을 쓰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기수 가문들의 환심을 사려면 수도 공략이 필수.

그래서 자금과 물자를 아낌없이 풀고 있는데….

이상하게 수도민들에게서 뭔가 벽이 느껴졌다.

‘설마 북부인들이 공작을 감싸고돈다는 말도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묘한 벽이 느껴지는 것도 이해가 됐다.

이런 상황에 공작이 복귀를 한다고?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젠장,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군.”

만약 공작이 마물을 다룬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걸 거짓으로 바꿔주겠다.’

후작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건 그렇고.”

한층 차분해진 후작이 루이스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내가 빌려준 랜덤 텔레포트 아티팩트는?”

반납하라고 종용하는 눈빛에 루이스가 쪼그라들었다.

“그, 그게, 죄송합니다. 활동 도중에 마물에게 쫓기는 바람에 그… 잃어버렸습니다.”

차마 공작의 주치의에게 뺏겼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뭐야? 허, 이런 무능한 자식! 그게 네 목숨보다 비쌀 거다. 1년간 네놈의 봉급은 없을 줄 알아!”

“예? 너, 너무하십니다! 저는 그동안 어떻게 생활하라는 말씀입니까?”

루이스가 사정해봤지만 결국 놀브 후작은 그를 쫓아냈다.

‘역시 줄을 잘 서야 해…!’

키리아의 충고를 진심으로 되새기면서 루이스는 이직을 결심했다.

º º º

남부 사교계에는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만 출입할 수 있는 몇몇 살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살롱에서는 늘 시 낭독과 악기 연주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며칠 전부터 사교계에 도는 가십이 이곳에서도 단연 최고의 화제를 차지했다.

“마물이 사람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고 보시오?”

“마물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놈들은 짐승과 같아요. 사람을 해칠지언정 사람을 위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정말 마물들이 사람들을 위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든든한 게 없겠군요. 북부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주 위험한 생각이오.”

사람들의 의견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그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건 같았다.

바로 마물 공작의 복귀 여부였다.

“마물병을 치료한 걸까요? 아니면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려는 걸까요?”

“애초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사실인 거예요?”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금발의 여성 때문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남부 사교계의 가장 유명한 꽃이었다.

유명한 여러 상단에서 그녀를 제품 홍보모델로 쓰기 위해 혈안일 정도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홀린 듯 바라보던 귀부인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요, 릴리 양.”

한 귀부인이 물었다.

“소문 들었죠? 릴리 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저는….”

릴리의 미소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가련하지 않고 자신감이 있었다.

데뷔탕트 때의 일이 기반이 되어 오늘날의 그녀를 만들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마물로 인해 다치는 분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길 바라요. 그런 일로 제 경험을 쌓고 싶지 않거든요.”

“아, 릴리 양은 최근 황립 의료원에 치료사로 들어갔지요?”

“어머, 마침 <월간 마법>을 들고 계시네요. 마탑에서 나오는 아주 훌륭한 잡지죠. 정말 공부를 부지런히 하시는군요!”

릴리는 부끄럽다는 듯 잡지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얌전히 내렸다.

“동경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귀부인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풋풋하네요. 동경하는 분이라면 수석치료사인 놀브 후작님을 말하는 거겠죠? 그분이 릴리 양을 제자로 직접 지목하셨다면서요.”

“네, 맞아요.”

릴리가 수줍게 웃었다.

“정말 잘 됐어요. 열심히 하면 릴리 양이 다음 수석치료사가 될 거예요.”

귀부인들의 형식적인 응원에도 릴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휴, 이 따분한 어른들.’

한미한 가문이라 해도 릴리는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귀족 영애다.

놀브 후작이 북부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후작이 자신을 제자로 들인 건 ‘릴리’가 가진 아름답고 선량한 이미지를 광고 삼아 후작 자신을 띄우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귀부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놀브 후작에게 점수를 따 놓으면 약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싶은 릴리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늘 모범적이고 정석적인 길을 걷는 자신이 갑갑하기도 했다.

좀 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내가 되고 싶은 건 욕심인 걸까?

릴리는 남몰래 <월간 마법>의 ‘마법학교의 아리키’ 연재 페이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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