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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41)

52화

“백숙?”

생소한 음식에 포이즌 리저드들의 고개가 갸웃했다.

“설명보단 실전이지. 어서 부르는 대로 준비해줘.”

“우린 인간 아니다. 요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차갑거나 딱딱한 음식을 솥에 데워먹는 정도였다.

“그럼 내가 할까? 너무 힘들어서 내 팔목이 똑 부러지면 너희들 치료도 못 할 텐데. 괜찮지?”

“큭….”

결국 포이즌 리저드들이 항복했다.

키리아는 솥과 물, 닭고기, 각종 채소 등의 준비물을 읊었고, 그때마다 포이즌 리저드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거기 너희는 물을 끓이고, 너희는 닭털을 깨끗이 뽑아.”

자연스럽게 부려먹는 그녀의 태도에 포이즌 리저드들도 점점 익숙하게 지시를 따랐다.

키리아를 감탄스럽게 쳐다보던 자경단원들이 다가와 물었다.

“보통은 이런 위험한 마물들에게 말도 못 붙일 텐데 대단합니다. 저희들도 도울 게 있을까요?”

“여러분은 식재료의 마기를 해독해주세요. 여기 마기 해독수가 있… 아.”

가방을 뒤적거리던 키리아가 아차 낭패스런 기색을 띠었다.

“도시락을 넣느라 마기 해독수를 빼놓고 왔네….”

마을에는 안전성을 확보한 후에 선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해독수를 꺼낼 일이 없었다.

그래서 빼놓고 왔는데 이렇게 필요할 줄이야.

“저, 약제사님.”

자경단원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마기 해독수가 뭡니까?”

“식물과 음식을 오염시킨 마기를 해독해주는 시약이에요.”

“그, 그런 게 있다고요? 처음 듣는데요!”

“그야 당연히 제가 개발한 거니까요.”

한스와 자경단원들은 놀란 나머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북부는 마물의 땅이라 불리지만 동시에 오염된 땅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산림은 물론 많은 식물들이 오염되었는데 특히 식재료까지 오염되는 건 문제였다.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신성력뿐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신관을 고용하거나 성수를 구매했다.

하지만 금전적 여력이 없는 평민들은 그나마 저렴한 희석된 성수를 써야 했다.

그러나 희석된 성수는 오염을 완전히 정화하지 못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많았다.

성수를 구매하는 귀족들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비싼 성수든 싸구려 희석 성수든, 어쨌든 신성력이 마기와 충돌하면 식재료는 본연의 맛을 잃었다.

일류 요리사가 만든 빵도 천 뭉치를 씹는 것처럼 맛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약재의 부족과 음식의 부실함은 북부가 가진 커다란 취약점이 되었다.

사실 북부인들의 가장 큰 불만은 마물이 아니라 실생활에 직결된 이 두 가지 사항이었다.

그런데 만약 마기 해독수가 알려진다면….

한스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키리아를 보는 자경단원들의 눈빛이 유일한 희망을 보는 듯한 기대감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모른 채 키리아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해독수가 없다면 만들기 위해서였다.

몇 번이나 뒤적거리다 이마를 짚었다.

“아으, 나 왜 이러냐.”

자경단원들이 즉각 물었다.

“약제사님? 무슨 일입니까?”

“아, 해독수에 필요한 중요 재료가 부족해서요…. 독초인데, 혹시 주변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여기 널린 게 독초인데요.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저는 대륙 끝까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전 목숨 걸고 찾아오겠습니다.”

“이익, 저는 삼대에 걸쳐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왜들 이래요?”

갑자기 열정맨이 된 자경단원들 때문에 키리아는 황당했다.

“그냥 평범한 말꼬리풀이라고요. 약한 부식 효과가 있고 강아지풀만큼 작은 갈대 모양의 독초요.”

“말꼬리풀?”

그때 옆을 지나가던 포이즌 리저드가 끼어들었다.

“인간, 이거 말하는 거다?”

“어? 맞아!”

녀석이 내민 건 틀림없는 말꼬리풀이었다.

“너희들이 이걸 왜 갖고 있어?”

“이거 우리가 자주 먹는다.”

“응? 먹어?”

“우린 독초를 먹어야 독을 쓴다.”

그 얘길 듣고 한스가 키리아에게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아, 맞습니다. 포이즌 리저드의 독은 독초를 먹어야 생성되죠.”

“정말요?”

키리아가 놀라 물었다.

“그럼 포이즌 리저드의 독이 말꼬리풀보다 강한 건가요?”

“예. 체내에서 더 강한 독성으로 응축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를 덥석 붙잡았다.

“어서 독을 좀 줘 봐!”

“케륵?”

잠시 후, 그릇에 투명한 녹색 액체가 가득 차자 키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체내에서 정제되고 응축된 순도 높은 독액이야…!”

서둘러 실험해봤다.

오염이 약한 채소과 심한 채소, 양쪽에 동일한 양의 해독수를 투여했다.

포이즌 리저드의 독액으로 만든 해독수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두 가지 다 모자라거나 넘침 없이 정화가 됐다.

꼼꼼히 확인 결과 채소에 잔류한 독도 없었다.

“이거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기존의 마기 해독수는 약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쓰기에 번거롭고 위험했다.

오염 정도에 따라 해독수의 제조 비율을 조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비율을 잘못 맞추면 해독이 덜 되거나 과하게 되어서 다른 독성이 잔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 독액을 쓰면 상관없어.’

오염이 약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조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한 마디로, 마기 해독수를 일반의약품으로 내놓을 수가 있게 됐다는 것이다.

신이 난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들을 하나씩 불러서 강제로 독액을 뱉게 했다.

그렇게 해독수와 함께 요리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윽고 케이브 앞에는 보글보글 걸쭉한 국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백숙 냄새가 퍼졌다.

“킁킁….”

포이즌 리저드들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자경단원들도 냄새를 들이마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뭔가 고소하고… 스튜랑 비슷한데 더 담백한 냄새가 나는군요.”

“이런 제대로 된 음식 냄새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있는 재료로 하다 보니 정석적인 백숙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모양새는 비슷하네요.”

무엇보다 마기 해독수 덕분에 식재료의 풍미가 제대로 살아났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다들 맛을 봐야죠.”

우두머리에게 먼저 크게 한 그릇을 덜어주었다.

포이즌 리저드 킹은 닭고기가 국물에 통째로 빠져 있는 이 음식을 의심스럽게 내려다봤다.

“색이 흐리멍덩하고 이상하다. 냄새도 뭔지 잘 모르겠다.”

요리조리 관찰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국물을 혀로 핥고 닭고기를 물었다.

푹 익힌 닭고기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순간, 우두머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몇 번 더 먹더니 아예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케륵? 대, 대장님?”

그들은 대장이 음식을 먹다 던져버리는 건 많이 봤어도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맛이길래?

궁금해진 마물들이 하나둘씩 음식에 손을 뻗었다.

“……!”

곧 우두머리와 같은 행동이 반복됐다.

포이즌 리저드들은 정신없이 그릇에 얼굴을 박고 찹찹댔다.

곳곳에서 옆 마물의 것을 빼앗아 먹으려는 녀석들도 생겼다.

“자, 여러분도 드셔보세요.”

키리아는 자경단의 몫도 잊지 않았다.

마물들에게 배식할 때 슬쩍 빼돌린 닭다리를 하나씩 담아서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갇혀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자경단은 냉큼 그릇을 받았다.

맛을 본 한스의 눈이 커졌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데 영양이 꽉 찬 듯한 맛이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몸에 아주 좋은 음식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한스 씨, 정확한 혀를 갖고 계시네요. 백숙은 보양식으로 많이 먹거든요.”

“많이 먹어요? 어디서 말입니까?”

“어, 이, 있어요. 저어기 동방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무튼 드세요.”

한동안 포이즌 리저드 케이브에서는 행복하게 쩝쩝거리는 소리만 났다.

“이제 기운이 좀 나지?”

“케륵….”

식사 후, 키리아는 자신을 대하는 포이즌 리저드들의 태도가 한층 얌전해진 걸 알았다.

“좋은 변화야. 난 말 잘 듣는 환자가 좋으니까. 배를 채웠으면 이제 치료해야지.”

키리아는 우두머리에게 생명석을 요구했다.

오랜만에 맛있게 포식한 우두머리는 너그럽게 생명석을 내어주었다.

키리아는 곧바로 변이 독감 치료약을 만들어 마물들과 루이스에게 처방했다.

치료약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케르륵!?”

마물들의 온몸을 덮고 있던 반점이 빠르게 사라졌다.

심한 열과 몸살도 눈에 띄게 나았다.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침도 더는 없었다.

우두머리는 원래대로 건강을 찾은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둘러봤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듯 부릅뜬 눈이 키리아를 향했다.

“이건 대체…. 인간, 넌 혹시 상급 마족… 입니까?”

“그럴 리 없잖아.”

“크륵…. 그런데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고 있지?”

키리아가 팔짱을 끼고 씩 웃었다.

“나니까.”

“크르륵….”

포이즌 리저드 킹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날카로워진 눈이 금은보화를 보듯 집요하게 번들거렸다.

“…인간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 응? 선물?”

어서 자경단원들과 안정을 되찾은 끄나풀을 케이브에서 내보내고 싶은데.

키리아는 조금 초조했지만 일단 우두머리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무슨 선물인데?”

“따라와라.”

우두머리가 먼저 굴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약제사님.”

머뭇거리는 키리아를 위해 자경단이 그녀의 양옆에 붙었다.

그들과 함께 굴 안으로 따라간 키리아는 우두머리가 멈춰 있는 방 앞에서 깜짝 놀랐다.

“다 너에게 주겠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보여준 건, 방 안 가득한 생명석이었다.

금빛을 내뿜는 녹수정들이 수영을 해도 될 만큼 잔뜩 쌓여 있었다.

‘이걸 다 준다고!’

키리아는 너무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물었다.

“이렇게나 많이? 다 어디서 난 거야? 정말 내가 가져도 돼?”

“나보다 인간, 네가 이것을 더 잘 사용했으니까 전부 가져라.”

“그 말 취소하기 없기.”

신이 난 키리아는 생명석을 가방에 담았다. 남는 건 공작님한테 말해서 가져와야겠다.

자경단원들도 일손을 도왔다.

“저희도 일단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챙겨서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룰루랄라 생명석을 챙긴 키리아는 방을 나왔다.

드디어 여길 떠날 시간이다.

자경단원들이 먼저 포이즌 리저드의 케이브 밖으로 발을 디뎠다.

키리아의 걱정과 달리 포이즌 리저드들은 그들을 해치려 들지 않았다.

안심한 키리아가 일행을 뒤따르려던 때였다.

“넌 남는다, 인간.”

탁.

포이즌 리저드 킹의 커다란 꼬리가 키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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