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어…?”
키리아는 알을 들어 자세히 바라봤다.
틀림없었다. 알에 생기는 굵은 균열은 안쪽에서 밀어내면서 생기고 있었다.
‘설마.’
“부화하는 거야?”
키리아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안에서 박차는 힘이 강해졌다.
그러더니….
뾱!
“먀!”
알이 깨지며 작은 머리통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몸체가 전부 드러났는데, 녀석은 하얀 몸체의 작은 드래곤이었다.
새끼 포이즌 리저드(?)는 먀먀 울면서 키리아에게 달라붙었다.
녀석을 살펴보던 키리아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왜 얘만 날개가 있죠? 다른 포이즌 리저드들은 없는데….”
“포이즌 리저드의 변종이군요.”
흥미로워하는 제논의 목소리였다.
“변종이요?”
“포이즌 리저드는 드래곤의 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물입니다. 그 때문에 이들의 변종은 드래곤의 형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드래곤을 닮은 변종이라니….”
마물계의 알비노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키리아가 녀석의 정수리를 가리켰다.
“그럼 이것도 변종의 특징인가요?”
녀석의 머리에는 웬 작은 꽃이 돋아나 있었다.
녹색 바탕에 금빛 반점이 찍힌 꽃잎의, 꼭 독초 같은 꽃이었다.
“…….”
제논의 당황스러운 침묵.
왜 마물의 머리에 꽃이 피어 있지?
키리아와 제논, 둘 다 물음표를 띠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일은 마물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변종 새끼 포이즌 리저드를 보는 마물들의 눈빛이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부릅떠져 있었다.
키리아는 녀석들의 눈빛에 차오르는 신앙심을 봤다.
“케륵… 우, 우리 무리에 진정한 대장이…. 전설 속 대장이….”
그런데 마물들은 곧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먀먀.”
변종이 키리아의 품에 파고들더니, 그녀를 엄마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드, 드래곤님께서 저 인간을 선택하신 건가…?”
마물들이 중얼거렸다.
새끼 변종 마물은 기분 좋게 그릉그릉 소리를 내다가, 쭈뼛거리는 포이즌 리저드들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사납게 일갈했다.
“먀먀먓!”
“헉!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마물들은 바닥에 넙죽 엎드리듯 부복했다.
흡사 기사가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세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복한 대상은 변종이 아니었다.
“우리의 새로운 왕이시여!”
“잉?”
키리아는 눈을 끔벅였다.
저요?
º º º
변이 독감에서 벗어난 라데츠 주민들은 이제 한시름 덜었다.
하지만 마을 전체가 병을 앓았던 며칠 동안, 허술해진 인간의 마을을 호시탐탐 노리던 마물들이 있었다.
포이즌 리저드들이 들쑤시고 간 직후에 나타난 고블린 무리가 그들이었다.
“키키킥! 인간, 식량, 뺏는다!”
“으앙, 엄마!”
“이놈들, 저리 가지 못해!”
하이에나처럼 빈틈을 치고 들어온 고블린들은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고블린들이 식량을 가져가고 있어!”
“막아!”
마물들의 약탈은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주민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하지만 역시 자경단이 없으니 온전히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고블린들이 식량 포대를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 돼….”
“당장 돌려놔라! 그건 우리 겨울 식량이야! 저 못된 놈들!”
다들 씩씩거리며 울분을 터뜨리던 그때였다.
“키킥!?”
퍽!
신나게 식량을 들고 도망가던 고블린 한 마리가 난데없이 누군가의 발에 채여 뒤로 자빠졌다.
고블린을 차버린 건 포이즌 리저드였다.
거기다 한 마리가 아니라 떼로 몰려와 있었다.
사람들은 좌절했다.
“마, 망했다. 포이즌 리저드까지 돌아오다니….”
이렇게 된 이상 인명피해가 나기 전에 식량을 내어주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포이즌 리저드들의 행동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
“케륵, 놈들을 다 잡아내라!”
“케르륵!”
포이즌 리저드 킹이 외치자, 수하들이 일제히 흩어져 마을 곳곳에 있는 고블린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않고 고블린만 노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블린에게서 식량을 빼앗은 포이즌 리저드들는 그것을 사람들의 앞에 차곡차곡 쌓아두기까지 했다.
“돌려준다, 케륵.”
“뭐어…?!”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말도 안 돼….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는 없어요.”
귀여운 여성의 목소리가 포이즌 리저드 킹의 뒤에서 들려왔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나자 키리아가 앞으로 나서며 모습을 드러냈다.
제논과 자경단도 함께였다.
“약제사님과 호위 기사님! 무사하셨군요!”
“자경단도 있어!”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하며 안도의 탄식을 내뱉었다.
“무사했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약제사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키리아가 씩 웃었다.
“여기 있는 포이즌 리저드 무리는 공작님의 수하가 됐어요. 그러니 이제부턴 라데츠를 다른 마물들로부터 지켜줄 거예요.”
“예, 예에?!”
공작님의 수하? 마을을 지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마물이 우리 마을을… 그러니까 제 말은, 인간을 지켜줄 거라고요? 그런 게 가능해요?”
“마물을 어떻게 믿어요. 우릴 배신할 거예요!”
말도 안 된다며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이때 제논이 나섰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호위 기사님….”
“이들은 왕의 맹세를 했으니까. 마물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왕의 맹세만큼은 절대적이야.”
같은 말이라도 제논이 말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가진 깊고 진지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렇다면… 저 마물들이 공작님을 왕으로 모시기로 한 겁니까?”
“…비슷하다.”
“이 애 덕분이에요.”
키리아가 얼른 제논의 짧은 대답을 보충했다.
“포이즌 리저드 사이에서 아주 드물게 태어나는 변종 개체죠. 태어나는 순간 모든 포이즌 리저드의 우두머리가 된다고 해요.”
키리아는 자신의 목덜미에 꼬리를 두르고 있는 작은 드래곤의 턱을 간질였다.
“제가 이 애의 병을 치료했거든요. 그랬더니 저를 부모로 각인하고 제가 모시는 공작님까지 인정했어요. 그래서 포이즌 리저드 무리가 공작님을 따르게 된 거죠. 이제 아시겠어요?”
“그런 건가요…?”
사람들이 커다란 덩치의 포이즌 리저드 킹을 힐끗 봤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못마땅하게 콧방귀를 꼈다.
“우린 왕의 명령을 받아 너희 마을을 지킨다. 별수 없이.”
“…….”
이쯤 되자 사람들도 조금씩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이즌 리저드 킹은 머리가 복잡했다.
‘두 명의 왕이라니.’
키리아가 설명했던 것처럼, 변종 포이즌 리저드, 일명 알비노는 태어나자마자 포이즌 리저드라는 마물 전체의 대표가 된다.
그리고 알비노는 자신들이 모실 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알비노는 키리아를 선택했다.
포이즌 리저드들은 본능적으로 그에 따랐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먀아…?’
알비노의 머리에 핀 꽃이 마치 태양을 쫓아가듯 제논에게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 탓에 알비노는 머리채 잡혀 끌려가듯 제논에게도 강제로 볼을 부비게 됐다.
새끼 알비노와 제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가운데….
이 틈을 타 키리아가 잽싸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엣헴. 내가 왕이라면 명령을 들어야겠지? 그럼 첫 번째 명령이야. 공작님을 왕으로 모셔.’
‘그, 그럴 수는…!’
‘왜? 이 분은 내가 모시는 왕인데. 왕의 왕이니 너희에겐 대왕이지. 안 그래?’
‘…케륵?’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아닌지 포이즌 리저드 킹으로서는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알비노까지 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물 공작에게 연신 몸을 비비고 있었다.
비록 표정이 안 좋았지만 행동은 명확했다.
‘드래곤님도 저 인간 공작을 인정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부할 일이 아니었다.
마물 공작을 향했던 적대감은 이 순간 무의미해졌다.
‘두 분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포이즌 리저드에게는 두 명의 왕이 생겼다.
‘내가 모시는 왕들은 강하다.’
새롭게 시작된 그의 충심에는 자부심이 가득 차올랐다.
º º º
어수선해진 마을 정리는 날이 저물어서야 끝이 났다.
이제 포이즌 리저드들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물론 새로운 대장이 된 변종, 알비노도 함께 돌아갈 것이다.
키리아는 녀석에게 ‘알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먀먀….”
알비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그런 녀석을 쓰다듬으며 키리아는 생각했다.
‘라데츠는 언젠가 또 마물들에게 시달리겠지?’
그래서 키리아는 마을을 위해 한 가지 묘수를 내놨다.
실은 왕으로 인정받았을 때부터 생각해둔 것이었다.
“알비. 공작님도 허락했으니 언제든 이 마을로 놀러 와. 나도 자주 마을로 나올게.”
“먀먀!”
“우리가 같이 놀려면 마을이 안전해야 하는데 그래줄 수 있어?”
“먀앗!”
알비가 ‘맡겨줘!’라고 말하는 듯 가슴을 우쭐하게 부풀렸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널 라데츠의 경비대장으로 임명할게.”
귀여운 알비의 모습에 웃으면서,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 킹의 보물창고에서 생명석과 같이 챙겼던 보석 팔찌를 알비의 목에 걸어주었다.
보석이 알비의 가슴 위에서 휘장처럼 빛났다.
마족이 그렇듯, 마물도 왕에게서 수여받는 직책이나 작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
알비의 표정이 책임감과 자랑스러움으로 충만해졌다.
이어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 킹에게도 팔찌를 주었다.
“너도 잘 부탁해, 부대장.”
“케륵! 저, 저도 말입니까…?!”
알비와 같은 표정이 되는 포이즌 리저드 킹.
잠시 후 그들은 한껏 치켜든 턱과 부풀려진 가슴을 앞세우고 위풍당당하게 케이브로 돌아갔다.
일부는 라데츠 주변을 벌써 순찰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키리아는 그제야 슬그머니 제논의 눈치를 살폈다.
마물을 싫어하는 공작님인데, 멋대로 마을을 맡겼다며 불쾌해하는 건 아닐까?
“공작님, 저기… 어차피 저 마물들은 저와 공작님께 충성을 맹세했고, 성에는 마을을 보살필 인력이 부족하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마물에게도 마을에도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괜찮죠…?”
“…솔직히.”
포이즌 리저드 순찰병에 시선을 둔 채 제논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해서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마물로 마물을 견제한다니 정말 이상하고 위험한 생각이군요. 나라면 그런 수는 내놓지 않을 겁니다.”
“윽….”
키리아는 고개를 조금 움츠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하지 않았을 때보다 안전하고 이득이라는 점을 설명하려던 그때.
“압니다.”
슥슥.
단단한 손이 키리아의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었다.
“그대가 나와 달라서 다행이야.”
여전히 무감한 얼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