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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141)

51화

“흐어엉.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제 다시는 방해 하지 않을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착하게 살게요. 흐읍, 크흐윽.”

“나 참….”

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움이라곤 안 된 방해꾼이 이렇게 아픈 걸 보니 쌤통인 한편, 약제사로서 마음이 불편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다면 키리아는 약제사가 아니라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나보고 어쩌라고, 정말….”

투덜대는 키리아에게 한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이 자가 중얼거리는 헛소리를 듣자하니 공작님을 음해하려는 자의 수족 같았습니다만…. 만약 이 자가 공작성 근처에서 죽는다면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음….”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공작이 성 인근 마물을 방치하는 바람에 사람이 죽었다며 책임을 몰아갈 수도 있었다.

분위기를 읽었는지 루이스가 이때다 싶어 얼른 매달렸다.

“마, 맞아요. 제가 죽으면 공작 각하에게도 불리할 수 있어요. 살려만 주시면 남부로 돌아가서 아주 쥐 죽은 듯이 있겠습니다. 착하게 살게요!”

“…좋아요. 뭔가 방법을 찾아보죠. 근데 전 공작님의 주치의라 외래진료비가 좀 비싼데.”

“어, 얼마든지!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그럼 그거 줘요.”

키리아가 검지로 가리킨 것은 루이스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였다.

“이건, 그게….”

루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사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 이번 일의 수행을 위해 임시로 받은 물건이었다.

아티팩트, 그것도 이동 마법 아티팩트는 매우 값이 비싸니까.

“이, 이것만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루이스가 키리아를 올려다보았지만, 키리아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만 쓱 올릴 뿐이었다.

결국 루이스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잘 써 주십시오….”

그 대답이 나오자마자 키리아가 브로치를 잽싸게 가져갔다. 백의의 천사처럼 웃으면서.

“환자가 아프면 돌봐드려야죠, 암요. 저에게 맡기세요. 달리 불편한 곳은 있나요? 물론 추가 비용이 청구되지만요.”

“…….”

졌다. 동전의 양면 같은 키리아의 태도에 루이스는 기가 질려버렸다.

이 여자를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약을 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진료비 먼저 갈취하는 현장을 멍하니 보고 있던 한스가 말했다.

“크흠. 그런데 약제사님…. 약재가 없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제부터 고민해보려고요.”

키리아의 가방에는 기본적인 약재와 함께 금이 간 포이즌 리저드의 알, 그리고 라데츠에서 먹으려고 도시락으로 가져왔던 치킨과 맥주가 있었다.

‘필요한 건 생명석인데….’

생명석은 포이즌 리저드들이 갖고 있을 것이다.

마침 녀석들은 키리아에게 치료를 부탁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모셔왔다.

그러니 치료에 쓴다고 하면 흔쾌히 생명석을 내 줄 것이다.

문제는….

목적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나올 것인가? 또 애꿎게 잡혀온 이 자경단원들은?

“한스 씨. 여러분을 데려올 때 포이즌 리저드들의 태도가 어떻든가요?”

“태도 말입니까? 음…. 약제사님에 대한 걸 묻고는, 별 다른 정보가 없자 여기 처박아뒀습니다.”

“여태 물 한 모금 주지 않았고요.”

“그렇군요.”

예상대로다. 녀석들은 아마 잡혀온 인간들이 다 죽어도 상관하지 않을 터였다.

키리아는 결정을 내렸다.

“여길 빠져나가야겠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들킨다면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나가야 해요. 여기 갇혀 있다간 여러분은 언제든지 죽임당할 수도 있어요. 또, 여러분을 인질로 무슨 짓을 더 꾸밀지도 모르고.”

하긴 이대로 마물들의 손에 목숨을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경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키리아가 그들을 모아놓고 속닥거렸다.

º º º

꼬르륵.

감옥 바깥에 있는 포이즌 리저드 간수가 배를 문질렀다.

“배고프다… 케륵.”

때마침 감옥 안에서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이거 진짜 맛있습니다!”

“약제사님, 더 주세요!”

인간들은 뭔가를 쩝쩝거리며 먹고 있었다.

“많이 드세요. 이럴 줄 알고 잔뜩 챙겨왔거든요.”

“이거 다 먹어도 돼요?”

“야, 내 거 뺏어 먹지 마!”

쩝쩝… 꿀꺽.

게걸스러울 정도로 요란한 소리에 포이즌 리저드는 군침을 삼켰다.

뭔지는 몰라도 아주 맛있는 걸 먹는 모양이었다.

결국 녀석은 참지 못하고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케르륵! 먹을 거 내놓는다!”

“꺄아!”

인간들을 향해 독을 토하려던 포이즌 리저드는 키리아를 보자 움찔했다.

목 끝까지 올라왔던 독을 꿀꺽 삼키고, 그 대신 도마뱀다운 네 손가락을 쫙 폈다.

“내놓는다!”

“하나만?”

키리아의 물음에 포이즌 리저드는 다른 손도 쫙 펴서 같이 내밀었다.

“두 개 내놓는다!”

“자.”

키리아가 준 건 라데츠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도시락으로 가져왔던 치킨이었다.

낯설고 유혹적인 치킨의 냄새에 포이즌 리저드의 동공이 확장됐다.

“케륵?”

녀석은 단숨에 치킨을 입에 넣었다.

“……!”

쩝쩝 씹던 포이즌 리저드가 충격을 받고 고개를 쳐들었다. 놀란 나머지 동공이 확장됐다.

처음 맛보는 양념된 닭고기와 튀김의 향연이 입안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더, 더 내놓는다!”

“자자.”

키리아가 순순히 내놓은 치킨을 녀석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그리고 행복한 얼굴로 불시에 곯아떨어졌다.

“케르륵….”

키리아가 치킨에 수면 효과가 있는 독초를 버무려놨기 때문이었다.

“휘유.”

한스가 감탄했다.

“마법 같은 효과네요. 그런데 저 치킨이란 건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참느라 혼났어요.”

“저도요.”

“무사히 돌아가면 맛보여 드릴게요.”

키리아가 히힛 웃었다.

키리아는 자경단의 보호를 받으며 감옥을 나와 어둑한 통로를 걸었다.

루이스는 다른 자경단원이 업고 있었다.

앞장서던 한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공작님과 엇갈리면 안 되니 놈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숨어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얼마쯤 걷자 앞쪽으로 빛이 보였다.

“출구예요!”

키리아 일행은 빠르게 출구로 나왔다.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동시에, 뾰족한 창들이 키리아 일행을 겨누며 둥글게 포위했다.

“이런…!”

한스와 자경단원들이 각자 무기를 들었지만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인간들 도망치려 했다!”

“약제사는 살려두고 나머진 죽인다!”

“아, 안 돼!”

키리아가 재빨리 자경단 앞으로 나서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비킨다, 약제사!”

날카로운 창끝이 키리아에게 경고하듯 점점 가까워졌다.

“약제사님, 위험합니다!”

자경단원들도 키리아를 말렸다.

하지만 키리아도 아무 대책 없이 앞으로 나선 건 아니었다.

“여기 대장 있지? 날 대장에게 안내해.”

“케륵, 시끄럽다! 약제사는 우리가 필요할 때 따라오면 되는 거다!”

“바로 지금이 필요할 때 아니야? 너희 몸을 봐.”

키리아는 포이즌 리저드들의 보랏빛 반점을 가리켰다.

그들의 몸에 있는 반점은 아주 얼룩덜룩해서 본래의 피부색까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난 그 병을 알아. 보랏빛 반점은 곧 종기로 변할 거고 종기는 너희의 영양분을 쪽쪽 흡수해서 너흴 뼈다귀로 만들 거야. 그 종기는 곧 허무하게 터져버리고, 너희는 스켈레톤보다 못한 허약한 마물이 되어서 평생 관절염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케… 케륵…?!”

“지, 진짜다…?”

“당연히 진짜지. 내가 누구야? 바로 약제사라구.”

키리아의 거짓말에 겁을 먹은 포이즌 리저드들은 불안해서 우왕좌왕했다.

“뭐 해? 어서 여기 서열 1위에게 안내하지 않구.”

어느새 판의 주도권이 넘어가 있었다.

º º º

키리아 일행은 포이즌 리저드들에게 둘러싸여 가장 크고 깊은 굴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악취가 났다.

“이게 무슨 냄새야?”

“…음식 썩는 냄새 아니야?”

자경단원들의 말대로였다.

곳곳에 먹다 버린 과일과 고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키리아가 자세히 보니 전부 마기에 오염되어 있었다.

“왜 다 먹다가 버린 걸까요? 설마 오염된 것들이라….”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마물들은 마기에 오염된 걸 먹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존재만으로도 마기를 흘리는 놈들인데요.”

한스의 대답을 들은 키리아는 음식이 버려진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본 바로 마물들은 하나같이 음식에 집착하던데 저렇게 먹다 버릴 정도라면… 입맛을 완전히 잃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거군요.”

얼마쯤 걸었을까, 안쪽에서부터 커다란 언덕이 그르릉거리며 숨쉬는 실루엣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엎드려 있는 포이즌 리저드 킹이 보였다.

“더, 덩치가 상당하군….”

한스가 입을 벌렸다.

과연 우두머리에 걸맞게 그는 다른 포이즌 리저드보다 세 배는 큰 몸집이었다.

“공작성 와이번하고 비슷하네…?”

마찬가지로 놀란 키리아에게 한스가 속닥였다.

“이 우두머리가 건강하다면, 공작성 주변에 서식하는 마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할 겁니다.”

“건강하다면 말이죠….”

이미 퍼렇게 변해버린 몸과 끓는 듯한 호흡을 보니, 우두머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루이스와 상태가 비슷해 보였다.

“케륵, 대장님. 이 인간들이 도망가려던 걸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감옥에 넣지 않았지?”

“그, 그게… 이 약제사가 대장님께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크르륵…?”

우두머리의 의아한 눈빛이 키리아를 향했다.

병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덩치만큼이나 큰 도마뱀의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했다.

키리아는 졸아드는 가슴을 억지로 펴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거래를 하러 왔어. 너희들은 내가 병을 없애주길 바라는 거지?”

“…그렇다.”

“그렇게 할게. 대신 나와 이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

우두머리는 그제야 다른 인간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처럼 자경단과 업혀 있는 루이스를 무심히 일별했다.

“저 인간들은 마을의 인간들인가? 마을로 돌아가겠지?”

“그래, 맞다.”

한스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우두머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슬쩍 웃었다.

“…좋다. 어차피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네가 나와 내 무리를 건강하게 되돌려 놓는다면 그렇게 하겠다.”

“왕의 이름으로 맹세해.”

아무래도 찜찜했던 키리아가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비웃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에겐 왕이 없다. 마왕님은 인간의 손에 사라지셨다. 없는 왕을 걸고 맹세하는 건 의미가 없는데, 원한다면 해주지.”

“끄응.”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더 강하게 나갔다가 녀석들의 심기가 뒤틀리면 이쪽이 불리하다.

키리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우두머리를 올려다봤다.

“약이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일단 기력이 있어야 해. 저런 상태로는 약을 먹어봤자 효과가 반감될 거야.”

꼬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는 포이즌 리저드들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일단 먹여야지. 닭고기 있어?”

“그래. 닭과 비슷한 것도 많다. 산과 마을에서 잡아 온 것들.”

“전부 가져오라고 해. 그리고 커다란 솥이나 냄비도.”

“솥…? 뭘 하려고?”

“여럿이 먹을 땐 국물 요리가 최고잖아?”

키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백숙을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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