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41)

49화

“약제사님이다!”

라데츠 사람들은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가 마을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색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마중하러 다가왔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고, 키리아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약제사님! 어서 오….”

그러나 밝은 분위기는 검은 로브로 온몸을 꽁꽁 가린 장신의 남자가 뒤따라 나타나면서 얼어붙고 말았다.

“…….”

온몸을 가린 검은 로브와 깊게 눌러쓴 후드.

그러나 가려지지 않는 건장한 풍채.

안 그래도 온 마을이 병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등장한 남자의 음침한 모습은 두려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응애―!”

남자를 빤히 보던 한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다른 아기와 아이들도 뒤따라 울어 젖혔다.

“컹컹!”

아기들이 울자 동네 개들도 덩달아 짖어대기 시작했다.

이 불길한 합창에 어른들까지 두려움에 휩싸였다.

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이 무슨 도미노 효과.’

“야, 약제사님, 혹시 저 자가 우리 마을에 병을 퍼뜨린 흑마법사입니까?”

“아니면 혹시 사신!?”

“아뇨, 그게 아니고요!”

황급히 양손을 내저은 키리아가 제논을 돌아보며 작게 속닥였다.

“뭐라고 말 좀 하세요.”

“내 정체를 밝히면 지금보다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겁니다.”

“이것도 딱히 화목한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편하게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습니다만.”

아오 정말.

어쩔 수 없이 키리아는 제논을 정중히 가리키며 모두에게 외쳤다.

“여러분. 무서워하지 마세요! 이 분은 제 호위 기사예요.”

“호위 기사?”

마을 사람들과 제논이 키리아를 쳐다봤다.

“마, 맞아요. 호위 기사. 공작님이 고급 인력인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주 특별히 채용한 기사님이라고요. 이렇게 보여도 함부로 해치지 않아요. 자 봐요.”

키리아가 제논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호위 기사님, 손!”

“…….”

“…주세요.”

마지못한 태도로 제논이 키리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자 보세요. 제 말씀을 이렇게 잘 들어주는 아주 얌전한 분이라니까요.”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다소 안심이 된 듯했다.

“공작님께서 약제사님을 위해 호위 기사를 붙여주셨다고요?”

“네. 여러분에게 약을 나눠주는 걸 도와주실 거예요.”

키리아가 바구니의 덮개를 열어 수많은 치료약들을 보여줬다.

약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전에는 증상이 심한 일부 환자들만 약을 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은 초조해하면서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처럼 광장에 줄을 서면 되죠?”

키리아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광장으로 질서정연하게 모였다.

훈련된 절도만 없을 뿐, 마치 상관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처럼 일사분란했다.

지켜보던 제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 사람들에게도 치킨을 맛보여준 겁니까?”

키리아가 도도하게 머리를 어깨 너머로 휙 넘겼다.

“아뇨. 독초를 맛보여줬는데요.”

광장에 키리아가 쓸 간이 진료소가 마련됐다.

키리아는 약을 나눠주기 전에 당부했다.

“모두에게 줄 양이긴 하지만, 여유분은 없으니 약을 쏟지 않게 조심하세요.”

“네, 약제사님.”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키리아는 사람들에게 변이독감 말고도 다른 질환이 있는지 간단하게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키리아에게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두려움의 눈빛으로 제논에게 약을 채가듯 가져갔다.

어떤 사람들은 수상한 기사의 정체를 추측하느라 숙덕거리고 있었다.

“기사라면서 왜 저렇게 몸을 가리고 있지?”

“분명 엄청난 흉터가 있을 거야. 현상수배지에 실린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런 사람을 호위기사로 쓰겠어? 내 생각엔 분명 저 사람, 엄청난 추남일 거야.”

“어머. 약제사님이 불쌍해.”

들려요, 아줌마 아저씨들.

‘뭐 어차피 저 정도 험담이야 공작님에겐 전혀 타격이 없겠지만.’

키리아는 약을 나눠주고 있는 제논을 힐끗 살폈다.

“…….”

꽉 다물린 입술에 조금 힘이 들어가 보였다.

‘타격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전에도 외모 칭찬을 받고 무척 기뻐했었지.

‘의외로 외모에 신경 많이 쓰는 타입이구나….’

키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제논에게 약을 받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영문 모를 한기를 느꼈다.

그때, 멀리서 아이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으악!”

조금 전 제논에게 약을 받아 갔던 아이였다.

두 손으로 약병을 잡고 빨리 달려가다가 그만 제대로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문제는 약병이었다.

아이의 손에서 튀어오르듯 날아간 약병이 높이 포물선을 그렸다.

그건 아이가 집에 있는 아픈 엄마에게 가져다줘야 할 약이었다.

“어어어…!”

사람들의 놀란 눈이 약병을 따라 올라갔다.

약병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은 약의 여분이 없다는 키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넘어진 아이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약이 깨지면 아이의 어머니는 계속 아플 것이고, 어쩌면 최악의 경우에는….

그때 사람들의 시야로 검은 로브의 사내가 뛰어들었다.

로브가 양쪽으로 젖혀지며 고급스런 옷감에 감싸인 탄탄한 몸이 보였다.

후드가 젖혀질 걸 우려했는지 그는 후드 끝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 손으로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약병을 여유롭게 낚아챘다.

탁.

가볍게 발을 멈춘 그가 넘어진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놀라서 숨 쉬는 것도 잊고 검은 로브의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도 왠지 긴장해서 사내를 쳐다봤다.

약병 하나 똑바로 간수 못한다며 험악한 말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사내가 아이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일어나라.”

“……!”

냉정한 어조였음에도 아이는 겁먹지 않았다.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웅….”

아이가 일어나자, 사내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피가 나는 무릎을 손수건으로 감싸 묶어주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약병을 돌려주었다.

“뛰지 마.”

“…….”

“대답은?”

“네, 넷.”

사내는 만족한 듯 일어나서 본래의 자리, 키리아의 옆으로 돌아왔다.

광장에 있는 모두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키리아 역시 손을 멈추고 있다가 제논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키리아.”

“아, 네!”

키리아가 진단을 재개했다.

사람들도 최면에서 깬 듯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제논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방금 봤어요? 아주 가볍게 뛰어오른 모습.”

“봤어요…. 한 폭의 그림 같았죠….”

“저기서 저쪽까지 어떻게 그리 순식간에 달려간 건지! 진짜 바람 같네요.”

“로브 안에 입은 옷 봤어요? 잠깐 드러나긴 했지만 분명 고급스러웠어요.”

“봤어요…. 한 점의 조각상 같은 몸매까지….”

“게다가 의외로 목소리가.”

“한 편의 노래 같았죠….”

짧은 순간 제논의 구석구석을 캐치한 사람들이었다.

쐐기를 박은 건 넘어졌던 아이였다.

집으로 향하던 아이는 마음을 바꿨는지 제논에게 돌아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기사 오빠!”

오… 빠?

픕.

키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제논도 멍하니 반응이 없었다.

아이가 으히히 웃었다.

“아까 가까이 있었을 때 잘생긴 거 같았어요. 울 엄마가 잘생기면 다 오빠랬어요.”

어머님이 누구시니. 키리아는 조용히 속으로만 물었다.

“첨에는 오빠가 무서웠는데요 지금은 아니에요. 역시 공작님을 돕는 언니 오빠들이 나쁜 사람이 아닐 줄 알았어요.”

“방금… 뭐라고?”

제논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나쁜 사람이 아닐 줄 알았다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공작이 밉지 않아? 마물 공작 때문에 북부에 사는 너희까지 힘들어졌는데.”

그러자 아이는 제논을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왜 미워요? 공작님은 전쟁에서 우리를 구하고 또 우리를 지키다가 크게 다쳤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아픈 건데 왜 미워해요? 오빠는 공작님이 미워요?”

“…….”

제논은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질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끄덕였다.

일부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머쓱해하기도 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제논이 마침내 대답했다.

“…아니, 안 미워.”

“그죠?”

히 웃은 아이는 이제 진짜 갈 거라며 집으로 뛰어갔다.

“뛰지 마라.”

제논이 뒤에서 말하자 얼른 종종걸음으로 바꿨다.

아이가 떠난 뒤.

“저어, 이거 집에서 만든 건데.”

몇몇 사람들이 집에서 음식을 갖고 나와 제논에게 건넸다.

“사실 기사님이 무서워서 꼭 주치의님께 직접 드리려고 기다렸는데… 지금 보니 믿을만한 분인 거 같아서요. 같이 드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고맙다.”

제논이 어색해하며 그릇을 받았다.

그 뒤로 소소한 답례가 계속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제논을 완전히 공작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기애애해졌다.

잠시 쉬면서 키리아와 제논은 주민이 주고 간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제논이 중얼거렸다.

“아무 맛도 안 나는군요.”

“그래도 맛있죠?”

“…….”

키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제논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던지고, 대답 없이 쿠키를 한 입씩 전부 먹어 치웠다.

º º º

약을 나눠주는 일은 이틀 만에 끝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키리아는 제논과 함께 마을을 방문했다.

혹시 모를 복용 후의 증상들을 계속 진단하고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밖의 다른 질환들도 봐주기도 했다.

“휴.”

키리아는 진단 노트를 드디어 마무리하고 덮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제논이 보였다.

그는 수다스러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요, 그때 약제사님이요….”

“약제사님이 독초를 썼다고 해서 첨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근데 진짜인 거예요!”

깊게 눌러쓴 검은 후드 아래로, 제논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과묵했지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들도 그걸 알기에 제논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나중엔 좋은 아빠가 되시겠는데?’

미소를 짓고 있던 키리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약제사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거 집에서 만든 주스인데 괜찮으시다면….”

“어머, 괜찮은데. 고맙습니다. 저 그런데….”

키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한스 씨는요? 따님이 약을 받아가셨던가요?”

진료 기록을 다시 뒤져보는데 마을 주민이 말했다.

“그게 사실은… 한스 씨가 어젯밤에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어요.”

“네?”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대화를 들은 제논이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자세히 말해라.”

“아, 그게… 마물들이 엄포를 놓고 간 후에 자경단이 매일 밤 순찰을 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한 명이 돌아오지 않아서….”

다른 자경단원이 찾으러 갔지만 그도 오지 않았고, 결국 자경단 대장 한스가 어젯밤 찾으러 나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스와 함께 따라나선 나머지 자경단원들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위험하잖아요. 그런 건 빨리 말씀해주셨어야죠.”

“죄, 죄송해요. 자경단원들이 전에도 조금씩 늦게 돌아온 적이 있어서 기다려보려고 했던 건데….”

그때였다.

댕댕댕―

마을의 경보종이 울리고,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마물이다!”

“꺄아악!”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집안으로 피신했다.

자경단을 대신하기 위해 마을 장정들이 무장을 하고 나섰다.

북부인답게 나름대로 대비를 해 놨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훈련받은 병사가 아니라는 건 한눈에 보였다.

키리아는 제논과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며 말했다.

“계획대로 할게요.”

“조심하십시오.”

“공작님도요.”

제논이 마물들을 대비해 검을 빼들자마자 키리아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사실, 키리아와 제논은 자경단원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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