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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7/141)

47화

“뭐, 뭐야? 웬 마물이… 으아악!”

루이스가 도망칠 틈도 없이 켈베로스가 달려들었다.

대형견인 켈베로스가 깔아뭉개자, 루이스는 옴짝달싹 못하고 돌바닥에 짓눌렸다.

“감히 왕의 자원을 빼앗으려고 해?”

험악하게 외친 건 가울이었다.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는 생명석이 담긴 가방을 루이스에게서 휙 빼앗았다.

“마족!?”

경악한 루이스의 눈이 커졌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키리아를 보고는 커진 눈이 더욱 커졌다.

“야, 약제사…! 마물 공작의 사람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

“글쎄요. 그쪽이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될까요?”

뾰족하게 말한 키리아는 루이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뒤를 힐끗 돌아봤다.

“공작 각하가 계신데 말이죠.”

거기에는 음영 속에 모습을 감춘 장신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제논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입이군.”

낮고 무심한 일갈에 상황을 파악한 루이스가 희게 질렸다.

“헉.”

그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란페르세 공작 각하. 제가 그만 실언을….”

제논이 귀찮은 태도로 그의 말을 끊었다.

“조금 전 혼잣말을 하던데. ‘그분’이라고.”

“…예? 제가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전부 제 헛소리입니다. 그럼요.”

얼굴이 새파래진 루이스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무래도 입을 꽉 다물 작정 같았다.

“왕. 제가 심문하겠습니다.”

가울이 루이스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으르렁거렸다.

그런 그를 보는 제논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가울.”

“에, 옙?!”

지은 죄를 알고 있는 가울이 흠칫했다.

“일단 저자를 성으로 데려가라.”

“예…! 켈베로스, 이놈을 일으켜.”

가울의 지시에 켈베로스가 루이스의 등을 누르고 있던 앞발을 들었다.

그러자마자 루이스의 생존본능이 번득였다.

“뜨아압!”

요란한 기합을 지르면서 그가 제 가슴에 있던 아티펙트를 때렸다.

순식간에 빛이 번쩍하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런 강렬한 빛에 눈을 괴롭게 끔벅거리던 가울이 사태를 깨닫고 분노했다.

“이런, 저 자식이! 왕, 제가 당장 가서 잡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제논이 음영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 가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그 자가 섬기는 게 누구인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니까. 게다가 푸른달이 뜨는 밤에 혼자 깊은 숲을 헤매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하며 제논이 켈베로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렇지 않은가, 켈베로스?”

“헛… 존명!”

한 박자 늦게 명령을 이해한 켈베로스가 루이스를 쫓아갔다.

켈베로스가 달려 나간 뒤 갑작스레 침묵이 찾아왔다.

원인은 제논의 푸른달의 모습.

키리아는 어쩔 줄 모르는 가울과 담담하지만 씁쓸해하는 듯한 제논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쩔 거야, 이 분위기.’

가울의 태도는 조금 전 켈베로스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제논이 모습을 드러낸 직후, 켈베로스는 말은 안 했어도 행동으로 제 기분을 표현했다.

녀석의 꼬리가 힘차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물로서는, 자신이 모시는 왕이 멋진 마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명령을 받고 루이스를 쫓아가던 순간에도 무척 기뻐보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마족인 가울도 같은 반응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얌전하지…?’

가울의 꼬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단순한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왕이 강력한 마족이 되었다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키리아는 가울의 꼬리가 혹시 미미하게 흔들리는 건 아닌지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가울이 자신의 엉덩이를 휙 가리고 키리아를 경계했다.

“야. 왜 남의 엉덩이를 자꾸 훔쳐봐? 그거 수치스럽거든?”

“내, 내가 언제!”

“…키리아.”

“아니, 공작님까지!”

키리아는 두 남자의 미심쩍은 시선이 억울해서 허! 기가 찬 한숨만 내뱉었다.

그 덕분에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쭈뼛거리던 가울이 이내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고는 제논의 앞에 부복했다.

“왕. 저를 방패로 쓰시든 어떻게 쓰시든 적극 이용해주십쇼.”

“갑자기 무슨 소리지?”

가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전… 왕이 전쟁에서 누구보다 많은 마족을 죽인 걸 압니다. 그만큼 마족을 싫어하시는 것도 알고요. 그런데 지금 왕의 모습이 영락없는 마족이잖습니까.”

“…….”

까득, 가울의 손톱이 암석 바닥을 긁었다.

“그것도 모르고 전 왕에게 누구보다 충성스럽다면서 자부했습니다. 그냥 제가 마족이라 절 싫어하신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멍청이! 전, 전 측근의 자격이 없습니다!”

“……음.”

가울의 격한 반응에 이번엔 제논이 당황한 듯했다.

“…네가 마족이라서 신뢰하지 않은 게 맞는데.”

“예, 예?”

“난 마족이 정말 싫다.”

“마, 마족이라 죄송… 크흡.”

곧 울 것 같은 얼굴의 가울이었다.

“하지만… 그래. 어쩌면 네가 생각한 그 이유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혼잣말처럼 읊조린 제논이 가울을 바라봤다. 기특해하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순한 바보인 줄 알았더니 생각이 의외로 깊구나.”

“지금 칭찬해주신 겁니까…? 이런 저를? 흐윽, 감사합니다!”

감동한 가울이 끝내 질질 짰다.

보고 있던 키리아는 기가 막혔다.

공작님이 한 말, 꼭 칭찬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잘 됐어.’

푸른달이 뜨면 자신의 성에서도 마음 편히 있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혔던 제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털어놓았으니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자신에 이어 가울까지 알게 됐으니 앨마에게도 숨길 이유가 없고 말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변화였다.

그리고 키리아는 자신의 고용주이자 팬에게 더 큰 변화를 주고 싶어졌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된 후.

키리아는 마을에 도는 변이 독감과 루이스가 연관되어 있음을 제논에게 설명했다.

설명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비록 성에 묶여 있더라도, 제논은 꾸준히 마을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가 마을에 마물을 풀어놓아서 독감이 변이된 거였군요.”

“네, 맞아요.”

“도망친 남자가 한 짓이지만, 그걸 지시한 인물은 따로 있고요. 하지만 진짜 배후는 황제겠죠.”

“황제 폐하요?”

갸웃하는 키리아에게 제논이 담담히 말했다.

“황제는 내 땅과 내 자리를 원합니다. 북부 수도에는 이미 황제의 입김이 닿고 있죠.”

“그런! 여긴 공작님의 땅이잖아요?”

“…황제의 생각은 다른 모양입니다.”

제논의 어조는 체념에 가까워 보였으나, 그의 눈빛은 순간 날카로움을 띠었다.

“그런데 키리아. 이 정도 생명석이면 충분합니까? 라데츠 주민들을 치료하려면.”

“아, 네! 양은 충분해요. 이제 필요한 건 시간이죠. 며칠 밤 좀 새면 돼요.”

대수롭지 않아하는 키리아의 말에 가울이 잔소리를 했다.

“약해 빠진 게 밤을 샌다고? 웃기지 마. 그러다 네가 쓰러지면 책임질 거냐?”

“아니.”

제논이 고개를 저었다.

“치료약은 한시라도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곧 포이즌 리저드가 마을을 습격할 텐데, 병자가 많을수록 대처가 힘들어지니 사상자가 생겨.”

“맞아요.”

키리아는 자신의 가방을 손으로 짚어 안에 있는 알을 확인했다.

포이즌 리저드 우두머리의 알.

포이즌 리저드들은 알을 돌려주지 않으면 마을을 짓뭉갤 거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금이 간 알을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놈들의 무리는 내 예상보다 많은 것 같다.”

제논이 굴의 벽면을 짚었다.

“이 정도의 케이브를 버리고 이사한 걸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여기 살던 놈들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요?”

제논의 측근이 되고 싶어서 근처에 눈여겨봐야 할 위험한 마물들의 세력을 체크했던 가울이었다.

“짧은 시간에 번식했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다른 무리와 합쳐졌다는 뜻이다.”

“다른 무리 말입니까…?”

“이 근방에서 생명석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력이 생명석을 갖고 이쪽으로 와서, 기존의 세력을 흡수하고 둥지를 옮겼다고 봐야 타당하겠지.”

“우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추측과 설명에 키리아가 감탄했다.

역시 전쟁터에서 마물들을 도륙한 제논의 경력이 빛을 발했다.

키리아의 탄성이 나온 직후, 제논의 허리가 은근슬쩍 곧게 펴졌다.

“…그러니 생명석의 출처를 알아내려면 포이즌 리저드의 현재 케이브를 알아내야 한다.”

“역시 왕이십니다! 하긴, 놈들의 둥지를 숨기는 실력 하나는 마족도 혀를 내두를 정도니까요.”

“그래. 그러니 케이브를 추적하기 위해 놈들의 습격을 이용할 생각이야.”

제식 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꼿꼿한 자세의 제논이 키리아를 돌아봤다.

“그러니 키리아, 고생스럽겠지만 서둘러주십시오.”

“저한테 맡기세요.”

키리아는 기쁘게 말했다.

원작에서는 포이즌 리저드 무리의 규모를 뒤늦게 알아서 피해가 컸었는데, 지금은 달라진 것이다.

‘역시 내 팬이야. 아주 기특해! 대견해! 앗, 이런.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네.’

키리아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공작님. 마물들의 습격을 이용한다 하셨는데 언제 습격할 줄 알고요?”

“곧 있으면 라데츠의 겨울맞이 축제가 시작됩니다. 축제 전날이 가장 어수선하겠죠.”

“그럼 로하넨이나 하인들이 잠복해 있을 건가요? 마물들이 나타나면 공작님께 알리고?”

제논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로하넨을 보내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정보가 내게 닿기까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가울을 보낼 수도 없었다.

마을에 마족을 잠복시키는 것부터가 위험했고, 가울은 제논이 그를 소환할 때와 달리 제논의 의식에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논은 결단을 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제논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봐도 결국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안심이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제논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직접 마을로 가겠습니다.”

“네? 진짜로요?”

“직접 말입니까?”

키리아와 가울이 깜짝 놀랐다.

그건 제논이 2년 만에 칩거를 깨고 마을에 나타나겠다는 뜻이었다.

‘커밍아웃에 이어 이런 외출까지 결심하다니!’

물꼬를 트니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구나!

하지만 키리아는 그의 안색을 보고는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공작님…. 진짜 괜찮겠어요?”

“…….”

제논의 낯빛이 푸른 피부색 이상으로 새파래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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