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본래의 모습이 남아있어요. 여기.”
바로 눈이었다.
순금을 녹여 빚어낸 듯한 금색의 눈.
누구든 이 눈을 보면 도저히 마족을 연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금안은 황제의 왕관보다 고결한 빛을 품고 있었다.
제논은 새삼 확인하듯 자신의 눈가를 손끝으로 짚었다.
“…하지만 이 눈도 머지않아 변하고 말 텐데요.”
“중요한 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손을 쓸 시간이 있다고요!”
밝게 말하며 키리아는 제논의 한쪽 손을 양손으로 꼭 감쌌다.
어설픈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회복 가능성이 정말로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키리아의 얼굴은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들뜰 정도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알게 돼서 다행이야!
키리아가 들뜬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제논의 금안은 마물병의 치료 가능성 이외에도 한 가지 의미가 더 있었다.
바로 숲지기에 관한 것.
‘숲지기의 눈도 금색이라고 했어.’
이걸로 키리아는 확신했다.
‘공작님이 숲지기였어!’
아무리 마이웨이로 독초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인정해주는 이 없이 비난만 계속되면 의욕이 꺾이고 자괴감마저 든다.
그때 숲지기는 자신의 연구 칼럼을 꼼꼼히 읽어주고 격려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최근엔 혼자서 메데이아를 인기투표 3위에 올려주기까지 했다.
팬이지만 동시에 은인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제논이었다니!
‘여태까지 난 숲지기가 속 편한 북부 부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마물병 때문에 혼자 끙끙 앓는 사람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수다스런 편지를 은근히 귀찮아했던 게 미안해졌다.
‘내가 편지 답장을 늦게 했어도 탓하지 않았지. 오히려 내 고민을 들어주고 응원해줬잖아.’
안 그래도 계속 생각했었다.
숲지기를 만나면 그의 상상 이상으로 팬 서비스를 듬뿍 해주고 싶다고.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비록 내가 메데이아라는 걸 밝히지는 못하더라도….’
가시밭길을 걷는 내 팬을 구해줄 수는 있다. 그래야만 한다!
결심이 단단해질수록 키리아가 뜨거운 콧김을 내뿜자, 제논이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슬슬 빼내려고 했다.
어딜 도망가?
키리아는 그의 손을 더욱 당겨 붙잡았다.
“공작님, 저 믿죠? 적어도 전 제 업무에 관련해선 공작님께 거짓말한 적 없어요. 전 공작님의 주치의고 공작님 편이에요. 오직 공작님만의 편!”
“…나만의?”
제논의 눈썹이 의아하게 찌푸려졌다.
“왜죠? 동정심입니까?”
“아뇨. 보수는 확실히 받을 건데요. 저 비싼 인력이에요. 제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받아갈 거니까 잘 챙겨주세요. 에누리 없습니다.”
겸손 따위는 없었다.
짧게 실소한 제논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전에 그대가 내 방에 숨어들었을 때 말했죠. 그대에겐 마물병을 치료할 이유가 있다고. 그게 뭡니까?”
“아,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인데….”
키리아는 망설였지만 닫혀 있는 제논의 마음을 열려면 이쪽도 진심을 털어놓아야 했다.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까봐 조심하면서 키리아가 말을 이었다.
“제 동생이 메두사 병에 걸려 있어요. 몸이 서서히 석화되는 희귀질환이죠.”
“메두사 병이라는 건 처음 듣습니다만.”
“네. 그럴 거예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원인불명이라 신전에서도 저주라고만 하고. 그런데… 그 병이 공작님의 마물병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 마물병과…?”
“공작님이 로하넨에게서 신성력을 받을 때, 석화 증상이 잠깐 나타난 걸 봤거든요. 정확히 메두사 병의 증상과 일치했어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던 키리아는 다시 밝게 말했다.
“자세한 건 아직 몰라요. 하지만 분명히 두 병은 연관돼 있고, 제가 그걸 밝혀낼 거예요.”
제논은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침묵이었다.
이윽고 그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물었다.
“내 편이 된다는 건 많은 적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키리아는 빙긋 웃었다.
“어머, 이런 우연이. 저도 적이 많거든요.”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인데도 적이 많단 말입니까?”
“아! 그, 스승님의 적이 저의 적이란 소리예요. 일심동체 뭐 그런 거. 아시죠?”
“…흠.”
제논은 별로 동감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일단 납득은 한 듯했다.
“어쨌든 메데이아를 옆에서 지켜봤다면 잘 알겠군요. 적이 많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연하죠.”
키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때 같은 편이 된 사람이 가장 충실한 아군이 된다는 것도 알고요.”
숲지기, 당신처럼 말이에요.
“그러니까 절 놓치지 마세요. 공작님이 마물병 때문에 반쯤 마족이 되어버렸어도, 주치의로서 전 끝까지 공작님의 손을 잡아드릴 거예요.”
“진심… 입니까?”
“네.”
강하게 고개를 끄덕인 키리아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며 샐쭉 웃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제논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키리아였다.
“…그대를 놓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제논은 낮게 읊조렸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뿌리를 뻗고 있던 것인지는 몰랐다.
제논도 모르는 사이 심어져 있던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단비를 머금고 움을 틔웠다.
그건 메데이아를 그릴 때 느껴지는 열성적인 감정과 아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결이 다른 감정이었다.
지금의 제논으로서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아, 제가 손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죠?”
키리아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자마자 제논이 다시 붙잡았다.
“놓치지 않아도 된다면, 놓치지 않겠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체온을 붙잡고 싶어졌을 뿐이다.
제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쯤 잠겨있었다.
그에 키리아는 왠지 볼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과 달리 자신의 손을 잡은 제논의 커다란 손이 뜨거웠다.
‘주치의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약간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은데….’
생각해보니 나 같은 인재를 놓치지 말라고 어필한 건 내가 먼저였다.
‘쩝. 하긴 원래 말을 직설적으로 던지는 분이니까.’
납득하고 보니 인재를 잡기 위한 고용주의 노력으로 보여 가상했다.
키리아는 씩 웃으며 제논에게서 손을 빼고 그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좋아요. 우린 좋은 고용관계가 될 거예요.”
“고용관계… 그렇죠.”
어딘가 시원치 않은 기색으로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기는 맞는 말이니까.
“어쨌든.”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제논이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의 거부는 멍청한 짓이겠죠. 그대에게 마물병의 치료를 맡기겠습니다.”
“헉! 정말요?”
“네.”
“꺄악! 드디어!”
두 팔을 활짝 벌린 키리아가 무심코 제논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수비가 더 빨랐다.
찹.
찰진 소리와 함께 제논의 손바닥이 키리아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그대로 천천히 밀어냈다.
“…….”
“우리가 이럴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으으.”
키리아는 자존심이 상했다.
무심결에 나온 행동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거부당하다니!
그것도 숲지기가 그러니까 평소보다 더 창피했다.
“지금 엄청 대단한 영광을 놓치신 거거든요? 완전 후회하실 거거든요? 제가 아무나 끌어안지는 않거든요?”
“아, 네.”
“씨이.”
키리아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공작님은 내가 메데이아라는 걸 모르고 저러는 거다.
몰래 팬서비스를 해주려면 이 정도는 이쪽에서 감수해야 했다.
“좋아요. 그럼 대신 제 사인이라도 받으세요.”
“…내가 왜요?”
“저랑 공작님의 원만한 고용관계를 위해서? 메데이아의 비밀 제자의 사인은 아직 받아간 사람이 없는 희귀템이라고요.”
“됐습니다.”
“이것도 싫어요? 알았어요 그럼.”
키리아가 제논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악수에서 만족하세요.”
“…….”
키리아의 꾹 닫힌 입술이 씰룩였다.
‘내 팬하고 첫 악수!’
흐뭇한 웃음을 참느라 입술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제논이 걱정스러운 낯빛이 되더니 키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키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저 제정신이거든요?”
“다행이군요.”
흥. 키리아는 새침하게 악수를 거두고 말했다.
“흠흠! 아무튼 이제 돌아갈까요? 참, 그 전에 생명석을 챙기고요.”
아까 생명석을 담은 가방을 저쪽에 떨어뜨렸었다.
키리아는 생명석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제논에게 붙잡혀 잡동사니 뒤편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
키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자 제논이 검지를 제 입술에 조용히 가져다 댔다.
키리아는 그가 이러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포이즌 리저드의 둥지에 또 다른 방문객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거구나! 드디어 찾았어!”
잡동사니 틈새로 불청객의 정체가 보였다.
‘끄나풀이잖아!’
루이스는 생명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안에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온몸이 흙투성이에 지저분했다.
“흐, 흐흐. 드디어 찾았어. 좋아, 아티팩트도 제대로 반응해. 이건 분명 마정석 이상의 물건일 거야.”
그가 생명석을 제 주머니에 쓸어담기 시작했다.
“주치의라는 여자가 방해해서 공작의 꼬투리를 잡는 건 실패했지만, 이걸 가져가면 그분께서도 좋아해주시겠지….”
그 모습을 보며 키리아는 손수건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게 어떤 건데!’
마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할 약재가 눈앞에서 털리고 있다니!
그런데도 제논은 조급함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씩씩대는 키리아를 재밌다는 듯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힌 키리아가 톡 쏘려고 하던 그때였다.
“컹컹!”
험악하게 짖는 소리에 이어 머리가 셋 달린 검은 개, 켈베로스가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