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더러 남으라고?”
키리아가 경악하여 포이즌 리저드 킹을 휙 쳐다봤다.
케이브를 나섰던 한스와 자경단원들도 뜨악해서 키리아를 향해 달려왔다.
“뭐하는 거냐!”
그러나 포이즌 리저드들이 그들에게 창을 겨누는 바람에 저지당했다. 자경단은 이를 갈았다.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난 약속을 지켰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히죽 웃었다.
“인간들 모두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약제사 너도 마을에 돌려보내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뭐…?”
키리아는 기가 막혔다.
“무슨 법률도 아니고 문장 그대로 일대일 해석을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너희는 융통성도 없어?”
“왜 화를 내지?”
우두머리가 그녀를 살살 구슬리듯 말했다.
“여기서 내 부하이자 우리의 일원이 돼라. 네게는 서열 2위의 자리를 주지. 우리는 이 일대 마물들을 누를 만큼 강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가짜 왕인 공작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
“뭐라고, 이놈!”
우두머리의 말에 자경단원들이 분노했다.
“공작님이 가짜 왕이라고?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왕이다!”
“약제사님을 풀어줘라!”
한스는 물론 루이스를 업고 있던 단원까지 루이스를 내팽개치고 무기를 뽑아 달려들었다.
포이즌 리저드들도 무기를 꼬나쥐고 맞섰다.
챙! 채앵!
건강해진 마물들은 자경단원들에게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포이즌 리저드 한 마리는 일반 기사만큼 강했다.
케르륵!
게다가 그들이 뱉어내는 강한 독액은 자경단의 허술한 갑주를 일부 녹였다. 피부에 닿으면 치명적인 독이었다.
“우리를 얕보지 마라!”
하지만 정예 정보원이었던 자경단의 재빠른 몸놀림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들은 개개인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대신 한 녀석을 집중 공격했다.
운 나쁜 포이즌 리저드의 목과 가슴에 일제히 검이 꽂혔다.
푹!
“키르르륵!”
마물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그때 키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다들 피해요!”
부웅!
육중한 꼬리가 단원들의 측면을 기습했다.
퍼억!
“커헉!”
둔탁한 타격은 내장을 뒤흔들 만큼 강력했다.
그 일격에 맞은 자경단원들은 멀리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혔다.
모두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기 힘들어했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분노로 그르렁거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약제사를 제외한 인간들을 전부 죽이고 마을도 불태운다. 약제사, 우리의 강력함을 똑똑히 봐라!”
“꺅!”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 킹의 손아귀에 팔이 붙잡혔다.
잡힌 팔이 갑자기 꽉 조여들어 아프자 일순 무서움도 잊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아 씨, 아프다고!”
치이익!
키리아는 슬쩍 손에 쥐고 있던 마물퇴치 스프레이를 포이즌 리저드 킹의 얼굴에 분사했다.
“끄아아악!”
그가 키리아를 놓고 양손으로 제 얼굴을 고통스럽게 감쌌다.
키리아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비틀대며 다가오는 녀석을 향해 계속 분사했다.
“안구에 악성 무좀 걸려봤어? 어? 어?”
치이이익!
참다못한 포이즌 리저드 킹의 분노가 폭발했다.
“크아악! 인간 주제에!”
“꺄악!”
자신을 붙잡기 위해 마구 휘두르는 손에 머리카락이 걸렸지만, 평소에 잘 빗어둔 덕분에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키리아는 완전히 졸아든 새가슴으로 허둥지둥 쓰러진 자경단 편으로 달려왔다.
“한스, 여러분, 빨리 일어나요. 도망가야 해!”
자경단원들이 안간힘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어느새 백여 마리는 훌쩍 넘는 포이즌 리저드들이 키리아 일행을 포위한 뒤였다.
우두머리가 노성을 터뜨렸다.
“전부 죽여라! 약제사도 죽여버려!”
“케륵!”
한 녀석이 즉시 키리아를 향해 창을 내찔렀다.
“……!”
키리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때였다.
스걱.
“케륵…?”
키리아에게 내찔러지던 창에 여러 개의 빗금이 생기더니 다음 순간, 세 조각으로 예리하게 토막이 났다.
창을 잡고 있던 녀석의 팔 한쪽도 같은 꼴이 났다.
“뭐, 뭐다!?”
“어떻게 된 일이다?”
저벅.
묵직한 발걸음 하나가 당황으로 웅성거리는 소음을 갈랐다.
검은 망토로 온몸을 가린 장신의 남자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케, 케륵? 뭐다…? 검은 인간?”
그를 발견한 키리아가 소리쳤다.
“공작님!”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제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키리아와 부상을 입은 자경단을 훑은 그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그 스산한 모습이 꼭 사신 같다고, 키리아는 생각했다.
주변 공기가 변했다.
마물들은 정체 모를 압박감으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포이즌 리저드 킹만이 겨우 고함을 질렀다.
“케륵! 죽이지 않고 뭐…!”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망토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어 사각. 칼로 종이를 베는 소음.
동시에 한스를 창으로 찌르려던 포이즌 리저드의 목이 비스듬히 엇갈렸다.
“쿠르르…?”
퉁.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무자비한 칼바람이 시작됐다.
펄럭이는 검은 그림자가 마물들이 겹겹이 이룬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돌풍을 일으켰다.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검광이 매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번득였다.
그때마다 서너 개의 마물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갈라졌다.
“자, 잡는다, 케륵!”
“모습이 안 보인다!”
포착할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그의 모습은 적을 분쇄하는 검은 광풍이었다.
“마, 맙소사…!”
키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에 공포심조차 들지 않았다.
한스가 감격스럽게 중얼거렸다.
“인마전쟁 때 공작님을 보는 것 같군요….”
“저희가 돕고 싶어도, 전쟁터에서는 도울 기회가 없었던 게 바로 이런 이유죠.”
제논은 금세 마물들의 포위망을 뚫고 포이즌 리저드 킹에게 가까워졌다.
“케르르! 어, 어떻게… 공작은 성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겁에 질린 포이즌 리저드 킹이 도망가려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펄럭.
넘어진 녀석의 앞으로, 망토자락이 크게 휘날리면서 우뚝 선 제논이 나타났다.
선홍빛 피를 머금은 검이 포이즌 리저드 킹의 목을 무심한 듯 바짝 겨웠다.
모두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적막이었다.
‘뭐, 뭔가 무서운데.’
귀찮음이 가득 묻어나는 평소의 제논과는 다른 모습에, 키리아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제논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얼핏 무미건조하지만 걱정이 배어 있는 목소리.
키리아는 그제야 안도했다.
“전 괜찮아요. 다른 분들도 심한 부상은 아니에요.”
그 말과 함께 제논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제논을 뒤에 두자 키리아의 위세가 한껏 솟았다.
키리아는 방금까지 자신을 죽이려 했던 포이즌 리저드 킹에게 때리는 시늉을 했다.
“아오, 확 그냥. 처신 잘하라고.”
“자, 잘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필요 없다.”
제논이 말을 잘랐다.
“내가 성에서 나온 이상, 너희 같은 마물들을 곱게 살려둘 생각은 없어.”
그는 언제나 그렇듯 진심이었다.
이 케이브에 있는 마물들을 한 마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최선일까?
“잠깐만요, 공작님!”
키리아는 만류하기 위해, 검을 든 제논의 팔에 손을 얹었다.
“뭡니까.”
“포이즌 리저드들이 없어지면요? 빈자리를 또 다른 마물이 채울 거예요. 그럼 이번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라고요.”
원작에서도 제논은 포이즌 리저드 무리를 소탕했다. 뿌리를 뽑아버렸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다른 마물이 포이즌 리저드의 자리를 대신했고, 마물들은 라데츠를 호시탐탐 약탈하려 들었다.
원작 속 공작도 손을 놓고만 있던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불안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결국 제논의 명성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악순환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이 녀석들을 성의 마물들처럼 부하로 만들어야 해.’
다만 성의 마물들도 때때로 제멋대로 구는데, 성 밖의 마물들, 그것도 공작을 거부하던 녀석들이 얼마나 말을 잘 들어줄까.
그 점이 불안 요소였다.
‘그래도 당장은 감수하는 게 이득이야. 왜냐면….’
“게다가 포이즌 리저드들의 독액은 저한테 필요해요. 마기 해독수를 제대로 완성시킬 재료라는 게 밝혀졌거든요.”
그 말에 심드렁했던 제논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다행히 설득할 수 있겠어.’
키리아는 제논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포이즌 리저드 킹을 다그쳤다.
“뭐해? 어서 공작님을 왕으로 모시겠다 하지 않고. 죽을래?”
“…….”
그런데 포이즌 리저드 킹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 당장 엎드리며 충성을 맹세할 줄 알았는데, 우두머리가 오히려 화를 내듯 표정을 굳히는 게 아닌가.
“왕으로 모실 수 없다.”
“뭐? 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난 비록 마물이지만 마왕님을 진심으로 왕으로 모셨다. 왕의 적을 왕으로 모실 수는 없다!”
헐.
“왜 지금 절개 있고 난리야? 왕이 죽었으면 새로운 왕을 모셔야지!”
“나도 안다. 지금도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는 됐다. 하지만 저 인간은 안 돼! 차라리 죽여라!”
미친 절개 같으니.
키리아가 다시 설득하려 입을 열었을 때.
제논이 검을 들었다.
“알겠다. 그럼 죽어라.”
“으아, 잠깐만요 공작님! 이런 때까지 쿨하지 좀 마세요!”
키리아가 제논의 검을 든 손을 뒤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열려 있던 키리아의 가방이 흔들리며, 안에 있는 알이 미끄러져 밖으로 빠져나왔다.
통, 데구르르….
“케륵…?!”
“케르륵!?”
알을 알아본 포이즌 리저드 킹과 부하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우리의 알!”
“그런데… 깨졌다! 깨져 있다!”
“알이 죽었어! 저 인간이 죽였다!”
패닉에 빠진 마물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비규환이었다.
“이, 이건 말이지! 그게….”
당황한 키리아는 얼른 알을 들어 최대한 금이 간 부분을 가리려 했다.
그런데 너무 힘을 줬나?
쩍.
키리아가 손을 댄 부분의 알껍질이 푹 꺼지며 깨져버렸다.
“헐.”
망했다.
“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힐끔 포이즌 리저드 킹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그는 놀랍게도 큰 눈에 눈물을 매달고 있었다. 온몸을 주체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감히, 우리의 알을…!”
크아아, 괴성을 지르며 그가 몸을 일으키고 제논이 그의 목을 검으로 꿰뚫으려던, 바로 그 순간.
쩌적. 쩍.
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