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41)

45화

“이제 한 번만 옮기면 끝이다.”

“……?!”

헉, 뭐지?

키리아는 휙 뒤를 돌아봤다.

굴 입구에서부터 다가오는 한 무리의 그림자가 보였다.

‘숨어야 해!’

하지만 몸을 숨길 수 있는 잡동사니는 키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결국 숨기도 전에 수상한 무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케륵! 인간이다!”

“우리 걸 훔쳐가고 있다!”

굴에 나타난 건 세 마리의 포이즌 리저드였다.

포이즌 리저드들은 키리아가 손에 쥐고 있는 생명석을 발견하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아, 아냐! 난 버려진 줄 알고… 힉.”

항변이 끝나기도 전에 키리아의 턱밑으로 투박한 창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녹슨 칼날이 키리아의 목을 꾹 눌렀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바로 피를 볼 것 같았다.

‘어, 어떡하지!’

그때였다.

“케륵, 나 이 인간 안다. 마법을 쓰는 인간.”

포이즌 리저드 하나가 키리아를 알아봤다.

마법 운운하는 걸 보아 마을 약재상에서 마주친 녀석인 것 같았다.

‘마법을 쓴 건 내가 아니라 조앤인데.’

하지만 내가 마법사라서 멈칫했다면 굳이 오해를 풀 필요는 없지.

키리아가 턱을 치켜들었다.

“맞아. 내가 그 마법사야. 혹시 마법이 필요하다면….”

“마법사는 우릴 방해했다! 당장 죽인다!”

“자, 잠깐만! 나 아냐, 아니라고! 꺄악!”

제길, 오답이었어!

기겁한 키리아가 눈을 꽉 감았을 때였다.

“켈록켈록! 컥컥!”

한 녀석이 거세게 기침을 터뜨렸다.

그러자 연이어 다른 녀석들도 기침이 터졌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그 기침소리는 키리아가 마을에서 지겹도록 들은 것이었다.

‘이거 설마, 변이 독감?’

이제보니 포이즌 리저드들의 몸에도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었다.

‘하긴 마물의 알도 걸렸었으니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

기침은 꽤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켈록켈록!”

그럴수록 포이즌 리저드들은 두려운 낯빛이 되었다.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어.’

키리아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와중에도 눈을 반짝 빛냈다.

조금 있으면 가울이 놀이를 끝내고 키리아를 찾으러 올 터였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끌어보자.

키리아는 겨우 기침이 잦아든 마물들에게 짐짓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기침이 한 번 터지면 잘 그치지 않고 몸이 뜨겁고 피부에도 이상한 반점이 늘어나고 있지 않아?”

“케륵, 어떻게 안다?”

“맙소사.”

키리아는 비극적인 동작으로 손등을 이마에 올렸다.

“그건 공작성 마물들도 앓았던 병이야.”

“케륵…?”

“기침이 그치지 않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다가, 나중에는 피를 토하고 죽는 병이라구!”

“그, 그럴 리 없다! 네가 어떻게 안다?”

“난 마법사잖아. 아주 똑똑하다고. 방금 너희 기침이 오랫동안 이어진 걸 보면 분명 다음 기침이 너희 마지막이야!”

“……!”

인간 마법사는 똑똑하다. 그건 마물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포이즌 리저드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하지만 난 마법사니까 치료약을 만들 수 있지. 바로 이 생명석을 이용해서 말이야.”

“생명석? 초록색의 보석을 말하는 건가?”

“맞아.”

키리아가 끄덕이고는 가방에서 독초들을 꺼내보였다.

“날 풀어준다고 약속하면 내가 너희들의 약을 이 자리에서 만들어줄게. 어때?”

“케르륵….”

포이즌 리저드들이 고민스럽게 서로 쑥덕거렸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 마법사는 똑똑하다. 정말 기침을 멈출 수 있을지도….”

그럼 그럼.

“기침은 멈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보다 대장님의 기침이 우선이다.”

“그렇다면 대장님한테 데려가자.”

“좋다.”

…엥?

마물들의 논의를 들으며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이던 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아닌데?

“꺄악!”

그 순간, 포이즌 리저드들이 키리아를 붙잡더니 가져왔던 자루에 그녀를 우겨넣었다.

키리아가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악, 뭐하는 거야!”

“넌 똑똑하다. 그러니 대장님께 데려간다.”

“이익, 똑똑한 사람은 이럴 게 아니라 모셔가야지!”

키리아는 힘껏 저항했지만 결국 자루에 꼼짝없이 갇혔고, 자루의 입구가 닫히고 말았다.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됐는데!’

심장이 철렁한 키리아는 자루를 찢으려고 애를 썼다.

“누구 없어요? 가울! 도와줘!”

그 순간이었다.

쉭!

예리한 파공음이 포이즌 리저드들이 내는 소음을 뚝 끊어버린 직후.

투두둑.

여러 개의 고깃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자루 밖의 소리에 키리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뭐, 뭐야?’

포이즌 리저드보다 더 무서운 마물이라도 나타난 거야?

키리아는 오들오들 떨면서 천천히 열리는 자루 입구를 바라봤다.

이윽고 푸른 달빛과 함께 키리아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영이 드러났다.

“제정신입니까?”

어쩐지 화가 난 낯빛의 제논이었다.

“푸른달이 뜨는 날은 특히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가울은 그대를 두고 어딜 간 겁니까?”

그답지 않게 감정이 격해진 모습에 키리아는 대답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그게….”

“…….”

눈치를 살피는 키리아를 보고 제논은 멈칫하더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이윽고 그가 키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켰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덕분에요.”

제논이 키리아의 상태를 훑어봤다.

그 사이 제논과 마주 선 키리아는 위화감을 느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다.

“어? 공작님 모습이….”

“…….”

움찔한 제논이 음영 속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푸른달이 뜨면 난 마물병에 걸리지 않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공작님의 진짜 눈동자는 붉은색이 아니라 황금색이었군요.”

음영 속에서도 제논의 순도 높은 금안이 또렷했다.

상대를 짓누르는 진득한 적안이 아닌 고귀한 황금빛의 눈동자.

“팔은요…?”

키리아의 물음에 제논이 오른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소매가 걷히면서 검은 용의 팔이 아닌 단단한 남성의 팔뚝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의 신체는 여전히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옅은 푸른빛이 도는 피부.

용을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검은 뿔이 머리에 돋아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귀는 뾰족했다.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확연히 눈에 띄었다.

등 뒤에는 검은 용의 날개가 있다.

그 이질적이고 신비로운 모습은 틀림없는 마족, 그것도 고위 마족의 모습이었다.

“…마물병에 걸리고 잠시 동안은, 푸른달이 뜨는 날마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푸른달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죠.”

담담한 체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인간으로 돌아오는 그 하루를 이용해 마물 토벌에 나서본 적도 있습니다.”

그때가 아니면 직접 나설 수가 없었다.

제논 자신도 스스로가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는데, 그 신체를 외부에 드러낸다니?

상상조차 힘들뿐더러, 설령 그랬다간 그나마 남아있는 자신의 입지가 무너질 게 뻔했다.

그건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충신들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예고 없이 찾아오는 폭주까지 제논을 괴롭혔다.

그런 그에게 푸른달이 돌려주는 하루뿐인 본모습은 자신을 붙잡아주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희망 후의 절망은 더 컸다.

어느 날부턴가 그는 인간이 아닌 마족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본질이 영영 바뀌어버린 것처럼.

이야기를 마친 제논이 낯선 물건을 보듯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푸른달이 뜰 때마다 피부가 변하고 뿔과 날개가 돋아났죠. 그때마다 마물들도 날뛰고.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

“이미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의 모든 외부활동이 끊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제논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물병을 치료하면 지금의 나는 완전한 마족이 될 겁니다. 그러면 마물들은 푸른달이 뜨지 않더라도 날뛸 테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테죠.”

황금빛 눈동자가 똑바로 키리아를 향하며 진심을 요구했다.

“그래도 날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전….”

키리아는 한참 동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제논은 그녀가 말을 끝내길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가 대화를 억지로 봉합하듯 말했다.

“이건 내 사정일 뿐입니다. 그대는 여태까지처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서로 번거롭게 굴 필요는 전혀 없죠.”

제논이 몸을 돌렸다.

“돌아가죠.”

“공작님, 잠시만요!”

키리아가 불러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미련을 끊어내듯 단호한 걸음이었다.

“기다려요, 공작님! …공작님!”

안타까워하던 키리아는 그의 무시가 계속되자 이를 악물었다.

“아 좀 서라고욧!”

“……!”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키리아가 제논을 향해 우다다 달려갔다.

뒤를 돌아본 제논이 그녀의 기세에 흠칫했다.

“무,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키리아는 그의 팔을 덥석 붙잡고 박력 있게 그를 돌려세웠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가시… 흐억.”

박력이 지나쳤나?

예상보다 제논이 쉽게 몸을 돌려준 탓에 키리아는 제 힘에 못이겨 뒤로 넘어질 뻔했다.

놀란 제논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키리아는 제논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

“……!”

당황한 나머지 키리아는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논 역시 당황스러운지 몸이 잠시 경직된 것 같았다.

쿵쿵.

‘이, 이거 내 심장소리인가?’

고동이 제논의 가슴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의 고막을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키리아는 제 몸을 감싼 넓은 가슴과 따뜻한 체온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이 와중에 청량하고 남성적인 체향까지 좋을 건 뭐란 말인가.

‘얼굴이 뜨거워서 터질 것 같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키리아. 괜찮습니까?”

제논이 조심스럽게 키리아를 떼어놓으려 했다.

“아, 아직 안 돼요!”

키리아는 양손으로 제논의 앞섶을 꼭 잡고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품을 파고드는 키리아의 행동에 제논이 다시 경직됐다.

쿵쿵쿵.

‘어떡해. 심장이 더 세게 뛰잖아.’

조금씩 진정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리자, 키리아!

“후, 후우.”

이윽고 떨리는 숨을 진정시킨 키리아가 제논에게서 떨어졌다.

이 난감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인상을 썼다.

“사람 말은 다 듣고 가야죠. 왜 무시하고 먼저 가세요?”

“…미안합니다.”

“흠흠. 뭐… 아시면 됐고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키리아는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까 하신 얘기 말인데요. 공작님은 약제사가 아니시잖아요? 왜 혼자 진단을 하고 결론을 내버리세요? 그거 아주 위험한 거예요.”

“하지만.”

“아직 완전히 마족이 된 것도 아니시면서.”

“…예?”

“여기에 그 증거가 있잖아요.”

키리아가 싱긋 웃으며 제논의 얼굴 한 부분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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