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루이스는 거친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실 그는 우리 속 원숭이처럼 구경꾼들이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정체는 전부 포이즌 리저드였다.
왜냐면 바로 이곳이 포이즌 리저드 케이브였으니까.
“분명 잘 도망친 줄 알았는데… 제길.”
마물 공작과 그 사악한 무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루이스는 텔레포트 아티펙트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산속 어딘가로 이동됐다.
하늘에는 여전히 푸른달이 떠 있었지만, 루이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무작정 달렸다.
몇 분쯤 뛰었을 때는 탈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 거기서 포이즌 리저드 무리랑 딱 마주칠 게 뭐냐고!’
하필 랜덤으로 이동된 곳이 포이즌 리저드 케이브 부근이었을 줄이야!
루이스는 포이즌 리저드 정찰병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고, 그 즉시 때려눕혀져 이곳으로 끌려왔다.
‘재수 없는 북부! 북부의 기운이 내 운을 몽땅 털어간 게 분명해!’
바득바득 이가 갈렸다.
포이즌 리저드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그를 바짝 뒤쫓아오던 켈베로스에게 목숨을 잃었을 테지만, 루이스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주변에서 포이즌 리저드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런데 초록 보석을 가지러 간 녀석들은 왜 안 온다?”
“땡땡이 쳤다?”
듣고 있던 루이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생명석 말입니까, 마물님들? 반들반들한 녹색 수정 안에 금빛이 반짝거리는 광석 말입니다.”
“케륵? 인간, 그걸 어떻게 안다?”
“잘 알다마다요….”
루이스는 이를 갈았다.
고 당돌한 계집애 때문에 공작의 꼬투리를 잡는 것도 실패하고, 실패를 벌충하기 위해 생명석을 가져가는 것도 실패했다.
자신만 망하자니 억울했다.
그래서 이 마물들이 자기 대신 약제사를 해코지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걸 훔쳐 가는 사람을 제가 봤으니까요, 마물님들!”
“케륵?”
마물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그 도둑은 바로 약제사 계집입니다. 마물 공작의 충복이죠. 제가 ‘그 광석은 포이즌 리저드님들의 것이드아!’ 라고 아주 정의롭게 외쳤지만 듣지도 않고 마음대로 훔쳐 가더라고요!”
“케륵! 케륵! 건방진 인간!”
“죽여야 한다!”
마물들이 화가 나서 날뛰었고 루이스가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쿵.
육중한 발소리가 굴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더니 다른 마물들보다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약제사가 그걸 왜 가져갔지?”
다른 녀석들보다 덩치가 배는 되는 그 마물은 온몸이 보랏빛 반점으로 덮여 있어 흉측했다.
크륵… 크륵….
힘겹게 들이쉬는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시 못 할 위압감을 지닌 포이즌 리저드 킹이었다.
우두머리가 입을 열자 무리의 다른 녀석들은 조용해졌다.
“빨리 대답 한다 인간!”
“힉.”
루이스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조금 전과 달리 머리를 굴릴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대답했다.
“그, 그걸로 이상한 독감을 치료할 약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간 우두머리가 몸을 루이스 쪽으로 확 기울였다.
“이상한 독감?”
“그, 모, 몸에 보라색 반점이 생기는 특이한 독감이라고 들었습니다. 여, 여기! 제 몸에 있는 것처럼요.”
“그걸 없애는 약을 만들 수 있다고 했나? 약제사가?”
“그렇습니다….”
“마물도 치료할 수 있나?”
“네? 어, 그건 잘….”
루이스는 당황했다. 그는 약제에 관한 건 잘 몰랐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고 하면 눈앞의 우두머리가 목을 쳐버릴 기세였기에, 오금이 저려서 얼른 대답해버렸다.
“예, 예! 듣습니다. 들을 겁니다!”
“…….”
크르륵. 뜻 모를 낮은 신음소리가 울렸다.
이 대화를 들은 다른 녀석들도 아주 조용해졌다.
눈치를 살피던 루이스는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약제사는 마물님들의 보물을 훔쳐간 아주 간악한 인간이니까 아주 혼쭐을 내주시는 게….”
“작전을 변경한다.”
포이즌 리저드 킹이 그의 말을 뚝 자르고 명령했다.
“초록 보석을 훔쳐간 공작의 약제사를… 모셔 와라.”
“케륵?”
우리가 제대로 들은 건가?
부하 마물들이 땡그래진 눈을 끔벅거렸다.
“인간을… 우리가 모셔오는 겁니까?”
“물론 나의 알을 빼앗아간 인간 마을에 대한 복수는 잊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불리하다. 우린 쇠약해졌다.”
“케르륵….”
“우린 다시 강해져야만 하는데, 이제 남은 방법은 약제사뿐이다. 약제사는 우릴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 다쳐선 안 된다! 알아들었겠지!”
우두머리의 뜻에 탄복한 포이즌 리저드들이 창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케륵!”
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자연스럽게 다음 과제가 생겼다.
마물들은 인간을 어떻게 해야 다치게 하지 않고 ‘모셔올 수’ 있는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손발을 묶어서 데려온다.”
“인간의 손발은 약하다. 부러지면 어떡하나?”
“그럼… 몸만 묶어서 밧줄로 끌고 오면?”
“그것도 위험하다. 인간이 여기까지 따라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한다?”
“인간은 너무 어렵다….”
이 흐름을 멍하니 보고 있던 루이스는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왜! 왜 이렇게 되는데! 제정신이야?”
포이즌 리저드가 루이스를 가리켰다.
“대장님, 이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쓸모없으니 비상식량으로 가둬놓는다.”
“아, 안 돼! 비상식량이 되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그 약제사라고! 안 돼! 놔아악!”
케이브에 루이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º º º
“끄어어….”
머리를 위로 동그랗게 틀어 올린 키리아가 흐느적 흐느적 방에서 나왔다.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다가 바깥으로 나온 곰의 기분이 이럴까?
개인실 겸 연구실에 스스로를 가둔 키리아는 사흘 밤낮을 치료약 제조에만 매달렸다.
여유로운 줄 알았던 생명석의 양은 막상 작업을 시작해보니 빠듯했다.
실수라도 해서 재료를 낭비할 수 없었기에, 돕고 싶다는 조앤의 청도 거절하고 혼자 작업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라데츠에 배포할 변이 독감 치료약을 모두 만들고 방을 나온 키리아였다.
“헉, 살아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가울이 가장 먼저 키리아를 발견했다.
키리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절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식사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했다.
“야, 빨리 먹어!”
가울이 키리아의 입에 빵을 집어넣었다.
“다짜고짜 그러면 목이 메이지 않습니까, 가울. 자, 키리아 양. 물 드세요.”
로하넨이 가울을 나무라며 키리아에게 물잔을 건넸다.
조앤은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만져주고, 마물들이 키리아의 어깨를 주물렀다.
앨마와 하인들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며 키리아를 식당으로 데려가 든든히 먹였다.
덕분에 키리아는 웅녀에서 겨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조금 흐느적거리긴 했지만 기력을 되찾은 키리아가 말했다.
“치료약을 완성했어요. 제 솜씨 덕분에 단 하나의 생명석도 낭비하지 않았고요. 마을 사람들이 쓰기에 충분할 거예요.”
“신이여, 아니, 키리아 양.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는 이번 달 보너스로 받을게요. 그런데 공작님은요?”
키리아는 마을로 직접 가야겠다며 얼굴이 새파래졌던 제논이 걱정됐다.
어깨 너머로 누군가가 건네는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키리아가 물었다.
“약이 준비됐으니 함께 마을로 가야 하는데 어디 계세죠?”
“하하…. 저기 계시네요.”
로하넨이 대답하며 키리아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뒤를 돌아본 키리아는 흠칫했다.
조용히 냅킨을 건넸던 사람이 바로 제논이었다.
그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아주 음침한 차림이었다.
“고, 공작님?”
“네.”
“마을에 가신다면서 그 음침한 로브는 뭐예요?”
“내 외출복입니다.”
뭐시라고요?
“치료약이 아니라 독약을 나눠주려는 흑마법사 복장이 아니고요?”
재밌는 농담이라는 듯 제논이 소리 없이 웃었다.
‘농담 아닌데…. 하긴.’
변장 마법도 통하지 않으니, 이렇게 붉은 눈과 마물의 팔을 숨기려면 온몸을 가려야 하겠지.
제논에게서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키리아가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을을 위해 준비하는 동안 그도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주군, 머리를 다시 정돈하시죠.”
“왕, 식사는 든든히 하셨습니까? 먹어야 인간들한테 맞설 수 있습니다!”
“도련님 로브에 주름이… 이거 다림질한 녀석 누구냐?”
로하넨과 가울, 앨마가 초조하게 이것저것 챙겨댔다.
특히 로하넨이 손수건까지 챙겨주며 전전긍긍했다.
“주군. 제가 만일을 위해 백 미터 밖에서 주군과 키리아 양을 뒤따르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일 때 제 이름을 한 번 부르시면 몰래 축복을 걸어서 후광효과를 드리고 두 번 부르시면 바로 나타나서 사태 해결을….”
“해고당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제논이 딱 잘랐다.
잠시 후, 외출준비를 마친 키리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제논의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마차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마나 진단을 해드릴까요? 우황청심… 아니, 진정효과를 위해서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키리아는 제논의 거절을 거절하고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유능한 주치의가 옆에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라고요. 엣헴.”
불쌍한 내 팬, 내가 챙기지 누가 챙기겠어?
그런 생각으로 혼자 뿌듯하게 히죽거리던 키리아는 깜짝 놀랐다.
키리아에게 잡히자 잠시 뻣뻣해졌던 제논의 손이, 조금씩 움직여 키리아의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단단한 뼈가 느껴지는 긴 손가락과 키리아의 하얀 손가락이 하나씩 얽혔다.
“엇….”
당황한 키리아가 제논을 쳐다보자 오히려 제논이 의아하게 물었다.
“마나 진단은 원래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마, 맞아요. 그렇죠.“
뭐지, 이 기분은…?
그저 평범하게 마나 진단을 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울렁이는 기분이 들면서 도망치고 싶다는 황당한 생각까지 드는 건 처음이었다.
º º º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공작성 식구들이 키리아와 제논을 배웅했다.
“주군, 괜찮으실지… 걱정입니다 정말.”
로하넨이 오늘 오전에만 열 번 넘게 닦은 안경을 또 닦으며 중얼거렸다.
제논이 마물병에 걸렸을 때 로하넨은 가장 먼저 성안의 거울을 치워버렸다.
푸른달이 드러낸 주군의 변한 모습을 보고 말았을 땐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자고 맹세했다.
그런데 주군이 먼저 푸른달의 비밀을 털어놓으실 줄이야.
게다가 마을로 나가기까지!
로하넨이 바라 마지않던 주군의 변화였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염려도 됐다.
앨마가 로하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지 않겠수? 저길 봐요.”
로하넨은 앨마의 시선을 따라 마차로 향하는 키리아와 제논을 바라봤다.
제논과 나란히 걷고 있으면서도 어째선지 계속해서 반걸음 앞서가는 작은 키의 키리아.
그런 그녀의 보폭을 맞추면서 뚜벅뚜벅 뒤따르듯 걷는 키가 큰 제논.
두 사람은 마치 작은 주인과 그녀를 호위하는 군견 같았다.
“…그러게요.”
앨마의 물음에 로하넨이 뒤늦게 대답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괜찮으실 것 같네요.”
이윽고 두 사람이 오른 마차가 마을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